한강 산문집『가만가만 부르는 노래』中
하얀 손을 흔들며 입가에는 예쁜 미소 짓지만
커다란 검은 눈에 가득 고인 눈물 보았네
차창 가에 힘없이 기대어 나의 손을 잡으며
안녕이란 말 한마디 다 못하고 돌아서 우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나 기약도 할 수 없는 이별
그녀의 마지막 남긴 말 내 맘에 내 몸에 봄 오면
그녀 실은 막차는 멀리멀리 사라져 가버리고
찬바람만 소리내어 내 머리를 휘날리는데
네가 멀리 떠난 후 나는 처음 외로움을 알았네
눈물을 감추려고 먼 하늘만 바라보았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나 기약도 할 수 없는 이별
그녀의 마지막 남긴 말 내 맘에 내 몸에 봄 오면
예전에는 너와 나 다정스런 친구로만 알았네
네가 멀리 떠난 후 사랑인 줄 나는 알았네
네가 돌아오는 날 나는 너를 맞으며 말하리라
나는 너를 영원히 사랑한다 말을 할 테야
언제 다시 만날 수 있나 기약도 할 수 없는 이별
그녀의 마지막 남긴 말 내 맘에 내 몸에 봄 오면
오래된 한 친구가 나에게 늘 신기해하는 면이 있는데, 바로 택시를 타면 딴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혼자 여행을 다닐 때면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아무렇지도 않은 듯―원래부터 쾌활한 사람이었던 듯―이야기를 주고받곤 하는데, 서울에서는 가끔 택시를 탈 때 그렇게 된다. (그렇다고 남들보다 특별히 자주 타는 건 아니지만).
물론 어쩐지 말을 안 트는 게 좋을 것 같은 아저씨들도 있어서, 그럴 땐 조용히 있는다. 또 내 기분이 그저 내키지 않아서 한마디도 안 건네는 때도 있다. 하지만 대체로는 우연하고 사소한 얘기에서 시작해 제법 깊은 얘기까지 오간 뒤에 택시에서 내리는 편이다. 어떨 땐 아저씨도 나도 깔깔 웃다 목적지에 다다르는데, 너무나 유쾌해진 아저씨가 뒷자리 몇백 원을 깎아줄 때도 있다.
도대체 무슨 얘길 하느냐고? 그야말로 별의별 얘기, 살아온 얘기, 손님들 험담, 택시 회사 험담, 힘든 생활, 전에 다니던 직장 얘기, 가족 얘기, 자식 자랑, 하천들 복개되기 전의 서울 얘기, 금방 헤어질 사람인 줄 알면서(어쩌면, 알기 때문에) 마음을 깊게 열어주는 사람도 가끔 있다. 삼 년 전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형님 이야기를 하다가 아저씨도 울고 나도 울고.
한번은 밤 열 시쯤 택시를 탔는데, 몸과 마음이 피곤한 날이어서 나는 어두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좌회전 신호가 유난히 짧아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사거리였다. 그때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하얀 손을 흔들며 입가에는 예쁜 미소 짓지만
커다란 검은 눈에 가득 고인 눈물 보았네
얼마나 오랜만에 듣는, 회전목마를 타는 것처럼 상쾌한 노래인지, 그런데 제목이 뭐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노래가 다 끝난 뒤 디제이가 얘기해줄 줄 알았는데, 시작하기 전에 이미 얘기했는지 다음 노래로 넘어 가버렸다. 제목만 알면 ‘벅스’에서 다시 들을 수 있을 텐데.
저기… 방금 나온 노래 제목 아세요?
망설이다가 내가 묻자 뒷머리 하얀 아저씨가 대답했다.
… 알지요.
뭔데요?
제목은 알아서 뭐하게요?
… 나중에 불러보려구요.
어디서?
노래방에 가본 지 오래고, 앞으로 갈 일도 별로 없을 것 같았지만 나는 편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뭐, 노래방 같은 데서요.
노래방 자주 가세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그런데 제목이 뭐예요?
아저씨는 좀 더 뜸을 들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근데, 이 노래가 좋아요?
예, 뭐…
젊은 사람이 이 노래를 알아요?
저… 어릴 때 들었던 기억이 나서요.
허허헛…
나는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대답 안 해주면, 안 듣고 말지. 한참 뒤에 아저씨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밤에 떠난 여인>이잖아요… 하남석이가 부른
아, 맞아요. <밤에 떠난 여인>!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고 보니, 신호등을 보고 있는 아저씨의 어두운 눈길이 백미러에 서늘히 비쳐 있었다.
갑자기 어쩐지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밤에 탄 택시에서는 얼굴을 잘 보고 말을 트는 편인데, 이 아저씨의 얼굴은 확실히 선량한 쪽인지 얼핏 판단이 잘되지 않았다. 괜히 말 붙였다, 더 이상 말하지 말자, 생각하며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데, 아저씨는 지지직 소리를 내며 주파수를 바꾸고, 바꾸고, 또 바꾸었다. 삼 초 간격, 오 초 간격으로 화가 난 걸까. 괴로운 곡절이라도 있는 노래였나. 나는 그만 좌불안석이 되어 하릴없이 휴대폰을 꺼내서 꼭 쥐었다.
마침내 무사히 집 앞에 이르렀을 때, 지갑을 꺼내는 나에게 아저씨는 말했다.
… 손님 내리기 전에 또 좋은 노래 안 나오나, 하고 계속 돌려봤는데 뭔 쓰잘데없는 말들만 많이 허네.
택시 천장의 등을 켜고 그제야 제대로 본 아저씨의 주름진 얼굴은 더 그럴 수 없을 만큼 선량했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해도 좋은 사람이 더 많다는 걸 택시를 타며 배우곤 한다. 정말 기억해둘 만한 세심한 충고를 던져주던 기사 아저씨 생각이 난다.
“아이 키운다고 남은 밥만 먹지 말고, 피곤하다고 새우잠 자지 말아요. 어엿하게 먹고, 팔다리 쭉 펴고 자요. 우리 마누라 보니까 그렇더라구. 그렇게 살아놓으니 아픈 데가 얼마나 많은지… 한 번 사는 인생이잖아요.”
어둠 때문에 잘못 보고 천원권 대신 내민 오천원권을 당연하게 돌려주는 마음.
접지른 발목이 잘 낫지 않으면 어느 병원 정형외과 어느 선생님에게 가보라며 상세히 알려주는 마음.
낯선 손님이 내리기 전에 좋은 노래 한 곡 더 들려주고 싶었던 그 마음.
실은 그 뒤로 한 번도 불러보지 않은 노래지만, 그 마음 잊지 않으려고 여기 적어 둔다. 밤에 떠난 여인>, 하남석이가 부른.
https://youtu.be/NIDh-UXh3J0?si=ho6jyJSESMVIG34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