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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Dec 18. 2024

한국전쟁과 기독교⑥

제1장 한반도 서북 지역과 월남 기독교인 by 윤정란 

서북 지역의 기독교인들이 조선의 신분제를 거부하고 정치·사회 개혁에 관심을 갖고 활동을 벌이기 시작한 것은 독립협회 창설과 함께였다. 독립협회는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실패한 뒤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서재필이 1896년에 설립했다. 
1부 전쟁
제1장 한반도 서북 지역과 월남 기독교인 
독립협회 회원들의 모습. 앞줄 좌측에서 4번째 앉은 이가 서재필 박사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3. 대한제국 황제권에 대한 도전(I)

이 지역의 기독교인들이 조선의 신분제를 거부하고 정치·사회 개혁에 관심을 갖고 활동을 벌이기 시작한 것은 독립협회 창설과 함께였다. 주지하다시피 독립협회는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실패한 뒤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서재필이 1896년에 설립했다. 서재필은 미국에서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지금 세계 각국에 문명 개화한 나라들은 다 구교나 야소교를 믿는 나라인즉…, 크리스도교가 문명개화하는 데는 긴요한 것”이라고 하면서²⁶ “크리스도의 교를 착실히 하는 나라들은 지금 세계에 제일 강하고 제일 부요하고 제일 문명하고 제일 개화가 되어 하나님의 큰 복음을 입고 살더라”라며 주장했다.²⁷ 결국 그가 미국 망명 기간에 경험한 것은 기독교를 토대로 한 미국의 근대 문명이었다. 서재필은 조선을 개혁하려면 반드시 가치에 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서재필의 기독교적 사고는 독립협회의 나아갈 방향을 결정했다. 독립협회의 중앙 지도부는 기독교계 인사들이 운영했으며, 지부의 절반 이상이 서북 지역에 설치되었다. 그 외의 다른 지역은 기독교가 성장하고 있던 곳이었다. 황국협회나 보부상들이 독립협회를 반대하는 시위를 벌일 때도 교회와 선교 학교에 대해 독립협회의 ‘창귀(倀鬼)’¹라고 지적했으며,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서도 독립협회와 기독교의 관계를 중요하게 보고 있었다. 지부가 설치된 곳은 공주, 평양, 대구, 선천, 의주, 강계, 북청, 목포, 인천, 옥천, 황주 등으로, 대부분의 지회는 그 지역민들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²⁸ 이 중에서 평양, 선천, 의주, 강계, 북청, 황주 등은 모두 서북 지역이었으며, 그중 절반 이상이 평안도 지역이다.    

 

평양지회는 1898년 독립협회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자 이에 호응해 조직되었다. 이 지회의 설립을 주도한 것은 안창호와 김종섭, 한석진, 방기창 등 널다리골교회 교인들이었는데, 선천 지회와 의주 지회는 평안북도 일대에서 전도 활동을 하던 김관근의 주도로 조직되었다. 대체로 서북 지역의 독립협회 운동은 교회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안창호도 독립협회 활동을 하면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는 1898년 대동강 변의 쾌재정에서 평양지회가 개최한 만수성절 행사의 대중 연설²을 통해 전국적인 인물이 되었다.²⁹   

  

이처럼 서북지역기독교인들이 독립협회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지회 활동을 한 것은 독립협회가 지향하는 바에 동조했기 때문이다. 독립협회가 지향한 바에 대해서는 연구자에 따라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로 갈린다. 전자의 입장은 독립협회가 한국 근대 시민사회를 수립하기 위한 새로운 사회사상, 즉 자주 국권의 민족주의 사상, 자유 민권의 민주주의 사상, 자강 개혁의 근대화 사상 등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것으로 파악하고, 이후 이러한 사상은 하나의 유기적 사상 체계로 형성되어 민중 계몽과 한국 사회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후자는 독립협회의 근대화 사상을 추적하면 오히려 친일적·반민중적·반민족적이었다고 주장한다.³⁰ 물론 이 두 입장 모두 근거가 있는 분석이며 평가다. 그런데 가치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평가가 나뉜 것으로 볼 수 있다. 근대화를 최고의 가치로 두던 1960년대 이후의 독립협회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민주화 운동이 활발해지고 민중적 시각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시대에는 독립협회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사실 근대라는 것은 민주/반민주, 민족/반민족, 식민/제국 등 이중적 구분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최근 포스트식민주의나 포스트근대주의에서는 근대를 계몽의 기획이 아닌 지배의 담론으로 본다. 과거 근대화를 최상의 가치로 설정했던 시대에 신화처럼 여기던 자유, 평등, 시민사회 등의 계몽적 담론에 대해 탈근대와 탈식민주의에서는 서양이 비서양을 인식론적으로 전유하기 위한 지배 담론이었다고 주장한다.    

 

앞에서 설명한 두 입장은 모두 근대화를 최상의 가치로 설정한 후에 당시 새롭게 등장하던 신흥 상공인층을 기준으로 할 것인지, 혹은 민중의 입장을 기준으로 할 것인지를 두고 평가한 것이다. 긍정과 부정의 평가를 떠나 독립협회가 주장한 것은 당시 조선 사회를 뛰어넘는 새로운 근대 시민 사상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근대 시민사회의 수립에 대한 지향이 정치 운동으로 시작된 것은 독립협회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³¹     


당시 독립협회가 지향했던 사상은 자주독립과 문명개화였다. 이를 위해 자유권, 독립권, 교육, 법, 진보, 개화 등 다양한 개념을 제시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고 사유재산을 가질 수 있는 개인의 자유와 경제적 활동의 중요성에 대한 것이 시민사회가 지향하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자유와 독립을 확보하기 위한 방법으로 교육, 법, 진보, 개화 등을 제시했다. 서북 지역 기독교인들이 독립협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것은 그동안 유교가 천시했던 상업을 그들이 재평가했기 때문이다. 독립협회에서는 “힘 가지고 뺏는 권리는 나라마다 장구치 못하고 학문과 장사하는 권리 얻는 나라는 그 이익을 잃는 법이 없고 세계에 대접받고”라고 주장하면서 물리적인 힘보다는 학문과 장사하는 권리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경제적 활동을 하는 개인의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받기 위해 독립협회에서는 생명, 자유, 재산에 관한 권리를 제시했다. 생명의 권리는 재산의 권리와 연결되어 있으며 재산의 권리는 산업 발달의 기초가 된다,³²     


서북 지역에서 상업적인 부로 기반을 닦은 신흥 상공인층이 자신들의 생명권을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면 축적한 부를 양반들에게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1908년 1월에 조직된 서북학회의 기관지 <서우>³³ 17호의 「서북제도(西北諸道)의 역사론」에서는 조선 시대에 서북 지역의 재산가들이 투옥되고 재산을 강탈하며 무거운 세금을 낼 수밖에 없었던 차별받던 역사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생명권은 서북 지역 신흥 상공인층에게 재산권의 전제 조건이 되며, 그들의 재산권은 자본주의적 상공업 발달 등 산업 발달의 토대가 된다.³⁴    

 

또한, 독립협회에서 주장한 독립이라는 것에는 자주독립과 관련해 부국강병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의한 주장뿐 아니라 개인의 독립도 포함된다. 또한 <독립신문>에서 독립이라는 개념은 개인이 자립하고 경제생활을 해서 자기 밥벌이를 자기가 한다는 개인적 차원의 개념으로 더 빈번히 사용되었다. <독립신문>에서 가장 강조한 것은 1896년 9월 15일 자 논설에서처럼 “사람마다 무슨 일을 할 줄 알든지 알아 자기 재조를 가지고 벌어먹어야 그 사람이 자주 독립한 사람도 되고”라는 주장과 같이 정말 나라에 필요한 사람은 벼슬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 재물 생길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³⁵     


이러한 개인의 자립적인 경제생활은 기독교의 금욕주의와 그대로 연결된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자본을 증식하고 싶은 사람들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업에 다시 투자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며, 이러한 투자 방법이 청교도 윤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인간 개인은 누구든지 재화를 벌면 편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데, 청교도 윤리를 가진 자본가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했다. 다시 말해 자본을 더 많이 축적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남들과 비교해 높은 윤리적 수준을 유지해야 했는데, 기독교가 이러한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보장해주었다는 것이다. 더 많은 자본을 획득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히 매우 엄격하고 금욕적인 태도가 요구되었다. 그러므로 신의 부르심에 따라 사는 동안 최선을 다한다는 기독교적 직업관이 오로지 일과 금욕에만 애쓸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청교도적 직업관과 금욕적인 생활 태도가 자본주의 생활양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청교도들의 금욕적 태도는 재산을 낭비하는 향락에 반대했다. 금욕주의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목적론적인 재산 추구는 마땅히 비난받아야 하는 것이었으나, 직업 노동의 결과물인 재산의 축적은 신의 축복이었다. 그리고 직업 노동은 최고의 금욕을 위한 수단임과 동시에 신앙의 진실성과 거듭난 자의 가장 확실한 증표였다.³⁶   

  

이러한 청교도 정신은 서북 지역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을 결정해주는 것이었으며, 상업 활동을 통한 이익 추구를 합리화해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서북 지역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청교도 정신에 입각해 상업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개인의 권리를 보장해줄 수 있는 시민사회를 지향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제국 황제권에 대한 도전<II>에서 계속)    


[옮긴이 註]

1) 창귀(倀鬼) : 중국에서 기원한 한국 민속 귀신의 한 종류. 흔히 호랑이에게 죽은 뒤 악령이 되어 또 다른 호환(虎患) 피해자를 만드는 귀신을 통칭한다. 호랑이가 서식하는 동북아시아 지역인 한국, 중국에서 나타난다. 한국 민간에서는 "홍살이 귀신", 특히 태백지역에서는 조금 더 토속적으로 "가문글기"라 한다. "창귀"는 두 종류의 귀신을 뜻하는데, 물려 죽건, 잡아먹히건 호랑이에게 죽은 사람의 혼(魂)이라는 뜻과 물에 빠져 죽은 자의 혼(魂)이라는 2가지 뜻으로 나뉜다. 그리고 1번의 특성을 사람에게 적용해 누군가의 끄나풀, 밀정 역을 하여 여러 사람을 사단에 휘말리게 한 인물을 특정한 낱말이 된다. 승정원일기와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이따금 이런 뜻을 가진 창귀가 나온다. 중국 쪽에는 이와 관련된 고사성어도 있다. 위호작창(爲虎作倀), 원래의 의미는 '호랑이를 위해 창귀가 되다'란 뜻으로, 악인을 도와 일하는 사람들을 비유하는 말이다. (나무위키)   

  

2) 아래는 1898년 7월 25일(음력) 뙤약볕 내리쬐는 한여름, 평양 대동강 서편 쪽 높은 언덕에 있는 쾌재정(快哉亭)에서 열린 독립협회 관서지부 주최의 만민공동회에서 19세 총각 도산 안창호가 한 소위 '쾌재정 연설'의 요지이다. 당시엔 녹음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누군가 미리 알고 초록한 것도 아니어서 정확한 연설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그날 워낙 청중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던 연설이기에 훗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내용을 후세에 기억을 더듬어 정리한 내용의 골자이다.     


만민공동회는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 선생이 1896년에 귀국해 조직한 독립협회에서 주관한 대중 집회이다. 독립협회는 활동의 하나로 황토마루 넓은 길에 정부의 고관들과 일반 국민을 한자리에 모아 연설을 듣고 정치를 토론하고 정부에 건의하는 만민공동회를 가졌다.     


당시엔 수천수만의 군중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도 개벽 이래 처음이요, 연설도 처음이요, 백성들이 손을 들어 찬성하여 정부에 건의하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것은 서재필 박사가 미국에서 들여온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정치 운동의 시험이었다. 

    

19세 청년 도산 안창호는 독립협회 관서지부(평양지부라고도 불림)를 조직하고 직접 연사로 나섰다. 쾌재정 정자 위에는 평안감사 조민희를 비롯한 고관대작들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이날은 고종 임금의 탄신일(음력 7월 25일)이었다.     


이날 청년 도산은 소위 '쾌재정 연설'을 통해 18조목의 쾌재와 18조목의 불쾌를 설파, 탐관오리의 행색을 샅샅이 들어 성토하여 청중들의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한다.    

 

"쾌재정, 쾌재정하기에 무엇이 쾌한가 했더니 오늘 이 자리야말로 쾌재를 부를 자리올시다. 오늘은 황제 폐하의 탄일인데, 우리 백성들이 이렇게 한데 모여 축하를 올리는 것은 전에 없이 첫 번 보는 일이니, 임금과 백성이 함께 즐기는 군민동락(君民同樂)의 날이라 어찌 쾌재가 아니고 무엇인가? 감사 이하 높은 관원들이 이 축하식에 우리와 자리를 함께하였으니 관민동락(官民同樂)이라 또한 쾌재가 아닐 수 없도다. 남녀노소 구별 없이 한데 모였으니 만민동락(萬民同樂)이라 더욱 쾌재라고 하리니, 이것이 또한 오늘 쾌재정의 삼쾌(三快)라 하는 바로라.     


세상을 바로 다스리겠다고 새 사또가 온다는 것은 말뿐이다. 백성들은 가뭄에 구름 바라듯이 잘 살게 해주기를 쳐다보는데, 인모(人毛) 탕건을 쓴 대관과 소관들은 내려와서 여기저기 쑥덕거리고 존문(存問:고을의 원이 그 지방의 형편을 알아보려고 관할 지역의 백성을 방문하던 일)만 보내니, 죽는 것은 애매한 백성뿐이 아닌가? 존문을 받은 사람은 당장에 돈을 싸 보내지 않으면 없는 죄도 있다 하여 잡아다 주리를 틀고 돈을 빼앗으니, 이런 학정이 또 어디 있는가? 뺏은 돈으로 허구헌 날 선화당에 기생을 불러 풍악 잡히고 연광정에 놀이만 다니니, 이래서야 어디 나라 꼴이 되겠는가? 진위 대장은 백성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책임인데 보호는 커녕 백성의 물건 빼앗는 것을 일삼으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겠는가?" 


[필자 註]

26) “논설”, <독립신문>, 1897년 12월 23일 자.     


27) “논설”, <독립신문>, 1897년 1월 26일 자.   

 

28) 박정신, 「기독교와 한국역사; 그 만남, 물림 그리고 엇물림의 사회사」, 『기독교와 한국역사』(연세대학교출판부, 1997), 185~187쪽, 주진오, 「1898년 독립협회 운동의 주도세력과 지지기반」, <역사와 현실>, 15호(한국역사연구회, 1995), 203쪽.     


29) 장규식, 『일제하 한국기독교민족주의연구』, 60~61쪽.    

 

30) 이나미,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책세상, 2001), 46쪽.     


31) 한홍구, 「한국의 시민사회, 역사는 있는가」, <시민과 세계>, 1호(참여사회연구소, 2002), 108쪽.     


32) 이나미, 『한국자유주의의 기원』, 48~61쪽.     


33) <서우>는 서우학회의 기관지였으나, 1908년 1월에 서우학회와 한북흥합회가 통합해 재조직되면서 서북학회의 기관지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같은 해 6월부터 ‘서북학회월보’로 명칭이 바뀌었다.  

    

34) 이나미, 『한국자유주의의 기원』, 62쪽     


35) 같은 책, 62~68쪽; “논설”, <독립신문>, 1897년 6월 1일 자.     


36) 자세한 것은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박성수 옮김(문예출판사, 1988) 참조.          

독립협회 토론회를 보기 위해 모여든 민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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