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한반도 서북 지역과 월남 기독교인 by 윤정란
단군과 기자의 땅이라는 자부심과 경제적 번성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가해지는 정치적 차별 때문에 서북지역의 지역민들은 다른 지방에서 볼 수 없을 정도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다.
1부 전쟁
제1장 한반도 서북 지역과 월남 기독교인
2.신흥 상공인층의 출현과 기독교 교세의 성장
서북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신흥 상공인층이 빨리 출현했다. 이 신흥 상공인층이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이 지역의 기독교 교세는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이 지역의 이러한 특수성은 역사적인 배경과 관련이 깊다. 한반도에서 서북지역은 오랫동안 단군과 기자의 땅으로서 한민족의 발상지이자 문명화의 전초기지로 인식되어왔다. 이러한 인식은 서북 지역민에게도 내재화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이 지역은 정치적·사회적으로 지속적인 차별을 받았다. 이 지역민들은 단군과 기자를 내세워 차별을 극복하려 했으나, 두터운 지역 차별의 경계를 넘지 못했다.⁶ 대체로 이 지역은 여말선초부터 조선 중기에 이르도록 향촌 질서를 체계화할 수 있는 사족(士族)이 형성되지 않았다. 단지 군포를 납부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구분이 될 뿐이었다. 선조 대까지 이 지역은 도망민이 많았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까지도 다른 종족(오랑캐)이 거주하는 등 유민이 가장 많은 곳이었다. 사족 대신 향임이 향촌을 지배했고, 중앙의 사족들은 이들을 자신들과 동급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사림파가 정권을 주도하면서 이러한 차별은 더욱 강해졌다. 사족의 입장에서 보면 이 지역의 문화는 낙후된 것이었다.⁷ 이러한 이유로 이 지역민들은 중앙 관직으로 진출하기 위한 실무 수습직에 임명되어야 하는데 이 지역 출신에게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⁸
이 지역의 중심세력은 사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배·피지배 관계가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두드러지지 않았다. 척박한 농토, 정치적 차별 등으로 이 지역민들은 일찍부터 상업에 관심을 두었다. 청(淸)과의 관계가 호전되면서 이 지역민들은 무역업으로 상당한 자산을 축적했고, 18세기 중엽에는 경제력이 전국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조선 정부의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으며, 그 결과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었다. 중앙에서는 이 지역의 인재 등용에 힘을 기울였으나, 기득권층인 중앙 사족이 구축해놓은 높은 벽을 깨지 못했다. 경제력은 최고가 되었지만, 실제 권력을 잡지는 못했다.⁹ 유교적 시스템을 갖춘 조선 정부에 이들이 기대할 것은 더는 없었다.
단군과 기자의 땅이라는 자부심과 경제적 번성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가해지는 정치적 차별 때문에 이곳의 지역민들은 다른 지방에서 볼 수 없을 정도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다. 한편으로 미국 선교사들은 선교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단군 신화에 등장하는 유일신을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과 연결했다.¹⁰ 지역민들은 자신들의 지역신으로 오랫동안 모셔온 단군 신화에 등장하는 유일신과 서양의 번성과 관련되어 있는 기독교의 유일신을 자연스럽게 연계하면서 조선 왕조를 부정하는 의식으로까지 확대해나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연계로 말미암아 기독교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이 지역에 대해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는 이 지역을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선교지역으로 손꼽았으며, 주목을 받고 있다고 했다.¹¹ 미국 장로교 본부의 총무 로버트 스피어(Robert Elliott Speer)도 이 지역의 교회 발전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하고 있으며, 교회당은 초만원을 이루고 있다고 지적했다.¹² 1897년 5월 20일 자 <독립신문> 영문판의 한 기사에 의하면 남쪽 지방에서는 자립적인 중산층이 허리를 굽히고 아첨만 하는 농노와 양반 틈에서 짓눌리고 있었으나, 북쪽 지방에서는 자립적 중산층이 우세해 보였다고 쓰여 있다.¹³
이광린은 여기서 자립적인 중산층을 중소 지주, 자작농, 상인으로 보고 있다. 즉, 신흥 상공인층들이다. 이 지역의 상인들은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승정원일기』에서도 “관서지방은 토산물이 삼남 지방보다 미치지 못합니다. 밭이 논보다 많고, 상인이 농민보다 많고, 사람들은 근본, 즉 농사에 힘씀이 적고, 말기(末技), 즉 상업에 종사함을 좋아하는 형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9세기 중반의 『비변사담록』을 보면 대동강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상선을 갖고 장사하는 경우가 많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지역은 개항되자마자 여느 지역보다 빨리 상회를 열었다. 헌터 웰스(Hunter Wells)는 “지금 영광스러웠던 고대의 모습이나 위엄을 평양시에서 찾기 어렵지만, 이곳은 상업이 발달해 있다. 아마 머지않아 상업이 전국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평양시가 조선의 수도가 된다고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라면서 서울의 명망 있는 사람이 예견했다”라고 말했다.¹⁴ 19세기 말에는 중국 잉커우 항(營口港)에 들른 한국 상인의 숫자가 9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들은 주로 서북 지역민들로서 한문과 만주어에 능통한 독서층들이었다. 서북 지역민들은 고려 인삼을 비롯해 금, 납, 문종이, 소가죽, 가발 등을 팔았으며, 영국산 면제품, 차, 설탕 등 중국산 소비재 물품을 수입했다.¹⁵
이 지역의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차별을 받고 과거에 급제해도 관직으로 나가지 못했으므로, 자신의 고향에서 서원 혹은 서당을 열어 젊은이들을 교육했다.¹⁶ 이러한 배경 때문에 이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문맹률이 낮았다. 서북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최적의 장소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최초의 세례자도 이 지역에서 나왔다. 최초의 세례자는 국경을 넘나들며 상업에 종사하던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 등이었다. 그들은 만주에서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매킨타이어(John McIntyre)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 계기는 백홍주의 아버지 때문이었다. 백홍준의 아버지가 펑톈(奉天)에 다니러 갔다가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를 만나 한문 복음서를 받았다. 이 복음서를 아들 백홍준이 몇몇 친구와 2~3년간 공부한 후, 더 배우기 위해 펑톈으로 가서 세례를 받은 것이다. 평안북도 의주 출신의 홍삼 장수 서장륜도 펑톈에 가서 로스와 매킨타이어를 만나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이들은 의주와 소래에 신앙 공동체를 운영하며 기독교의 확대를 도모했다.¹⁷
1884년에 선교사들이 내한이 합법화된 이후 이 지역을 처음 찾은 선교사는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원두우)와 헨리 아펜젤러(Hennry G. Appenzeller; 아편설라)였다. 언더우드가 서울에서 한국 최초의 정동장로교회(지금의 새문안교회)를 설립할 수 있었던 것은 의주 출신 상인들의 전도와 권서ᵃ⁾ 활동 때문이었다. 서북지역에 교회가 설립된 것은 새뮤얼 모펏(Samuel Moffett; 마포삼열)이 평양에 정착한 이후였다. 그는 널다리골교회를 세우고 평양을 거점으로 여러 교회를 개척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이곳 지역민들이 그 토대를 마련해놓았기 때문이다. 평양교회의 실질적인 개척자는 한석진인데, 그는 의주에서 만주를 넘나들며 인삼과 녹용을 팔던 상인이었다. 물산 객주 최치량은 널다리골교회의 거점을 마련해주었다. 이와 같이 한국교회는 서북지역 신흥 상고인층의 적극적인 호응으로 설립되었다,¹⁸
그러나 모든 서북 지역민이 기독교를 호의적으로 본 것은 아니었다. 초기 선교사들은 일부 주민에게 돌팔매질을 당하기도 했으며, 그들이 기물을 파괴하는 것을 감내해야 했다. 또한, 관의 압박도 있었다. 예를 들어 백홍준은 평양에서 활동하다가 국법을 어긴 죄로 평양 감영에 수감되었다가 몸이 쇠약해 숨을 거두었다. 1894년 평양 감사 민병석은 장로교 전도인 한석진, 감리교 전도인 김창식을 구금·단죄하기도 했다.¹⁹
그런데 오히려 이러한 관의 압박이 기독교인을 증가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서양 선교사들이 관에 시달리던 한국 기독교인들을 도와주자, 많은 지역민이 교회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이 민병석이 구금한 교인들을 영국과 미국 총영사의 힘을 빌려 석방시킨 것이다. 이러한 사건을 지켜보던 주민들은 관리에게 빼앗긴 토지를 찾거나, 부당한 잡세의 징수를 막거나, 혹은 자신의 토지와 가옥의 명의를 선교사 이름으로 이전해 재산을 보호받는 등 이권 때문에 선교사들을 찾기 시작했다.²⁰
이와 함께 서북 지역민들이 기독교에 더욱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1894년의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그리고 1907년의 평양대부흥회였다. 그동안 신흥 상공인층 중심으로 기독교가 전파되었으나, 전쟁과 부흥회를 통해 더욱더 많은 사람이 수용하게 된 것이다.²¹
청일전쟁 이후 2~3년 사이에 서북지역 기독교인들은 급격하게 늘어났다. 전쟁 전에 개척된 구역은 7개 지역이었으나, 이후에는 18개 지역으로 증가한 것이다. 그리고 1898년 전체 장로교인의 수가 7500명이었는데 이 중에서 79.3%에 해당하는 5950명이 서북 지역민들이었다. 전쟁 시기에 지역민들이 교회를 찾은 이유는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기 위해서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에도 “일청전쟁(日淸戰爭)이 교전(交戰)케 되니… 복음(福音)의 소도(所到)에 중혼(衆魂)이 시소(始蘇)하여 교회(敎會)가 종차발전(從此發展)하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지역은 청일전쟁의 주요 전장이었으므로 많은 지역민이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교회에 의탁했다. 당시 교회가 피난민 수용소 역할을 했으며, 일본군조차 교회만은 보호해주었다. 주요한 전투 지역인 평양의 교인들이 지방으로 피난을 가면서 서북지역 전역에 교회가 설립되었다.²² 1904년 러일전쟁의 한반도 내 전투지도 평안북도 의주였다. 1905년에서 1907년 사이에 평안도의 대부분 지역과 황해도 일부를 관할하던 북장로교의 교회와 신도의 수는 배로 증가했다.²³
서북지역의 교세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성공으로 더욱 확장되었다. 선교사들의 기도 모임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같은 해 1월 6일부터 10여 일간 평양 장대현교회의 사경회 기간 중에 절정에 이르렀다. 평양의 기독교계 학생들은 수업을 중단하고 기도회에 참석했으며, 전도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대부흥운동은 서북지역 전역으로, 나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 제1권에 의하면 이 운동은 한국교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는데,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기독교의 순수한 신앙과 정신이 한국 기독교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는 점, 한국인 신자와 선교사 간의 이해 증진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 한국교회 교인들의 도덕적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 등이다.²⁴ 이 중에서 도덕적 향상이라는 것은 절제 담론이었다. 청교도 윤리에 의한 금식, 절제, 노동의 신성성 등이 최선의 가치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즉, 유교적인 생활 문화를 버리고 서양의 근대적 사상을 많은 지역 주민이 수용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서북지역은 이러한 역사적 특수성 때문에 기독교 색채가 가장 강한 곳이 되었다.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의 여성 운동가였으며, 추계학원을 설립한 황신덕은 평양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요새도 평양을 흔히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할 만큼, 그때 평양의 여러 가지 사회적 여건이 그랬었지요. 국가에서 과거부터 이북 사람을 많이 기피하기 때문에 등용을 잘 안 하는 것에 대해 소외감을 느꼈지요. 또 기질상으로 봐서 퍽 혁명적이죠. 또 애국 지도자들이 많이 계셨어요. 도산 안창호 선생이라든가, 그 밖에 조만식 선생님이라든지, 여러 애국 지도자들이 많이 기독교인으로 됐어요. 그런 관계로 해서 전 평양의 분위가 교회 일색이었어요. 주일날 같은 때는, 여기로 말하면 종로 일대의 가게 문을 꼭 닫아걸고, 종소리가 사면에서 경쟁적으로 울릴 그럴 정도로 분위기가 기독교적이어서 그때는 참 좋았습니다.²⁵
서북지역은 이처럼 지역적 특수성 때문에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했으며, 다른 어느 지역보다 기독교 사상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 다시 말해 이 지역민들은 그만큼 다른 지역에 비해 서양의 문명을 받아들이는 데 앞장섰으며, 조선의 신분제 사회를 부정하고 근대 시민사회를 지향했다고 할 수 있다.
[옮긴이 註]
ᵃ) 권서(勸書): 한국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복음화가 빠르게 진전되었다. 여기에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비롯한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희생과 헌신이 크게 기여하였다. 이와 더불어 영적 황무지를 일구는 개척의 최선봉에 서서 성경 보급과 복음전파에 목숨 걸었던 ‘권서들’의 공로 또한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권서들은 초기 한국교회에 밀려든 모진 시련을 온몸으로 감당하며 돌밭을 일구어낸 믿음의 용사들이었다.
권서(colporteur)는 목이나 어깨에 봇짐을 메고 물건을 운반하는 행상인이라는 말에서 유래했으며, 일반적으로 “성경책이나 전도 책자 등을 사서 읽도록 권하는 사람”을 뜻한다. 한국 최초의 권서는 “한국교회의 요람”이라는 소래교회를 설립하기도 했던 서상륜이다. 그가 1882년 10월경 최초로 존 로스역 한글 성경을 한반도에 들여와 복음의 씨앗을 뿌리면서 한국교회의 터전이 일구어지기 시작했다. -허명섭 박사의 글 ‘이름도 빛도 없이 복음을 밝혔던 권서들의 이야기’에서 발췌. <크리스찬 투데이 2005. 2. 19>
[필자 註]
6) 오수창, 「<청구야담>에 나타난 조선 후기 평양 인식과 그 성격」, <한국사 연구>, 137호(한국사연구회, 2007), 97~100쪽.
7) 오수창, 「조선후기 경상도·평안도 지역파별의 비교」, <역시비평>, 59호(역사문제연구소, 2002), 319~331쪽
8) 문과와 무과에 급제하면 각각 승문원, 성균관, 교서관 등에서 분관(分館)과 선전관천(宣傳官薦)으로 수습 기간을 거쳐야 한다. 수습직이라 하더라도 경력이 같지 않았는데, 주요 관직에 진출하려면 문과의 경우에는 승문원 분관으로 일해야 하며, 무과에서는 선전관천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서북 지역민들에게는 이 자리를 주지 않았다.(같은 글, 321~322쪽).
9) 같은 글, 329~331쪽
10) 김은섭, 「예수와 단군, 그 구조와 융합」, <교회사학>, 11권 1호(한국기독교회사학회, 2012), 152~156쪽.
11) 이광린, 「개화기 관서지방과 개신교」, 숭전대학교부설 한국기독교 문화연구소 엮음, 『한국의 근대화와 기독교』(숭전대학교출판부, 1983), 32쪽.
12) 백낙준, 『한국개신교사: 1832~1910』(연세대학교출판부, 1973), 285쪽.
13) Friar Martin, “Notes on a Trip intro Northern Korea,” The Independent, May 20, 1897.
14) 이광린, 「개화기 관서지방과 개신교」, 38~40쪽
15) 한국기독교사연구회, 『한국 기독교의 역사. 1』 (기독교문사, 1989), 143쪽
16) 이광린, 「개화기 관서지방과 개신교」, 41쪽
17) 서정민, 「평안도 지역 기독교사의 개관」, <한국기독교와 역사>, 3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4), 10~13쪽
18) 장규식, 『일제하 한국기독교민족주의 연구』(혜안, 2000), 32쪽
19) 서정민, 「평안도 지역 기독교사의 개관」, 15쪽
20) 김상태, 「평안도 기독교 세력과 친미엘리트의 형성」, 177~178쪽
21) 같은 글, 178쪽
22) 한국기독교사연구회, 『한국 기독교의 역사. 1』, 255~259쪽.
23) 해리 로즈, 『미국 북장로교 한국 선교회사: 1884~1934. Vol. 1』, 최재건 옮김(연세대학교 출판부, 2009), 539쪽; 박정신, 『근대 한국과 기독교: 그 만남, 물림 그리고 엇물림의 사회사』(민영사, 1997), 28쪽.
24) 한국기독교사연구회, 『한국 기독교의 역사. 1』, 273~274쪽.
25) 추계황신덕선생기념사업회 엮음, 『무너지지 않는 집을: 황신덕 선생 유고집』(추계황신덕선생기념사업회, 1984), 3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