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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Nov 25. 2023

돗괴기 석 점의 행복

2019년 1월 14일 한라일보 <김양훈의 한라시론>

황금숭배에 물든 세상.
돈이란 요물만 있다면
귀신을 부리고
처녀 불알도 살 수 있다지만,
행하기 어려워 그렇지
재물 가지고도
어쩌지 못하는
귀한 것들이 세상에는 많다.

황금돼지해라며 너 나 없이 우리 모두 다 같이 신나게 벌자는 돈(豚)타령 기원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서민에게는 해를 거듭해 이어지는 불경기인지라 아닌 말로 헛방귀나 아니었으면 좋으련만! 올해가 기해년 돼지해라니 제주 섬나라의 한미한 촌 동네 시골뜨기 출신 아니랄까 봐, 나는 어릴 적 시골집 돗통시가 생각나고 터럭이 고슴도치 같았던 검은 똥돼지가 떠오른다.


50년 전 시골 결혼잔치 풍경. 올레길로 열린 신랑집 이문간에는 동네 형들이 솔문을 세우느라 분주했다. 동네 형들은 대문 양쪽에 세운 나무기둥에 푸른 솔잎을 둘러 솔문을 만들었다. 꽃봉오리가 터지기 시작한 야생 동백을 꺾어와 솔잎 사이사이 꽂았다. 검은 먹물 대신 흰 밀가루 풀을 붓에 듬뿍 적셔 창호지를 몇 겹으로 바른 널빤지 가운데 상단에 한자로 ‘축 화혼’이라 쓴 아랫줄에 신랑 아무개 군 신부 아무개 양을 썼다. 그런 다음, 풀 발라 쓴 글 위에 노란 차조 좁쌀을 뿌리고 털어냈다. ‘축 화혼’ 현판(懸板) 귀퉁이에는 색색으로 접은 종이꽃을 달고, 솔문 아래로 색종이 테이프를 휘휘 감아 늘어뜨렸다. 그렇게 바닷바람을 맞으며 솔문이 세워지던 날은 혼례 이틀 전, ‘가문잔칫날’이었다. 잔치돼지를 잡는 ‘돗 잡는 날’이 바로 이날이다.


가문잔치엔 마을 안 궨당(眷黨)과 이웃사촌은 물론 동네 밖 일가친척들도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마당 구석 한편에는 반드럼통에 몸국이 펄펄 끓었다. 돗괴기와 수애를 삶아낸 육수에 모자반()을 썰어 넣고 몸국을 끓인다. 국수 한 그릇과 떡과 전 접시를 올린 소반에 칼솜씨 좋은 괴기 도감(都監)은 돗괴기 석 점을 날렵하게 베어 접시에 올렸다. 이 소반을 궨당 하객들에게 테우는데, 곧 ‘가문반’이다. 기름진 음식이 흔치 않던 당시였다. 잔치마당 천막 아래에서 종일 돼지비계에 지지며 전을 부치는 기름진 냄새는 축하객들의 마음을 마냥 흥겹게 만들었다.


한국전쟁 전까지는 돗 잡는 사람과 괴기 도감, 그리고 괴깃반 테우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도감이 고기를 썰면 접시에 고기를 담는 젖도감·짝도감도 있어 반 테우는 사람에게 돗괴기 반을 날라주었다. 돗괴기는 귀한 음식이었기에 혼주도 도감의 허락을 받고서야 괴깃반을 얻어갔다. 도감은 그에게 주어진 돗괴기의 양으로 사흘간 잔치손님 대접을 마쳐야 할 책임이 있었다.  


잔칫날이나 식갯날이면 반을 테우던 돗괴기 석 점. 이를 받아들면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마음은 흐뭇했다. 황금숭배에 물든 세상. 돈이란 요물만 있다면 귀신을 부리고 처녀 불알도 살 수 있다지만, 행하기 어려워 그렇지 재물 가지고도 어쩌지 못하는 귀한 것들이 세상에는 많다.


설날을 열흘 앞둔 한겨울. 제주도청 앞에 천막을 친 사람들이 늘었는데, 욀총이 남달라 천재소리를 듣는 도백은 어찌 된 일로 근간 쥐알봉수 놀림까지 받고 있으렷다. 그런 도백이 백성을 가엽게 여겨 천막촌 한가운데 가마를 걸어 몸국을 끓여 먹이고, 사람들에게 돗괴기 반 테우는 꿈을 꾼다. 허나 황금돼지의 행운은 늘상 꾀 많고 힘 있는 재주꾼들의 독차지다. 돗괴기 석 점을 쉽사리 나누어줄 리 없으리니, 그리하여 개꿈 백일몽이던가? 제대로 속 시원하게 풀리는 일 없고 돗괴기 반 테우던 설맹질은 낼모레라 엉뚱한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총명하기 어렵고 어리석기도 어려운데, 똘똘한 사람이 어수룩한 척하기는 더욱 어렵다. 집착을 버리고 한 걸음 물러서는 순간 마음이 편해지느니, 뜻하지 않고 있노라면 후에 복으로써 보답이 올 것이다.’ 청나라 서화가 정섭(鄭燮)의 난득호도(難得糊塗)다. 들을 귀가 있다면 좋겠다.

잔치집 괴기도감, 고영일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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