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를 쓰다』⑦

슈테판 츠바이크의 ‘도스토옙스키 평전’ 中

by 김양훈
독서모임 8월 과제독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나는 인간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포함해서.”
-도스토옙스키

사실주의와 환상(II)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의 영혼이 일반적 형식을 밀치고 나오는 바로 그곳에서 인간 영혼의 충일(充溢)을 파악한다. 아마도 인간이 자기 가능성의 극단을 넘어서는 짧은 순간이 이에 속할 것이다. 그는 화해라든가 조화와 같은 중간 상황을 증오했다. 오로지 특별한 것,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마법적인 것만이 그의 예술적 열정을 자극하여 위대한 사실주의에 이르게 했다. 그는 진기한 것을 가장 조형적으로 훌륭하게 형상화하는 예술가이자, 일찍이 예술 분야에서 알려져 있던 민감한 병적 영혼의 가장 위대한 해부자이다. 그가 그의 작중인물의 내부로 파고드는 데 사용한 도구는 바로 언어이다. 괴테는 시각을 통해 모든 것을 묘사한다. 바그너가 적절히 차이점을 언급했듯이 괴테는 눈의 인간이고, 도스토옙스키는 귀의 인간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먼저 그의 인물들이 하는 말을 들은 뒤 그들이 이야기하게 시켰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들을 눈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메레슈콥스키¹⁾는 다음의 두 러시아 서사 작가에 대한 천재적 분석을 통해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톨스토이의 경우 우리는 보기 때문에 듣는 것이고, 도스토옙스키에서는 우리가 듣기 때문에 보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말을 하지 않는 한 그림자 또는 혼령이다. 언어가 그들의 영혼을 피어나게 하는 촉촉한 이슬인 것이다. 환상의 꽃들처럼 그들은 대화를 통해 내면을 열고, 색채와 풍부한 꽃가루를 보여준다. 토론하면서 그들은 달아오르고, 영혼의 잠에서 깨어나 각성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예술적 열정은 앞서 언급했듯이 이런 열정적 인간을 향한다.

그는 영혼 자체를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영혼 밖으로 말을 유인해 낸다. 세부적인 것의 마법적, 심리적 형안(炯眼)²⁾은 종국적으로 예민한 청력과 다른 것이 아니다. 세계문학의 어떤 작품을 견주어도 그의 인물의 말보다 더 완벽한 조형적 구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낱말의 설정은 상징적이고, 언어의 형상은 우연성이라곤 없을 만큼 특징적이다. 모든 음절의 분절. 강세 없는 어조는 필수적이다. 휴지와 반복, 호흡과 말 더듬는 것까지도 중시되고 있어서 이미 표현된 언어조차 어떤 억눌린 공명(共鳴)이 나타난다.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나타난 대화로부터 각자가 말하거나 말하고자 하는 것만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침묵까지도 소리로서 듣게 된다. 영혼의 소리를 듣는 이런 천재적 사실주의는 언어의 가장 비밀스러운 상태에까지 깊숙이 파고든다. 이를테면 그것은 취객의 알 수 없는 주정 소리, 간질 발작 시에 발생하는 짜릿한 황홀감과 헐떡이는 소리, 거짓된 착종³⁾의 덤불숲으로 까지 파고든다. 뜨거운 말의 증기로 영혼이 생겨나고, 영혼으로부터 육체가 점차 결정화된다. 독자는 그의 작중인물들의 말하는 소리를 듣자마자, 꿈을 꾸듯 그들의 생동하는 모습을 천리안으로 보게 된다.

Prince Myshkin and Parfyon Rogozhin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인물들을 도식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절제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의 독자들이 그들의 대화에 맥없이 동화되어 잘못된 환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예를『백치』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이 소설에서 병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늙은 장군은 영주 미슈킨과 함께 걸어가며 과거의 추억을 이야기한다. 역시나 그의 거짓말이 시작되고, 자신도 거짓말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 그것에 휩쓸린다, 그는 거짓말을 계속 늘어놓고, 또 늘어놓는다. 거짓말이 홍수가 되어 사방으로 넘쳐흐른다. 작가는 거짓말쟁이의 태도를 어느 곳에서도 묘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그의 말과 무의식적인 실수, 중지, 신경질적 조급함 때문에 그가 영주 미슈킨과 대화하면서 어떻게 자신의 거짓말에 말려들어 자승자박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혹시나 영주가 의심치 않을까 조심스레 곁눈질하면서 이제라도 자신의 말을 중단시켜 주길 바라는 모습을 눈앞에 그려볼 수 있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얼굴은 처음에는 고무되었다가 이내 불안으로 떨면서, 매를 맞을까 두려워하는 개처럼 움츠러든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런가 하면 거짓말쟁이의 온갖 노고를 느끼고 있으면서도 애써 자제하는 영주의 모습도 눈앞에 그려진다.

도스토옙스키는 대체 이런 묘사를 어디에 하고 있는 것일까? 작품의 어느 구석에서도 단 한 줄 찾아볼 수 없으나 그의 얼굴의 주름살이 생생하게 그려지는 듯하다. 어법이나 억양, 음절의 위치 등 어디에나 이 마술사의 비법이 감추어져 있다. 더욱이 사실적 모사 기법은 마술 같아서 외국어 번역에 따른 낯섦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물의 영혼은 날아오른다.

그의 작품에서 인물의 전체적 성격은 언어의 리듬에 있다. 그의 천재적 직관은 아주 미소한 단위, 거의 1음절로 압축되어 표출된다. 표도르 카라마조프가 그루셴카의 편지봉투에 그녀의 이름으로 “나의 사탕!”이라고 썼을 때. 우리는 늙은 무뢰한의 뻔뻔스러운 모습은 물론, 성치 않은 이빨들 사이로 침이 흘러내려 와 입술을 더럽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죽음의 집에서 기록』에서 사디스트 대대장이 태형을 가하며 “때-려, 때-려!”라고 외칠 때, 이 작은 생략 부호 안에 그의 전반적 성격과 난폭함, 정욕에 헐떡거리는 이글거리는 눈동자, 붉게 상기된 얼굴, 사악한 쾌감을 내뱉는 기침 등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었다.

도스토옙스키에게서 이런 사실주의적 세부묘사는 날카로운 낚싯바늘처럼 감정의 내부로 파고들어 어려움 없이 낯선 체험을 낚아 올린다. 이는 그의 가장 탁월한 예술수단인 동시에 계획적 자연주의에 대한 직관적 사실주의의 가장 큰 승리를 의미한다. 물론 그가 이런 세부묘사를 아무 때나 마구 사용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른 많은 작가가 응용한 지점에 자기 고유의 것을 설치해 놓는다. 그러나 최종 진리에 완벽하게 부합되는 개별요소를 위하여 탐욕스러운 세련화 작업을 반복한다. 그는 이렇게 준비한 개별요소를 우리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최절정의 순간에 내보임으로써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한다.

언제나 그는 냉혹한 손으로 황홀의 잔에 현세성이라는 분노의 술을 따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에게 현실적이고 참된 것이란 반낭만적, 반감상적인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분열되었다고 느끼듯 우리도 분열을 즐기기를 원한다. 어떤 조화나 균형도 원치 않는다. 언제나 그의 작품들에는 갈라져 떨어진 분열상의 존재한다. 이럴 때면 그는 악마적 세부묘사를 통하여 가장 숭고한 찰나의 시간을 깨뜨리고는, 신성한 삶에 내재한 진부함을 조롱한다.

『백치』에 나타난 비극을 떠올리면, 비교가 좀 더 뚜렷해질 것이다. 로고신은 나스타샤 필리포프나를 살해한 뒤 형제인 미슈킨을 찾아 나선다. 거리에서 그를 발견한 로고신은 주먹을 휘두른다. 둘 사이에는 말이 필요 없다. 공포의 예감이 모든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들은 길을 건너서 피살자가 누워 있는 집으로 향한다. 뭔가 엄청난 예감이 한꺼번에 일어나 사방에 울려 퍼진다, 감정으로는 형제인 두 철천지원수가 피살자의 방으로 들어간다. 죽은 필리포프나가 그곳에 누워 있다.

우리는 이제 그들이 둘 사이를 갈라놓은 여자의 시체 옆에 마주 서서 마지막으로 무엇인가 말하리라는 것을 예감한다. 그렇다, 대화가 곧바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때 온 하늘은 잔인하게 타오르는 악마적 정신의 빈틈이라곤 없는 즉물성에 의해 파괴된다. 그들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시체에서 악취가 풍길지에 관해 태연하게 말한다. 로고신은 단호하고 냉정하게 말한다. “좋은 미국산 방수포를 사서 소독약 네 병을 거기에 부었지.”

“사실보다 더 기이한 것은 없다.”
— 《지하로부터의 수기》 중

이런 세부묘사를 나는 도스토옙스키 작품이 지닌 사디즘적, 악마적 세부묘사라고 칭한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사실주의가 단순히 예술기법 상의 개념 이상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의 사실주의는 형이상학적 보복이고, 비밀스러운 환락의 돌출, 강렬한 반어적 실망이기 때문이다. “네 병!”이라는 수학적 수치, “미국산 방수포”라는 잔인한 세부묘사, 그것은 영적 조화의 의도적 파괴인 동시에 감정 통일에 대한 무자비한 모반이다.

그는(반낭만주의자, 반감상주의자로) 고의로 이런 장면을 아주 평범한 곳에 배치한다. 맥주와 브랜디의 역겨운 냄새가 풍기는 누추한 지하 술집, 나무 칸막이로 나눠진 침침하고 비좁은 “주검”의 방은 있어도 화려한 살롱이나 호텔, 궁전, 은행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그의 인물들은 겉보기에 “흥미 없는”, 결핵에 걸린 여자들. 타락한 대학생. 게으름뱅이. 난봉꾼, 건달 등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사교성이라곤 없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바로 이 음울한 일상에서 그는 시대의 가장 위대한 비극을 설정해 놓았다. 비참한 것으로부터 숭고한 것이 환상적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그에게서 외적 냉담과 영혼의 도취, 공간적 빈곤, 방탕한 피를 대조하는 것보다 더 악마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없다. 술집에서는 만취한 사람들이 앞으로 도래할 러시아, 즉 제3제국의 부활을 예고하고, 성스러운 알료사가 전설을 이야기하는 동안 창녀가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있다. 사창가와 도박장에서는 성직자들이 선과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 라스콜니코프가 보여주는 가장 숭고한 장면은 살인자가 엎드려 전 인류의 고통 앞에 고개를 숙이는 모습으로, 이 장면은 말더듬이 재단사 카페르나우모프의 집, 한 창녀의 모퉁이 방에서 이루어진다.

차갑거나 뜨겁거나 끊임없는 감정의 순환은 도스토옙스키의 경우 결코 미지근한 법이 없다. 그의 열정은 완전히 요한계시록의 의미에 따라 삶을 뜨겁게 달군다. 그렇게 달구어진 감정을 그는 불안이 압도할 때에야 버린다. 이런 까닭에 독자들은 그이 소설을 읽을 때 잠시도 눈을 돌리지 못하며, 부드러운 음악적 삶의 리듬 속으로도 빠져들지 못한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숨쉬기가 어렵고, 마치 전기 충격을 받을 때처럼 짜릿한 희열에 몸을 떤다. 점점 더 뜨겁고, 불안하고, 호기심에 빠져서 어쩔 줄 모른다. 우리가 그의 문학적 위력 속에 있는 한, 우리는 그 자신과 흡사해진다. 도스토옙스키는 영원한 이원론자로서, 분열의 십자가를 짊어진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과 작중인물들에 했듯이 독자의 감정 통일을 여지없이 깨트려 버린다.

그렇지만 그의 작품의 진리가 이런 마력에 의해 완성되었음에도 왜 이 모든 작품의 현세성은 우리에게 현세를 초월하는 것처럼 작용하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그 세계는 우리의 세계와 같으면서도 다른 세계처럼 다가서는 것일까? 우리는 뜨거운 마음으로 그 세계에 깊숙이 들어와 있으면서도 왜 낯설게만 느껴지는가? 왜 그의 소설에는 빛과 같은 그 무엇이 불타오르고, 왜 거기에는 환각과 꿈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존재하는가? 왜 우리는 이 철저한 사실주의자를 현실의 서술자라기보다 매번 몽유병자로 느끼는가? 그 모든 열정과 황홀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풍요로운 태양이 아니라 핏빛으로 빛나는 고통스러운 극광이 있는 것일까? 왜 우리는 주어진 삶에 대한 진실한 묘사를 삶 자체로 느끼지 못하는가? 왜 우리 자신의 삶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가?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비교의 가장 훌륭한 기준조차도 그에게는 너무나 하잘것없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세계문학에서 가장 숭고한 불멸의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내게 카라마조프의 비극은 오레스테스⁴⁾의 복수, 호머의 서사시, 괴테 작품의 숭고한 윤곽보다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세계문학의 대다수 작품조차 도스토옙스키에 비교하면 어딘가 단순 평범하며, 인식능력에서도 떨어지고, 미래 지향성이 부족하다. 그런데도 세계문학의 작품들은 우리 마음에 부드럽게 와닿고 친근하며, 무엇보다 감정의 구원을 제시한다. 이에 반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인식만을 날카롭게 전달한다. 그 작품들은 긴장을 풀어주는 역할 때문에 인간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 그 작품들은 빛나는 하늘과 세상, 초원과 들판의 공기, 천상의 별빛이라는 신성한 틀을 지니고 있다. 거기서는 우리의 감정이 소스라쳐 놀랐다가도 어느 순간 기장이 풀리며 자유로워진다. <사실주의와 환상(III)>에서 계속.


[옮긴이 註]

1) 메레슈콥스키(Mikhail Yevgrafovich Merezhkovsky, 1866-1941)는 러시아의 철학자, 시인, 소설가, 비평가, 번역가, 종교 사상가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러시아 문화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로,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를 비롯한 러시아 문학을 연구하였고, 그리스 정교와 기독교, 이슬람교 등 다양한 종교를 연구하였다. 그의 작품은 종교적, 철학적, 문학적 요소가 결합하여 있으며, 러시아 문학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2) 형안(炯眼)-빛나는 눈, 또는 날카로운 눈매. 사물에 대한 뛰어난 관찰력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3) 착종(錯綜)-이것저것이 뒤섞여 엉클어짐. 또는 이것저것을 섞어 모음.

4) 오레스테스(비극)-《오레스테스》(Ὀρέστης, Orestēs)는 에우리피데스가 쓴 고대 그리스 비극 작품이다.

감히 신을 시험하려 한 탄탈로스의 오만이 화근이었다. 그로부터 5대에 걸쳐 그 자손들은 근친상간, 골육상쟁의 비극을 겪는다. 아가멤논은 바로 이 가문에 내려진 저주의 희생자였다. 아가멤논은 딸을 제단에 바치고 트로이 전쟁에 나서면서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원한을 산다. 아가멤논이 승전하여 트로이의 공주이자 사제였던 카산드라를 대동해 그리스로 돌아오자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정부와 공모해 아가멤논을 살해한 클리타임네스트라는 후환이 두려워 아들 오레스테스를 나라 밖으로 추방해 버린다. 오레스테스는 몰래 고국으로 돌아와 누이 엘렉트라와 함께 어머니를 살해한다. 천륜을 저버린 대가는 가혹했다. 오레스테스는 복수의 여신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환상과 광기에 사로잡힌다. 어미를 죽인 죄로 그리스 시민들에게도 신에게도 미움받는 오레스테스 곁엔 언제나 곁을 지켜 준 친구이자 사촌 필라데스와 누이 엘렉트라뿐이다. 세 사람은 모친 살해의 정당성을 주장하지만 아무도 이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심지어 이 끔찍한 복수를 지시한 것은 아폴론 신이었는데도 말이다.

“포이보스 아폴론 신께서는
너무나 불결하고 잔인한 일을
우리 두 사람에게 시키시고는
결국, 우리를 희생자로 삼으셨어요.
우리 손으로 아버지를 살해한 어머니의 피를
흘리게 하셨으니까요.”
— 23쪽, 엘렉트라의 대사 중에서.

에우리피데스는 ≪오레스테스≫에서 신의 뜻이 언제나 옳은 것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인간이 자유의지로 신의 뜻을 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예정된 운명, 불합리하고 가혹한 운명 가운데서도 인간은 스스로 정의를 찾기 위해 고뇌하고, 고통을 감내한다. 이 작품에서 에우리피데스는 아버지를 살해한 어머니를 죽여 정의를 지키고자 한 오레스테스의 고뇌, 복수의 여신에게 쫓기는 한 인간의 고통을 통찰력 있게 그려 냈다. 또한, 오레스테스의 죄를 아레오파고스 법정에서 묻기로 하는 결말을 통해 신들의 뜻이 정의로 통하던 구시대가 저물고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을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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