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는 세계는 감각의 ‘번역본’이다.
인간은 감각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인간은 눈으로 세상을 본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은 빛의 전체가 아니라, 빛의 얇은 조각일 뿐이다. 전자기파의 스펙트럼은 무한히 넓지만, 인간의 시각은 380~750나노미터 범위의 가시광선에만 반응한다. 우주의 거대한 드라마는 자외선, 적외선, 감마선, X선, 전파 등 다양한 파장대에서 펼쳐지지만, 인간은 그중 극히 일부분만을 ‘눈’으로 느낀다. 그래서 우리는 망원경을 만들어 눈을 확장하고, 라디오 전파를 해석해 우주의 언어를 들으려 한다. 하지만 기술의 확장이 곧 감각의 확장일까? 우리가 인공 장비를 통해 관측한 정보는 결국 뇌 속에서 ‘해석된 이미지’로 변환될 뿐이다. 인간의 감각은 끝없이 넓은 자연 앞에서 여전히 작고 제한된 통로에 불과하다.
청각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은 20Hz에서 20,000Hz 사이의 음파만을 들을 수 있다. 그 아래의 저주파는 지진의 전조나 코끼리의 교신에서, 그 위의 초음파는 박쥐의 사냥이나 돌고래의 대화 속에서 사용된다. 이 범위를 벗어난 소리들은 우리에게는 침묵으로 남는다. 우리는 고요하다고 느끼지만, 사실 자연은 끊임없는 진동과 신호로 가득하다. 인간의 청각이 감지하지 못하는 소리의 세계는 ‘무음의 우주’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생명과 에너지의 파동이 충만한 공간이다. 우리의 고요는 세계의 부재가 아니라, 인식의 한계에서 비롯된 착각인 셈이다.
후각과 미각 또한 인간 중심적이다. 개나 곰, 상어처럼 냄새의 분자를 수 킬로미터 밖에서도 구분하는 동물들에 비하면, 인간의 후각은 원시적인 수준이다. 우리가 맛을 느낀다고 할 때, 그것은 실제로 후각이 미각을 보조해 만든 복합적 환각이다. 인간의 미각은 단 5가지의 단맛, 짠맛, 신맛, 쓴맛, 감칠맛으로 분류되지만, 자연의 화학적 조합은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즉, 인간이 ‘맛있다’고 느끼는 세계는 생명 진화가 선택한 극히 좁은 쾌락의 스펙트럼일 뿐이다.
촉각은 우리가 자연과 가장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감각이지만, 이 또한 제한적이다. 손끝은 미세한 진동이나 온도의 변화를 감지하지만, 대기의 압력 변화나 전자기적 장을 직접 느낄 수는 없다. 나비는 다리로 꽃의 당도를 감지하고, 상어는 물속의 전기 신호를 ‘감전’ 없이 탐지한다. 인간은 그런 자연의 미세한 신호를 ‘감각’ 대신 ‘측정기’로 대체해야만 한다. 과학 기술은 바로 이 감각의 결핍을 보완하려는 인간의 집단적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감각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진화의 결과이며, 그 목적은 생존이지 진리 탐구가 아니다. 인간의 뇌는 정보를 압축하고, 생존에 불필요한 신호는 자동으로 걸러낸다. 그 덕분에 우리는 자연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지만, 동시에 자연의 진면목을 잃는다. 칸트가 말했듯,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 틀을 통해서만 본다. 즉, 세계는 존재하지만, 우리가 아는 세계는 감각의 ‘번역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감각의 경계를 넓히려 한다. 허블망원경은 우리 눈을 대신해 수십억 광년 너머의 빛을 모으고, 제임스 웹 망원경은 적외선 영역에서 별의 탄생을 포착한다. LIGO 관측소는 빛조차 없는 ‘중력파’를 감지하며, 인간이 듣지 못하는 우주의 파동을 새로운 청각의 차원으로 번역한다. 우리는 기술을 통해 감각의 외연을 확장하지만, 여전히 그 경험은 ‘기계의 눈으로 본 인간의 상상’이다. 우주의 실체는 장비의 데이터가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인간의 언어 속에서 재탄생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한계가 곧 인간의 창조성의 원천이라는 사실이다. 감각이 완전하다면, 우리는 상상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시각이 모든 파장을 볼 수 있었다면, ‘은하수의 신비’도 ‘별의 침묵’도 시적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의 감각은 결핍되어 있지만, 그 결핍이 사유와 예술, 과학을 낳았다. 과학은 그 결핍을 측정하려는 시도이고, 예술은 그 결핍을 느끼려는 언어다.
결국 자연과 우주는 인간이 ‘느낄 수 없는 것들’의 총합이다. 우리는 그 거대한 미지의 세계를 부분적으로만 포착하며, 그 단편으로 전체를 추론한다. 인간은 어쩌면 맹인의 손끝으로 코끼리를 더듬는 존재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손끝의 감각이 쌓여 문명이 되고, 그 문명이 다시 우주의 기원을 묻는다. 감각의 한계는 인간의 약점이 아니라, 탐구의 출발점이다. 우리가 자연과 우주를 완전히 느낄 수 없는 이유—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끝없이 그것을 ‘알고자’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중력의 숨결을 듣는 귀, LIGO
우주는 침묵의 공간이라 여겨져 왔다. 빛으로 가득한 별들의 세계조차, 실제로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인간이 우주의 비밀을 알아온 방식은 오직 빛이었다. 하지만 2015년 9월 14일, 인류는 처음으로 “진동하는 시공간”의 파동을 들었다. 그것이 바로 LIGO, 즉 ‘레이저 간섭계 중력파 관측소(Laser Interferometer Gravitational-Wave Observatory)’가 포착한 중력파였다. 이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1916년 일반상대성이론에서 예측한 현상으로, 100년 동안 이론 속에만 존재하던 중력의 물결이 드디어 현실의 신호로 감지된 순간이었다.
LIGO는 미국 워싱턴 주 해널과 루이지애나 주 리빙스턴 두 곳에 세워진 거대한 실험장치다. 각각의 관측소에는 4km 길이의 두 팔이 직각으로 뻗어 있다. 중앙에서 쏜 강력한 레이저 빛은 두 갈래로 나뉘어 팔 끝의 거울에 반사되고, 다시 만나 간섭무늬를 만든다. 이 무늬의 미세한 변화가 곧 중력파의 흔적이다. 중력파가 지나갈 때 시공간은 실처럼 미세하게 늘어나고 줄어든다. 그 차이는 원자핵 크기의 1만 분의 1에도 못 미치지만, LIGO는 이 극도로 작은 진동을 감지할 수 있을 만큼 정밀하다. 거대한 지진의 울림, 트럭의 진동, 심지어 바람소리조차 차단하기 위해 장치는 완벽한 진공 속에, 지하 깊이 고립되어 작동한다.
그날 LIGO가 포착한 신호는 13억 광년 떨어진 곳에서 일어났다. 두 개의 블랙홀이 서로를 돌다 결국 충돌하며 하나로 합쳐질 때, 시공간이 거대한 파동처럼 출렁였다. 이 파동이 수십억 년을 건너 지구의 레이저 간섭계를 흔든 것이다. 연구진은 이 신호가 지상의 잡음이 아님을 확인하기 위해 두 관측소의 데이터를 비교했고, 동시에 같은 패턴이 나타나자 인류는 처음으로 우주가 내는 “중력의 울림”을 들었다. 이 업적으로 킵 손, 라인하르트 바이스, 배리 배리시 세 과학자는 2017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LIGO의 발견은 단순히 새로운 실험의 성공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류가 우주를 감각하는 방식 자체를 바꾼 사건이었다. 우리는 이제 빛이 닿지 않는 곳, 즉 블랙홀이나 중성자별 같은 암흑의 천체에서도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눈으로 보지 않고도 귀로 듣는, 이른바 ‘중력파 천문학’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오늘날 LIGO는 이탈리아의 VIRGO, 일본의 KAGRA, 그리고 건설 중인 LIGO-India와 함께 국제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다. 여러 관측소가 동시에 작동하면, 중력파의 방향과 근원을 삼각측량으로 정확히 계산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지구 곳곳의 귀가 서로 협력해 우주의 진동을 입체적으로 듣는 것과 같다.
LIGO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인식 한계를 넓힌 실험이다. 눈이 아닌 파동으로 우주를 본다는 것은, 시공간 그 자체가 하나의 언어가 된다는 뜻이다. 어쩌면 인류는 이제 막 우주의 속삭임을 알아듣기 시작했을 뿐이다. LIGO의 거울에 부딪힌 미세한 빛의 떨림 속에서, 우리는 시공간이 살아 숨 쉬는 거대한 리듬을 듣고 있다. 그것은 중력의 노래이며, 우주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최초의 음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