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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라 콜론타이

러시아 혁명의 붉은 장미

by 김양훈
류한수 교수님의 <러시아 혁명사> 특강 中, 내 마음에 꽂힌 인물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러시아 혁명의 붉은 장미'로 불렸던, 우크라이나 귀족 가문 혈통을 가진 알렉산드라 콜론타이(Alexandra Kollontai, 1872–1952)는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성해방을 사회변혁의 핵심 과제로 끌어올린 인물이었다. 그녀의 사상은 단순한 성평등의 주장에 머물지 않고, 자본주의 체제와 가부장제의 결합 구조를 비판하며 여성문제를 계급문제의 일부로 통합한 최초의 시도로 평가된다. 콜론타이는 여성의 억압을 남녀 간의 단순한 힘의 불균형이 아니라, 사유재산의 출현과 함께 고착된 사회경제적 종속 구조로 이해했다. 즉, 여성은 사유재산의 보존을 위해 가족이라는 제도 안에 가두어진 존재였으며, 자본주의는 그 가정제도를 통해 여성을 무급노동자로, 남성의 부속물로 유지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에게 여성해방은 사회주의 혁명과 분리될 수 없는 과제였다. 여성의 진정한 자유는 단지 법적 권리나 직업 참여로 얻어지지 않는다. 가사와 육아를 여성 개인의 사적 의무로 남겨두는 한, 여성은 경제적으로 종속될 수밖에 없다. 콜론타이는 이러한 악순환을 깨기 위해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주장했다. 공공식당, 공동세탁소, 탁아소 등을 통해 가정의 기능을 사회가 나누어 맡아야 하며, 출산과 양육은 국가의 책임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의 구상은 당시 볼셰비키 정부가 실제로 시행한 일부 정책—여성노동자 보호, 산전 후 휴가, 공동탁아소 설립—로 이어지며, 혁명 후 짧은 기간 동안 현실의 실험으로 시도되기도 했다.

콜론타이의 사상의 독특함은 여성해방을 경제의 문제뿐 아니라 감정과 사랑의 문제로 확장시켰다는 데 있다. 그녀는 결혼과 사랑이 경제적 이해나 사회적 의무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자유로운 사랑은 인간이 서로를 소유하지 않고, 동등한 인격으로 존중하는 관계에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이러한 사유는 당시의 도덕관념을 뒤흔드는 급진적 선언이었다. 그녀가 말한 ‘붉은 사랑’은 의존과 희생의 낡은 연애관을 넘어, 혁명 이후의 새로운 인간관계 모델을 예고한 것이다.

그러나 콜론타이의 이상은 역사적 현실 속에서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스탈린 체제가 들어서자, 국가의 가족정책은 보수화되었고, 콜론타이가 그토록 부정했던 전통적 가족 이데올로기가 부활했다. 그녀가 이끌었던 여성국(Zhenotdel)도 폐지되었다. 사회주의 체제는 경제적 평등을 어느 정도 달성했으나, 성의 자유와 개인의 자율성이라는 그녀의 이상은 체제의 권위주의적 통제 속에 묻혀버렸다.

그럼에도 콜론타이의 사상은 역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그녀는 마르크스주의를 인간의 생활세계와 감정 차원으로 확장시켰으며, 여성해방을 단지 ‘노동의 참여’로 축소하지 않았다. 인간 해방의 완성은 사회적 구조의 변혁뿐 아니라, 사랑·가족·모성의 관계까지 새롭게 조직하는 일임을 강조한 것이다. 오늘날 사회주의 페미니즘이나 돌봄 노동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모두 그녀의 사상적 유산 위에 서 있다.

결국 콜론타이는 혁명의 정치와 인간의 감정을 동시에 사유한 드문 사상가였다. 그녀의 여성해방론은 당시 러시아 혁명의 한계 속에서도 ‘평등한 사랑, 사회적 모성, 집단적 돌봄’이라는 미래적 비전을 제시하며, 오늘날까지도 여성과 사회의 관계를 다시 묻는 역사적 인물로 남아 있다.


[자유연애 운동] 볼셰비키 혁명 이후 레닌과 뜻을 함께 했던 콜론타이는 성도덕에 관해 레닌과 당과 마찰을 빚었다. 콜론타이는 혼인 서약도 없이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동거하기도 했고, <삼대의 사랑>과 <붉은 사랑>과 같이 새로운 소비에트 사회의 성도덕과 가족 문제를 다루었던 소설들로 인해 당의 비판을 받아야 했다.

레닌은 연애 역시 이데올로기로서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성에 입각해야 하고 그렇지 않은 자유연애는 퇴폐적이라고 규정짓는다. 그러나 그는 기존의 가부장제 하에 한 사람의 가장이 여러 첩을 거느리는 것과 남성의 축첩, 불륜 등에 대해서만 호의적이고 여성의 자유연애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점을 지적하며 봉건시대와 다른 점이 무엇이냐며 항변하였다.

그의 견해는 조선에도 전파되어 허정숙, 정칠성, 정종명, 주세죽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조선에 콜론타이의 사상을 소개하며 자유연애, 자유 결혼, 거래와 계급적 차별이 없는 자유로운 남성 관계론을 주장하였다.

[조선의 콜론타이 허정숙] 콜론타이의 자유 연애론은 1920년대 조선에도 소개되었다. 일본의 페미니스트들의 자유 연애론에 공감하던 조선의 페미니스트들은 그의 자유 연애론을 적극 수용하였다. 김일엽과 나혜석은 미국과 일본, 프랑스의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의 견해를 받아들인 반면, 공산주의 성향의 페미니스트였던 허정숙은 콜론타이의 이론을 적극 받아들여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조선의 페미니스트 허정숙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여성 해방 사상을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미국, 일본, 프랑스 등으로부터 받아들인 자유주의 페미니즘과는 또 다른 형태의 공산주의와 결합한 형태의 페미니즘 사상이었다.

허정숙은 "연애는 사사다."라는 콜론타이의 구호를 실제의 삶에서 구현한 지식인 여성이었다. 동아일보의 여기자이자 여성동우회와 근우회, 청총간부로 맹렬히 활동했던 허정숙은 남편 임원근이 옥에 갇혔을 때 냉정하게 이혼장을 가지고 찾아갔으며, 나이 30세 이전에 애인을 세 번 가졌고, 애인과 사귈 때마다 아이를 낳았다는 개인사를 빌미로 대중매체의 가십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콜론타이의 사랑론을 설파하였으며, 그 외에도 여러 남성과 자유롭게 사귀었다.

콜론타이만큼의 확고한 계급적, 젠더적 자각 속에서 자신의 사생활을 영위하였다고 하더라도, 조선에서 급진적인 콜론타이 연애론의 실행은 격렬한 반발과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콜론타이의 소설 <삼대의 사랑>에서 재현된 여성의 자유분방한 성의식과 가족의 부적은 유교적 습속이 강고하게 유지되던 20세기 초 조선에서는 뿌리내릴 수 없는 공상적 가설에 가까웠다. 그러나 허정숙은 자유연애를 감행하였고, 오히려 유교가 종교적, 도덕적인 핑계로 여성의 성과 자유를 억압 통제한다며 오히려 유교 사상과 가부장제의 비인간성을 지적, 질타하였다.

1920년대 중반부터 1930년대 일제강점기 조선 사회에는 콜론타이의 연애관을 두고 찬성과 반대의 양론이 격렬히 대립하기도 했다. 허정숙 등의 콜론타이식 연애론에 대한 옹호에 대해 김억 등 남성 지식인들의 반대도 거셌다.

시인 김억은 『연애의 길을 읽고서-콜론타이 여사의 작』(삼천리, 1932. 2. 1)이라는 글에서 콜론타이 연애론에 대한 품평을 남긴다. 그는 콜론타이의 <삼대의 사랑>에서 제1세대에서 제3세대까지 시대가 변해가면서 사랑의 형태가 달라지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때그때 성욕의 충동만 있으면 관계해도 좋다는 주장은 수긍할 수 없으며, 도대체 콜론타이가 말하는 '새 감정과 새 관념과 새 도덕으로의 새 사람'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토로한다. 김억이 말한 것처럼 대다수의 조선인들에게 콜론타이즘은 '인생을 동동물화시킨 것에 지나지 아니하는' 불경한 서사였다.

그러나 조선인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유교 성리학적 가치관이 가부장제를 정당화하여 가부장이 다른 가족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남편이 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정당하게 여긴 것을 지적하며 김억의 주장에 맹공격을 퍼붓기도 했다. 자유연애 문제는 1937년 신사 참배 문제가 이슈가 되기 전까지 조선 사회의 큰 화두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콜론타이의 사상을 조선에 소개한 허정숙은 '조선의 콜론타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성욕 자유론] 콜론타이는 성욕은 당연한 것이며 꺼리거나 숨길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콜론타이는 성욕이 배고픔이나 목마름처럼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본능이며 성욕의 충족은 물 한 잔을 얻는 것처럼 간단해야 한다는 말을 남겼는데, 레닌은 이를 '물 한잔 이론'이라 희화화하며 비판했다. 그러나 콜론타이는 인간에게는 누구나 성욕이 있으며 그것을 없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성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자 반역이라고 보았다.

그는 성욕도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보았다. 콜론타이는 사랑의 감정에서 출발하는 성적인 관계를 '날개 달린 에로스'라고 명명하며 찬미했지만, 자유로운 성에 대한 이슈는 공산주의 혁명을 함께 도모한 볼셰비키당 내부에서도 끝내 승인하지 않았다.


[성욕 존중론] 콜론타이는 성욕 역시 존중받아야 할 하나의 권리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성욕을 부정하는 것을 위선으로 간주하였다. 그녀는 <혼인관계 영역의 공산주의 도덕에 관한 테제>에서 "성욕은 배고픔이나 목마름처럼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 문장은 "성욕의 충족은 한 잔의 물을 얻는 것처럼 간단해야 한다."라고 왜곡돼 퍼져나갔다. 그래서 콜론타이의 에로스 이론은 '물 한 잔 이론'이라고 불렸다. 레닌 역시 이 '물 한 잔 이론'을 격렬히 비판했다. 혁명 초기의 젊은이들에게 콜론타이의 '자유결합'론이 널리 퍼지고 있는 것을 레닌은 위험스럽게 여겼다.

그는 성욕에 대한 지나친 부정과 통제는 가부장제, 남성에 의한 여성 지배, 통제, 억압의 수단이라며 여성의 성욕도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는 성욕이 없는 어머니, 순결한 여인상이야 말로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행하고 강요해 온 최대의 정신적 폭력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는 여자들에게 순결을 강요하면서도 남자들은 여러 여자들을 희롱하고 성관계 갖기를 좋아하는 것이 그 증거라고 지적하였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발걸음을 맞춰 성적 관계와 혼인 영역에서 하나의 혁명이 시작되고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 또 젊은이들에게 금욕적 자기부정을 설교하는 것이 귀족적, 부르주아적 위선이라는 점도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레닌은 성생활의 방종이 프롤레타리아에게 어울리지 않는 퇴폐적 악습이라고 비판했다. '물 한 잔 이론'은 비마르크스 주의적일 뿐만 아니라 반사회적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정상적인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시궁창에 드러누워서 흙탕물을 마시려고 하겠습니까? 또는 많은 사람들의 입술로 가장자리가 더럽혀진 유리잔으로 물을 마시겠습니까?"라고 비판했다. 콜론타이는 오히려 일부일처제라던가 남성 중심의 성 관념, 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금기와 기피야 말로 남성의, 남성 위주의 성 정책이라며 반발하였다. 콜론타이는 성욕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이며, 추하고 지저분한 것이 아니라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하나의 권리이자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현상의 하나라고 반박했다.


[낭만적 연애에 대한 비판] 바실리사는 볼료다가 '니나'라는 다른 여성과 사랑에 빠졌을 때 질투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의연하게 공동체를 위한 사회적 임무에 매진하는 여성으로 그려진다. 콜론타이는 친밀감에 바탕을 둔 남녀 간의 낭만적 사랑에 반기를 들었는데, 특히 연애나 결혼에서 발생하는 성적 위기가 원천적으로 여성의 사랑이 지니는 의존적인 성격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이때 여성이 심리적으로 사랑에 의존하는 상황은 경제적 의존과 맞물리기 때문이라 지적한다. 남편의 외도나 실연은 여성에게 경제적인 손실이나 실직과 마찬가지 상황이기에, 남편의 배신은 더 큰 절망과 질투와 증오심을 낳게 되는 것이다. 즉 낭만주의 사랑이나 연애지상주의는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금전 문제 때문에 여자가 의존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일부 일처제 비판] 콜론타이는 일부다처제는 여성의 권리를 침해하는 극악한 형태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콜론타이는 일부일처제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하였다.

콜론타이는 일부일처제를 지향하는 부르주아적 연애관을 정면 부정했다. 공산주의와 가족에서 그녀는 이제 공산주의 사회에서 가족경제가 국가경제에도 이익을 주지 않으므로 낡은 부부관계, 남녀관계는 해체되어야 하고 그 대신에 새로운 남녀관계가 등장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사유재산을 폐지하기 위해 부르주아 계급의 핵가족이 해체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스탈린 체제 이전 볼셰비키들의 기본적인 사고였지만, 콜론타이는 여기에 새로운 여성, 즉 가족의 보호로부터 자유로우며 결혼에 얽매이지 않고 노동력의 일부이자 소비에트의 구성원으로 일할 수 있는 여성의 목소리를 강조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러한 가족제도가 향후 백 년쯤 경과되면 공산주의국가가 아니더라도 자본주의 국가나 왕정, 군주정이 유지되는 다른 국가로도 전이될 것이라고도 내다봤다.

콜론타이는 계급의 틀 안에서 사랑과 결혼의 문제를 고민한 공산주의사상가였을 뿐 아니라, 철저하게 여성의 관점에서 성적 도덕과 연애, 결혼의 플롯을 재구성한 페미니스트 운동가였다.


[성 담론] 연애에서 성을 분리하는 성의식이나 연애에서 결혼을 분리하는 가족 해체론 등 콜론타이의 연애론은 당시 사회에서 큰 논란을 야기했다. 엘렌 케이와 하쿠손의 사랑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연애에서의 성행위를 정당화하는 도덕적 근거를 제시했다면, 콜론타이의 연애론은 인간의 성적 본능 자체를 아예 연애와 분리하여 독자적으로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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