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브게니 자먀틴

그의 불멸의 저작 《우리(We)》를 중심으로

by 김양훈
예브게니 자먀틴(Yevgeny Zamyatin)의 불멸의 저작 《우리(We)》를 중심으로 디스토피아 문학의 기원과 그가 현대 문학사에 남긴 족적을 살펴보다.
​유리 성벽 안에 갇힌 번호들:
자먀틴이 예견한 엔트로피의 비극

​20세기 문학사에서 예브게니 자먀틴이라는 이름은 하나의 거대한 ‘기원’이자 ‘경고’로 존재한다. 흔히 디스토피아 소설의 대명사로 조지 오웰의 《1984》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꼽지만, 이 거장들이 서 있던 토양은 다름 아닌 자먀틴이 건설한 유리 도시 ‘단일 제국’이었다. 자먀틴은 조선 공학자라는 자신의 이성적 배경과 혁명가라는 뜨거운 심장을 결합하여,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정교하고도 차가운 지옥도를 그려냈다.

1. 수학적 정체성과 개성의 소멸

​자먀틴의 소설 《우리》는 주인공 ‘D-503’의 일기 형식을 취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인간의 이름이 사라지고 ‘번호’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자먀틴이 바라본 미래 사회의 핵심, 즉 수학적 완결성을 의미한다.

​단일 제국에서 인간은 더 이상 고유한 서사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거대한 국가 기계의 부품으로 전락한다. 모든 시민은 투명한 유리 집에서 살며 사생활을 박탈당하고, ‘시간표’에 따라 동시에 일어나고 동시에 숟가락을 든다. 자먀틴은 공학자 특유의 시선으로, 효율성이 극대화된 사회가 어떻게 인간의 영혼을 질식시키는지를 기하학적 문체로 폭로한다. 그에게 있어 완벽한 질서란 곧 죽음과 다름없는 정지 상태였다.

2. 혁명의 엔트로피와 에너지의 대립

​자먀틴의 사상적 핵심은 ‘에너지와 엔트로피의 대립’에 있다. 그는 물리학 법칙을 사회 현상에 대입했다.

*​엔트로피: 질서, 안주, 도그마, 그리고 결국에는 냉각되어 멈춰버리는 죽음을 의미한다.

*​에너지: 혼돈, 파괴, 비판, 그리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생명력을 의미한다.

​그는 사회주의 혁명이 승리한 후 고착화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혁명이 ‘제도’가 되는 순간 그것은 엔트로피 상태에 빠진다고 경고했다. “마지막 혁명이란 없다. 혁명은 무한하다”는 그의 선언은, 당시 집권 세력에게는 가장 위험한 이단적 발언이었다. 자먀틴에게 있어 살아있는 문학이란 기성 권력의 안락함을 깨뜨리는 ‘이단’의 목소리여야만 했다.

3. 상상력이라는 질병

​소설 속에서 단일 제국은 인간의 ‘상상력’을 제거해야 할 종양이나 질병으로 규정한다. 주인공 D-503이 사랑을 느끼고 자아를 자각하는 과정은 현대 의학적 관점에서는 성장이지만, 제국의 관점에서는 시스템의 오류일 뿐이다. 결국 제국은 시민들의 뇌에서 상상력을 담당하는 부위를 절제하는 수술을 시행한다.

​이는 자먀틴이 예견한 가장 끔찍한 미래상이다. 비판적 사고와 상상력을 잃은 인간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지만, 동시에 인간이기를 포기한 존재가 된다. 자먀틴은 이 비극적인 결말을 통해, 체제가 강요하는 행복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독자들에게 질문한다.

오늘날 우리 곁의 자먀틴

​자먀틴은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에게 필적하는 권리는 집필하지 않을 권리가 아니라, 말하지 않을 권리뿐이다"라고 일갈하며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파리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지만, 그가 뿌린 씨앗은 오웰의 '빅 브라더'로, 헉슬리의 '촉각 영화'로 계승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자먀틴이 경고한 '유리 도시'와는 또 다른 형태의 데이터 감시 사회를 살고 있다. 알고리즘이 우리의 취향을 결정하고, 효율성이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되는 현대 사회에서 자먀틴의 외침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번호’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불온한 ‘상상력’을 가진 인간으로 남을 것인가. 자먀틴은 지금도 우리에게 마지막 혁명을 멈추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