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안드레이 벨리
깊은 생각
안드레이 벨리
눈보라가 먼지를 일으킨다, 그리고 운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적자색(赤紫色)의 노을이 피어난다
너는 떠나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안개는 누워 있었다
냉엄한 남빛으로 누워 있었다
태초부터 우리는 혼자였다.
우리는 주위로부터 외면당한 채
우리는 하나뿐인
우리는 멀리 있는
친구, 멀고 먼
그리고 고독
너의 길
우리는 결코 서로에게 돌아오지 않으리!
-Portrait of Andrei Bely 1928 by Sokolov
[詩評]
러시아 상징주의의 거장 안드레이 벨리(Andrei Bely)의 시 <깊은 생각>은 차가운 북방의 이미지와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고독을 결합하여, ‘관계의 불가능성’을 노래한 수작이다. 이 시는 단순한 이별의 슬픔을 넘어, 우주의 황량함 속에서 각자 고립된 인간 실존의 비극을 다루고 있다.
1. 감각의 전이: 차가움과 뜨거움의 충돌
시의 전반부는 시각과 청각, 그리고 촉각이 뒤섞인 강렬한 이미지로 시작한다.
*눈보라와 먼지: 눈보라는 대상을 가리고 소외시키는 자연의 장막이다. 눈보라가 ‘먼지를 일으킨다’는 표현은 생명력이 거세된 건조한 황폐함을 드러낸다.
*적자색(赤紫色)의 노을: ‘운다’와 ‘눈물’로 대변되는 화자의 슬픔은 하늘에 번지는 적자색 노을로 형상화되고 있다. 이는 차가운 눈보라(청색/백색)와 대비되는 뜨거운 핏빛의 색채로, 내면의 고통이 외부 세계로 투사되어 온 우주가 함께 비명을 지르는 듯한 효과를 준다.
*냉엄한 남빛의 안개: 노을이 지고 난 뒤 찾아온 ‘남빛 안개’는 감정의 과잉을 식히는 동시에, 화자와 ‘너’ 사이를 가로막는 넘을 수 없는 벽이 된다. 안개가 ‘누워 있다’는 의인화는 정적인 죽음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2. 존재론적 고립: "태초부터 우리는 혼자였다"
이 시의 가장 충격적이면서도 핵심적인 선언은 후반부의 첫 구절인 “태초부터 우리는 혼자였다”에 있다. 이는 이별이 단순히 어떤 사건 때문에 일어난 우발적 결과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가 설계될 때부터 부여된 숙명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주위로부터의 외면: 시적 화자는 자신들을 주변 세계로부터 철저히 고립된 존재로 규정한다.
*하나뿐인, 그리고 멀리 있는: 벨리는 ‘우리’라는 대명사를 사용하면서도, 그 내부의 구성원들이 결코 섞일 수 없는 평행선임을 강조한다. ‘친구’라는 단어조차 ‘멀고 먼’이라는 수식어와 결합하여 유대감이 아닌 거리감을 증폭시키는 역설을 보여주고 있다.
3. 돌아올 수 없는 길: 허무주의의 완성
마지막 구절 “우리는 결코 서로에게 돌아오지 않으리!”는 비극적 결말의 확신이다.
러시아 상징주의 문학에서 ‘길’은 종종 영적인 여정이나 구원을 상징하지만, 벨리의 이 시에서 ‘너의 길’은 나에게서 영원히 멀어지는 한 방향의 소멸을 의미한다. 안개가 깔린 차가운 대지 위에서 각자의 길을 걷는 두 존재는 이제 서로에게 타자가 아닌, 우주의 파편으로 남게 된다.
이러한 단절의 미학은 20세기 초 불안정한 러시아의 시대적 분위기와 지식인들의 고독한 내면을 반영하고 있다. 벨리는 슬픔을 위로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고독을 ‘냉엄한 남빛’으로 응시함으로써, 인간이 마주해야 할 진실이 무엇인지를 차갑게 웅변한다.
총평
안드레이 벨리의 <깊은 생각>은 서정적 감수성과 형이상학적 통찰이 결합된 작품이다. 눈보라와 노을, 안개로 이어지는 자연 배경은 인간의 내면 풍경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하다.
우리는 흔히 사랑과 인간관계를 통해 고독을 극복하려 하지만, 벨리는 고독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유일한 방법임을 일깨운다. "결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절망적인 선언은 역설적으로 그 고독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비로소 인간이 자신의 운명과 대면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안드레이 벨리(Андрей Белый, 1880-1934년)는 러시아의 상징주의 시인이자 소설가, 문학 비평가이다. 본명은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부가예프(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Буга́ев)이다.
그는 수학 교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연과학에 관심을 갖고 모스크바 대학교 물리-수학학부에 입학하였고, 이때 다윈을 비롯하여 여러 철학자의 사상을 접하게 된다. 종교 철학가인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와 교제하면서 그의 가족들과 친하게 지내는데, 필명인 '안드레이 벨리'는 블라디미르의 동생 미하일 솔로비요프가 지어준 이름이다. 상징주의자로서 벨리의 사상은 복잡한 발전 과정을 겪는다. 초기에는 솔로비요프의 철학과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사상, 리케르트의 신칸트주의 이론에 매료되었다가, 후기에는 루돌프 슈타이너와 같은 신비주의 철학자의 인지학 이론을 주창하게 된다.
작가로서 창작 활동을 시작한 벨리는 1904년 첫 번째 시집 《쪽빛 황금》(Золото в лазурь)을 출간한다. 두 번째 시집 《재》(Пепель, 1908)는 네크라소프를 기념하는 것이고, 《유골 항아리》(Урна, 1909)는 마지막 시집이다. 이와 함께 벨리는 소설 작가로서 《심포니야》(Симфония) 4부작(《영웅》(1903), 《드라마》(1902), 《귀환》(1904), 《눈보라의 잔》(1908)을 비롯하여 《은빛 비둘기》(Серебряный голубь, 1909), 《코틱 레타예프》(Котик Летаев, 1922) 등 산문소설을 창작하였고, 1911년에 집필을 시작한 《페테르부르크》(Петербург)는 1916년 단행본으로 출판한다. 이 밖에도 《녹색 초원》(Луг Зеленый, 1910)과 《상징주의》(Символизм, 1910), 《아라베스크》(Арабески, 1911) 등 상징주의 철학과 문학 이론에 대한 많은 논문을 저술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벨리는 세 편의 회상록을 저술하는데, 이들은 당대를 풍미했던 상징주의 문학은 물론, 격동기 러시아 사회의 역사적 문화적 흐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회상록은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까지 집필되었고, 《두 세기의 분수령에서》(На рубеже двух столеций, 1930), 《세기의 시작》(Начало века, 1933), 《두 혁명 사이에서》(Между двух революций, 1935)가 출간되었다.
소설 <페테르부르크>
〈페테르부르크〉는 조이스의 《율리시스》, 카프카의 《변신》과 더불어 20세기 모더니즘 산문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특히 은유와 환유, 반복과 전위, 라이트모티프 등 독특한 스타일로 모더니즘 계열 작품들 중에서도 실험성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난해한 상징으로 가득 찬 이 소설에는 니체와 베르그송 같은 20세기 초 철학자들의 사상에 투영된 러시아 상징주의 특유의 역사적, 철학적 사색이 담겨 있다. -위키백과
1910 - Matvei Dobrov - Isadora Duncan. Scythian Dance.
Andrei Bely watched Isadora Duncan's performance in January, 1905 in St. Petersburg during her first tour of Russia. His impressions, combined with impressions after the First Russian Revolution, were reflected in the article 'The Green Meadow' (1905).
영혼의 리듬:
안드레이 벨리가 본 이사도라 던컨
20세기 초, 혁명의 기운이 감돌던 러시아의 밤하늘 아래에서 문학과 무용이라는 서로 다른 두 예술이 찬란하게 교차했다. 그 중심에는 러시아 상징주의의 기수 안드레이 벨리와 현대 무용의 어머니 이사도라 던컨이 있었다.
벨리에게 예술이란 단순히 보고 즐기는 대상이 아니라,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고 인간의 영혼을 높은 차원으로 이끄는 종교적 수행과 같았다. 그런 그에게 1904년 러시아를 찾아온 던컨의 무대는 단순한 공연 그 이상의 사건이었다. 코르셋을 벗어던지고 맨발로 무대에 선 그녀는, 벨리가 그토록 갈망하던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적 자유'를 온몸으로 구현해내고 있었다.
벨리는 그녀의 춤을 보며 "몸으로 쓰는 시"를 목격했다. 그는 던컨의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부활하는 생명력을 보았고, 그것이 곧 상징주의가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해방임을 깨달았다. 벨리에게 던컨은 한 명의 무용수이기 이전에, 굳어버린 육체에 영적인 숨결을 불어넣는 뮤즈이자 동지였다.
두 예술가의 만남은 짧았으나 그 잔향은 깊었다. 벨리는 비평을 통해 던컨의 예술에 철학적 무게를 더했고, 던컨은 벨리의 관념적인 세계에 생생한 리듬을 부여했다. 비록 이들의 길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예술과 삶은 하나여야 한다'는 그들의 뜨거운 신념은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렬한 영감의 불꽃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