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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기억이

by 안나 아흐마토바(Anna Akhmatova)

by 김양훈


태양의 기억이 흐려져 간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시들은 ‘개인적’이다. 그녀의 짧은 서정시를 이루는 언어들은 일기와 시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시에서 ‘진정성’이라는 표현은 비평적 용도로 보면 별다른 가치가 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시와 삶의 직접성을 뜻하는 것이라면 ‘아흐마토바의 시적 진정성’이라는 표현은 정당하게 조명받아야 한다.

그녀의 생애가 감당해 온 불우의 풍경들이 불현듯 시 속으로 이입되고, 그 개인화된 풍경들이 시적 파토스의 근간을 이룬다. 때로 그 풍경들은, 이건 너무 사적(私的)이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일으킬 정도다.


태양의 기억이

안나 아흐마토바

태양의 기억이 가슴 속에 흐려져간다.

풀은 바래지고

간신히

이른 눈발이 바람에 날린다.


좁은 운하는 벌써 흐르지 않고

얼어붙은 물,

이곳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

아, 아무 일도.


버드나무는 텅 빈 하늘에 가지를 펼쳐

투명한 부채를 이루고

아마도 내가

당신의 아내가 되지 않은 것은 잘된 일.


태양의 기억이 가슴 속에 흐려져 간다.

이건 무엇? 어둠?

아마도! ……하룻밤 사이에도

겨울은 올 수 있다.


태양은 흐려지고, 풀은 바래지고, 눈발은 날리며, 운하의 물은 얼어붙는다. 겨울은 이미 그녀 앞에 있다. 2연의 3, 4행에 나오는 감탄문을 제외한다면, 3연 둘째 행까지 이어지는 것은 다가오는 겨울 풍경의 묘사다. 운하와 버드나무가 있는 이 풍경들은 그녀의 고향 차르스코예셀로와 생애의 대부분을 보낸 도시 페테르부르크를 직접적으로 환기한다. 여기까지는 정교한 시적 리듬에 얹힌 ‘풍경의 시’처럼 읽힌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3연의 세 번째와 네 번째 행이다. 아마도 내가 당신의 아내가 되지 않은 것은 잘된 일, 이라니. 이 ‘사적인’ 진술은 갑작스럽다. 4연이 1연의 반복으로 이루어지는 종결부라면, 이 모든 풍경들은 3연에서 갑자기 나타난 저 사적인 회고조의 진술을 중심으로 모여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사적인 회고조의 문장은 시적이라기보다는 일상적이며, 무엇보다도 산문적인 느낌을 준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문장 앞뒤의 플롯, 즉 ‘이야기/서사’의 전후 맥락을 스스로 재구성하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이야기’란 것은 그 시절 아흐마토바의 실제 생애와 겹쳐지면서 사적인 뉘앙스를 강화한다.

이 구절에 의해서, 시의 수신자는 개인사적인 맥락에서 ‘그녀’의 남자가 되고, 우리는 이제 서정적 시인의 서정적 풍경 묘사가 아니라 어쩌면 남편일 수도 있었을 남자에게 건네는 ‘사적인 대화’ 속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상하다. 이것은 마치 보편적인 불특정 다수의 독자를 염두에 두지 않고 쓰인 시 같다.

- 이장욱 著 「혁명과 모더니즘: 러시아의 시와 미학」(사랑의 환유: 아흐마토바의 아크메이즘) 中.


[詩評]

기억의 소멸과 겨울의 단념:
안나 아흐마토바의〈태양의 기억이〉에 대하여

안나 아흐마토바(Anna Akhmatova)의 시 세계에서 ‘계절의 흐름’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풍경이 절멸하거나 재구성되는 실존적 모습이다. 그의 초기 시편인 〈태양의 기억이〉는 은유의 화려함보다는 아크메이즘(Acmeism) 특유의 명료한 사물성과 절제된 언어를 통해, 사랑의 상실과 그로 인한 내면의 고립을 냉철하게 그려낸다. 이 시는 온기가 사라진 자리에 들어서는 ‘겨울’이라는 정서를 통해, 비극을 대하는 인간의 초연한 자세와 그 이면에 숨겨진 실존적 고독을 탐구한다.

1. 상실의 감각화: 빛에서 어둠으로

시의 도입부에서 화자는 “태양의 기억이 가슴 속에 흐려져간다”고 선언한다. 여기서 태양은 과거의 열정, 생명력, 혹은 사랑했던 대상과의 뜨거웠던 시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기억은 이제 현존하는 빛이 아니라 소멸해가는 ‘잔상’에 불과하다.

이어지는 묘사들은 철저하게 하강과 정지의 이미지를 구축한다. 바래지는 풀, 날리는 이른 눈발, 그리고 흐름을 멈춘 좁은 운하는 생동하던 감정들이 물리적 동결 상태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특히 “이곳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 / 아, 아무 일도”라는 대목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거세된 절망의 정점을 찍는다. 어떠한 사건도 일어날 수 없다는 확신은 곧 삶의 정지이며, 얼어붙은 감정의 상태를 의미한다.

2. 역설적 단념: “아내되지 않은 것은 잘된 일”

3연은 이 시에서 가장 심리적인 파동이 큰 부분이다. 화자는 텅 빈 하늘에 가지를 펼친 버드나무를 바라보며 돌연 “아마도 내가 / 당신의 아내가 되지 않은 것은 잘된 일”이라고 읊조린다. 이 문장은 이 시의 정서적 핵심이다.

표면적으로는 인연의 어긋남을 다행으로 여기는 안도처럼 보이지만, 그 기저에는 지독한 역설이 깔려 있다. '아내가 됨'이라는 결합이 불가능해진 현실 앞에서, 화자는 그 상실의 고통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다. 버드나무가 투명한 부채처럼 뼈대만 남은 채 추위를 견디듯, 화자 역시 관계의 외피를 벗어던지고 고독한 단독자로서의 운명을 수용하는 것이다. 이는 비극을 승화시키는 아흐마토바식의 ‘우아한 체념’이며,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는 단단한 자아의 목소리다.

3. 겨울의 기습과 실존적 고립

마지막 연에서 시는 다시 첫 구절인 “태양의 기억이 가슴 속에 흐려져 간다”를 반복하며 수미상관의 구조를 취한다. 하지만 반복된 구절 뒤에 붙은 질문인 “이건 무엇? 어둠?”은 앞선 체념과는 다른 당혹감과 서늘함을 동반한다.

기억이 완전히 소멸한 자리에 찾아온 것은 단순한 밤이 아니라, 존재를 삼키는 근원적인 ‘어둠’이다. “하룻밤 사이에도 / 겨울은 올 수 있다”는 끝 구절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불행과 노년, 혹은 죽음과 같은 필연적인 상실에 대한 경고이다. 여름(태양)과 겨울(어둠) 사이의 완충지대 없이, 인간은 어느 날 갑자기 얼어붙은 세계에 홀로 남겨질 수 있다는 사실을 시인은 예리하게 포착한다.

4. [결론] 고통을 응시하는 서늘한 눈

안나 아흐마토바의 이 시는 슬픔을 요란하게 분출하지 않는다. 대신 얼어붙은 운하와 텅 빈 하늘의 이미지를 빌려 감정의 골격을 드러낸다. ‘태양’이라는 따뜻한 기억이 휘발된 자리에 들어선 ‘겨울’은, 사랑의 부재를 넘어 인간이 마주해야 할 차갑고 본질적인 고독을 상징한다.

시인은 사랑의 실패를 개인적 불행으로 가두지 않고, 그것을 계절의 순환과 같은 거대한 자연의 섭리 안으로 편입시킨다. “잘된 일”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는 목소리와 “어둠” 앞에서 멈칫하는 시선 사이의 긴장감은, 이 시를 단순한 이별시가 아닌 정신의 고백록으로 만든다. 결국 이 시는 우리에게 말한다. 모든 빛나는 기억은 흐려지기 마련이며, 우리는 하룻밤 사이에 찾아올 겨울을 견딜 수 있는 자신만의 ‘투명한 부채(뼈대)’를 지녀야 한다고 말이다.

[함께 읽어볼 만한 주제] 아흐마토바의 이 시는 앞서 감상한 조세프 브로드스키의 〈일곱 연〉과 묘하게 닮아 있다. 브로드스키가 '당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가 우주의 소용돌이 속에 버려진 고독을 노래했다면, 아흐마토바는 '당신'과의 결합을 포기하고 스스로 겨울의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고립을 택한다. 이 두 러시아 시인의 '유기된 존재의 고독'이라는 테마를 비교해 보는 것은 어떨까?
Portrait of Anna Akhmatova, 1914 by Olga Kardovska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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