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양훈 Dec 10. 2023

궨당(眷黨)의 추억

2020년 3월 5일 한라일보 <김양훈의 한라시론>

일찍이 신동엽 시인은 이렇게 일갈했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매해 한식(寒食)이 되면 상귀리와 구엄리 김해김씨 궨당들은 물뫼봉 기슭에서 묘제를 지낸다. 세상이 달라져 후손들이 하나둘 직장을 찾아 마을을 떠나 살게 되면서부터는 양력 4월 둘째 일요일로 묘제일이 바뀌었다. 묘제는 물뫼봉 중시조(中始祖)를 시작으로 원뱅디에 묻힌 3대까지 제사를 지낸다. 지금은 친족들이 순번을 정해 제수를 준비하지만, 옛날에는 엄쟁이 종가 며느리인 어머니와 상귀리 궨당이 번갈아서 제수(祭需) 음식을 장만했다.    

  

어린 시절 추억 속 묘제는 고사리 장마철이라 안개 자욱한 날이 많았다. 어린 등허리에 제수 구덕을 지고 이른 아침 집을 나서면 새벽바람이 눅눅했고, 어떤 해는 가랑비도 내렸다. 길섶 풀잎에 맺힌 아침이슬을 밟으며 묘역에 오르면, 언제나 상귀리 친척들이 먼저 도착해 봉분에 돋아난 잡풀 따위를 뽑거나 흐트러진 산담을 고쳐 쌓고 있었다. 어렸던 엄쟁이 종손은 중산간 상귀리에 떨어져 사는 궨당들의 정체가 신비롭기까지 했는데, 커서야 비사를 들었다. 그들은 1901년 이재수난이라 부르는 신축민란에 천주학쟁이란 이유로 가문에서 쫓겨난 후손들이었다. 상귀리가 큰 집 종가, 우리집은 가지(家枝) 종가인 셈이다.   

   

중시조 묘제를 마치고 원뱅듸로 가는 길목에는 제주도 천연기념물 제441호인 400년 된 곰솔(熊松)이 서 있다. 솔가지 위에 흰 눈이 쌓이면 시냇물을 마시는 백곰을 닮았대서 옛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다. 곰솔 너머 펼쳐진 수산저수지 둑길에 서면 구엄리 바다가 한눈에 펼쳐지고, 갯무꽃 장다리꽃이 가득 피어 있어 아름다웠다. 수산저수지는 노꼬매오름에서 흘러내리는 답단이내(川)를 막고 벼농사를 짓는다고 2년여의 공사 끝에 제방을 쌓아 물을 채웠다. 1959년, 이승만 정권의 쌀농업 진흥책에 편승한 저수지 공사로 인해 70여 세대의 하동마을 사람들은 꼼짝없이 인근 마을로 강제이주를 당해야 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이 4·19혁명으로 무너지자 저수지는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한 채 방치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는 수산리 하동마을은 근시안적 농업정책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이후 1980년대 말 어느 레저회사가 수산저수지 주변을 위락 시설과 유료 낚시터로 개발하여 낚시꾼과 관광객을 유치할 계획을 세웠다. 회사는 보트장과 야외 풀장, 식당을 지어 한동안 운영하였지만, 유원지는 90년대 후반 문을 닫고 현재 건물과 놀이시설은 흉물로 방치되어 있다. 무용지물이 된 저수지가 답단이내가 흐르는 들판으로 원상복구가 될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1901년 신축민란 당시 천주교를 믿었단 이유만으로 엄쟁이 김해김씨 가문에서 쫓겨난 상귀리 궨당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대정골 인성리 추사적거지 건너편 도로에 세워진 삼의사비의 첫머리를 생각하게 된다. ‘여기 세우는 이 비는 종교가 무릇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식이 될 것이다.’     

 

코로나19로 전국은 몸살을 앓고 있고 4월 총선은 한 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종교의 탈을 쓴 사이비 집단이 설치면 세상이 어떠하리라는 걸 요즘 생생하게 보고 있다. 정치깡패가 설치던 그 자리에 그들이 앉아 있다. 일찍이 신동엽 시인은 이렇게 일갈했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매거진의 이전글 영웅 문도깨비, 미완의 귀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