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예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옙투셴코
흰 눈이 내리네
예브게니 옙투셴코
흰 눈이 내리네
가지런히 미끄러지듯…
이 세상에 살면 좋겠지만,
그러나 아마도 안 되겠지.
누군가의 영혼이 저 멀리
흔적도 없이 녹아서는
마치 흰 눈처럼
땅에서 하늘로 오르네
흰 눈이 내리네…
나 또한 떠나리니.
나 죽음을 슬퍼하지 않으며
불멸 또한 고대하지 않네.
나 기적을 믿지 않네.
나는 눈도 별도 아니니,
더 이상 나는 다시는, 다시는
존재하지 않으리.
죄 많은 나에게 드는 생각.
그럼 나는 대체 누구였나,
조급하게 살면서 무엇을
삶보다 더 사랑했는가?
나는 러시아를 사랑했네,
내 피와 척추를 다하여ㅡ
넘쳐흐르거나
얼어붙은 그녀의 강물,
농가에 깃든 그녀의 영혼,
솔숲에 깃든 그녀의 영혼,
그녀의 뿌시킨, 스쩬카,
그녀의 노인들을.
고달픈 적 있어도,
섣불리 한탄하지 않았네.
볼품없이 살았다 해도,
러시아를 위해 나는 살았네.
나는 희망을 않는다네,
(남모를 불안에 애태우며)
다만 눈곱만큼이나마
내가 러시아에 보탬이 되었기를.
그녀가 나를
쉽사리 잊는다 해도,
오직 그녀만은
영원히, 영원히 존재하길.
흰 눈이 내리네,
모든 시대에 그랬듯이,
뿌시킨과 스쩬까 시대에도,
나 떠난 후에도.
함박눈이 내려서
눈이 시리도록 빛나고,
내 자취도 타인의 자취도
흔적 없이 사라지네.
불멸의 능력은 없으나,
내 희망은 있으니,
러시아가 존재한다면,
나도 곧 존재하리라는 것. (1965)
러시아 현대대표 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이명현 엮고 옮김) 창비세계문학 35
예브게니 옙투셴코의 <흰 눈이 내리네(Идёт белые снеги)>는 1960년대 소비에트 연방의 복잡한 시대적 공기와 시인 개인의 실존적 고뇌가 맞물려 탄생한 작품이다. 이 시는 단순한 풍경 묘사를 넘어, 죽음과 불멸, 그리고 조국 러시아에 대한 무한한 헌신을 노래하고 있다.
1. 시인 예브게니 옙투셴코(Yevgeny Yevtushenko): 시대의 목소리
예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옙투셴코(1933~2017)는 20세기 후반 러시아 문학사에서 가장 대중적이고 영향력 있었던 인물 중 한 명이다.
'해빙기'의 기수
그는 스탈린 사후 찾아온 '해빙기(The Thaw)'를 상징하는 시인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반까지, 그는 축구 경기장이나 광장에서 수천 명의 청중을 앞에 두고 시를 낭독하던 '스타 시인'이었다. 그의 시는 이전 세대의 경직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벗어나 개인의 감정, 도덕적 갈등, 그리고 사회적 부조리를 직설적으로 건드렸다.
반항과 순응 사이의 줄타기
옙투셴코는 매우 복합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유대인 학살을 고발한 <바비 야르(Babi Yar)>나 스탈린주의의 잔재를 비판한 <스탈린의 후계자들> 같은 시를 통해 체제 내부의 비판자 역할을 자처했다. 하지만 동시에 소련 작가 동맹의 일원으로서 해외여행이 허락되는 등 당국의 묵인 아래 활동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어용 시인'이라는 비판과 '용기 있는 지식인'이라는 찬사를 동시에 받았다.
2. 시대적 배경: 1965년, 해빙의 끝자락
이 시가 쓰인 1965년은 소련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다.
•흐루쇼프의 실각: 1964년, 해빙기를 이끌던 니키타 흐루쇼프가 실각하고 보수적인 브레즈네프 정권이 들어섰다. 자유로웠던 문화적 분위기가 다시 경색되기 시작한 시기다.
•실존적 위기: 옙투셴코 역시 서른을 넘긴 나이가 되며 젊은 날의 열정적인 선동가적 기질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고 '사후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적 정체성: 서구와의 교류가 잦았던 옙투셴코였지만, 이 시기 그는 자신의 뿌리인 '러시아'라는 거대한 정신적 고향에 천착하게 된다.
[詩評]
3. 죽음이라는 침묵 속에 피어난 애국심
① 눈(雪)의 상징성: 소멸과 정화
시 전체를 지배하는 이미지는 '내리는 눈'이다. 러시아에서 눈은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망각의 상징이자, 동시에 지상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정화의 상징이다.
"내 자취도 타인의 자취도 / 흔적 없이 사라지네."
시인은 내리는 눈을 보며 인간 존재의 유한함을 절감한다. 1연에서 "이 세상에 살면 좋겠지만, 그러나 아마도 안 되겠지"라는 구절은 삶에 대한 미련과 죽음이라는 숙명을 담담하게 수용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② 역사적 연속성: 뿌시킨과 스쩬카 라진
시인은 자신을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러시아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 놓는다.
•뿌시킨: 러시아 근대 문학의 아버지이자 자유를 노래한 시인.
•스쩬카(스테판 라진): 17세기 농민 반란의 지도자이자 민중의 영웅.
이 두 인물을 언급함으로써 옙투셴코는 자신이 사랑하는 러시아가 '권력자의 러시아'가 아닌 '시인과 민중의 러시아'임을 명확히 했다. 내가 사라져도 눈이 내리듯, 러시아의 정신은 이들을 통해 영원히 이어질 것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③ 고백적 어조와 자기반성
5연에서 시인은 자신을 "죄 많은 나"라고 부르며 자문한다. "무엇을 삶보다 더 사랑했는가?"라는 질문은 화려했던 젊은 시절에 대한 회한이자, 진정으로 가치 있는 가치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성찰이다. 그 대답은 결국 '러시아'로 귀결된다.
④ 불멸에 대한 새로운 정의
시인은 개인적인 영생이나 기적을 믿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마지막 연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러시아가 존재한다면,
나도 곧 존재하리라는 것."
이것은 시인의 존재 이유가 개인의 명성이 아니라, 조국이라는 거대한 유기체의 일부로 기억되는 데 있음을 의미한다. 내 이름은 잊혀도 내가 사랑한 러시아가 살아있다면, 나의 사랑과 헌신 또한 그 땅의 일부로 살아남는다는 '민족적 불멸성'을 노래한 것이다.
4.총평: 서정적 애국주의의 절정
이 시는 옙투셴코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서정적이며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으로 꼽힌다. 평소 그의 시가 웅변조(declamatory)의 강렬한 어조를 띠었다면, <흰 눈이 내리네>는 속삭이는 듯한 독백과 차분한 리듬감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이 시를 통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던집니다.
•겸손한 예술가상: 시인은 위대한 창조자가 아니라, 시대의 눈을 맞으며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일 뿐이다.
•헌신의 가치: 삶의 고달픔 속에서도 조국에 "눈곱만큼이나마 보탬"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소박하지만 위대한 애국심.
•역사의 낙관: 개인은 사라지지만, 대지는 영원하며 그 대지를 사랑한 마음 또한 영원하다.
이 시는 훗날 노래로도 만들어져 러시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서정시 중 하나가 되었다. 옙투셴코는 2017년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예언했듯 "러시아가 존재하는 한" 그의 시구는 매년 겨울 내리는 흰 눈과 함께 기억되고 있다.
우리는 서로를 파괴했지만,
동시에 서로를 창조했다.
벨라 아흐마둘리나(Bella Akhmadulina)와 예브게니 옙투셴코의 관계는 20세기 러시아 문학사에서 아름다우면서도 격정적이었던 '해빙기 문학의 황금 커플'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히 연인이나 부부를 넘어,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예술적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다.
1. 운명적인 만남과 결혼 (1954년~1959년)
•첫눈에 반한 천재들: 1954년, 당시 촉망받던 젊은 시인 옙투셴코는 막 시단에 등장한 10대의 벨라 아흐마둘리나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옙투셴코는 그녀의 신비로운 목소리와 귀족적인 외모, 그리고 독창적인 시적 재능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세기의 결혼: 두 사람은 1954년에 결혼했다. 당시 소련의 젊은 지성인들에게 두 사람의 결합은 '새로운 시대'의 탄생을 알리는 사건과도 같았다. 옙투셴코는 광장에서 외치는 '사회적 목소리'였고, 아흐마둘리나는 내면의 깊은 고독을 노래하는 '섬세한 영혼'이었다.
2. 갈등과 이별: 두 태양의 충돌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약 3~5년,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음). 이별의 원인은 복합적이었다.
•강한 개성의 충돌: 옙투셴코는 외향적이고 대중의 주목을 즐기는 성격이었던 반면, 아흐마둘리나는 좀 더 은둔적이고 탐미적인 성향이 강했다. 두 거대한 예술적 자아는 한 지붕 아래 공존하기 어려웠다.
•아이 문제: 훗날 옙투셴코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그는 아흐마둘리나가 아이를 갖기를 원치 않았고(혹은 유산을 권유했고), 이것이 그녀에게 큰 상처가 되어 결별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고백하며 평생 후회하기도 했다.
3. 문학적 동지로서의 평생의 우정
이혼 후에도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를 존경하는 '우정'으로 승화되었다.
•해빙기의 기수들: 두 사람은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 등과 함께 '60년대 시인들(Shestidesyatniki)'로 불리며 소련의 문화적 자유화를 이끌었다. 서로의 시 낭송회에 참석하거나 서로를 향한 시를 쓰기도 했다.
•헌시(獻詩): 옙투셴코는 이혼 후에도 그녀를 떠올리며 여러 편의 시를 썼다. 아흐마둘리나 역시 옙투셴코를 자신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존재로 인정했다.
4. 옙투셴코의 시 <흰 눈이 내리네>와 아흐마둘리나
<흰 눈이 내리네>를 쓸 당시(1965년), 옙투셴코는 이미 아흐마둘리나와 헤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시의 전반에 흐르는 고독감과 "누군가의 영혼이 저 멀리 흔적도 없이 녹아서는" 같은 표현들에는 젊은 날 뜨겁게 사랑했던 이들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이 투영되어 있다는 해석이 많다.
특히 이 시에서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러시아라는 거대한 대지 속에서 하나가 되기를 소망하는 태도는, 아흐마둘리나를 포함한 동시대 예술가 동료들과 함께 누렸던 그 뜨거운 시대정신에 대한 향수이기도 하다.
5. 영원한 러시아의 연인
아흐마둘리나가 2010년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옙투셴코는 큰 슬픔에 빠져 그녀를 추모했다. 2017년 옙투셴코 본인이 숨을 거둘 때까지도, 러시아인들은 이 두 사람을 묶어서 기억하곤 했다.
"우리는 서로를 파괴했지만,
동시에 서로를 창조했다."
옙투셴코의 이 말처럼, 두 사람은 연인으로서는 실패했을지 몰라도 러시아 문학사에 남을 가장 눈부신 영감의 파트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