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악과 세르게이 예세닌 비교
낡은 집
이용악
날로¹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²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 물려 줄
은동곳³ 산호 관자⁴ 갖지 못했니라.
재를 넘어 무곡⁵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⁶ 늙은 둥글소⁷
모두 없어진 지 오랜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모도 모른다.
찻길이 뇌이기 전
노루 멧돼지 족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 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의 셋째 아들은
나의 싸리말 동무⁸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⁹ 옆에서
첫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래두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그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 보냈다는
그날 밤
저릎등(燈)¹¹이 시름시름 타들어 가고
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도 일층 붉더란다.
갓주지¹⁰ 이야기와
무거운 전설 가운데서 가난 속에서
나의 동무는 늘 마음 졸이며 자랐다.
당나귀 몰고 간 애비 돌아오지 않는 밤
노랑고양이 울어울어
종시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어미 분주히 일하는 방앗간 한구석에서
나의 동무는
도토리의 꿈을 키웠다.
그가 아홉 살 되던 해
사냥개 꿩을 쫓아다니는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디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옥만 눈 위에 떨고 있었다.
더러는 오랑캐령¹³ 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¹²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¹⁴만 남았길래
꽃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 이용악의 제2시집 《낡은 집》(1938) 수록
[註]
1) 날로 : 낮으로.
2) 흉집 : 흉가(凶家), 사는 사람마다 흉한 일을 당하는 불길한 집
3) 은동곳 : 은으로 만든 동곳(상투를 튼 뒤에 풀어지지 않도록 꽂는 물건)
4) 산호 관자 : 망건에 달아 망건 줄을 꿰는 작은 고리
5) 무곡(貿穀) : 이익을 보려고 곡식을 몰아서 사들임. 또는 그 곡식
6) 콩실이 : 콩을 싣고 다님
7) 둥글소 : 황소, 수소
8) 싸리말 동무 : 어렸을 때 마마를 함께 앓으면서 싸리말을 타고 나았던 동무. ‘싸리말’은 싸리로 조그맣게 말처름 만든 것으로, 마마에 걸린 지 12일 되는 날 역신을 쫓아낼 때 쓴다.
9) 짓두광주리 : 바느질 도구를 담는 그릇인 반짓고리(함경도 방언)
10) 저릎등 : ‘겨릅등’의 방언. ‘겨릅’은 삼대를 태워 밝히는 등(燈)
11) 갓주지 : 갓을 쓴 절의 주지 스님. 옛날 아이들을 달래거나 울음을 그치게 할 때 갓주지에 관한 이야기를 즐겨 했음
12) 오랑캐령 : 두만강 일대에 살던 여진족의 땅
13) 아라사(俄羅斯) : ‘러시아’의 음차(音借)
14) 글거리 : 그루터기(함경남도 방언)
이용악의 「낡은 집」과
세르게이 예세닌 비교
이용악의 「낡은 집」은 1930년대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유랑사를 한 가족의 몰락을 통해 형상화한 사실주의적 서사시입니다. 이 시를 러시아의 국민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Sergei Yesenin)의 시적 경향과 비교하면, '농촌 공동체의 붕괴'와 '고향에 대한 비극적 향수'라는 공통된 정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이용악의 「낡은 집」과 예세닌 시의 비교 분석
<비교 항목: 이용악의 「낡은 집」->세르게이 예세닌의 시적 경향>
◇핵심 소재: 낡고 버려진 '흉집', 유랑하는 가족-> 버려진 농가, 쓰러진 자작나무, 고향의 황폐화
◇정서적 기저: 비극적 사실주의. 식민지 수탈로 인한 민족의 고통-> 비극적 낭만주의. 근대화/공업화로 파괴된 농촌의 슬픔.
◇공동체 인식: 해체된 농촌 공동체와 '북쪽(유랑)'을 향한 시선-> 사라져가는 '루시(옛 러시아)'의 전통과 농촌적 삶에 대한 애착.
◇상징물: 죽은 살구나무, 눈 위의 발자국-> 저무는 노을, 울고 있는 개, 잘려나간 나무
2. 세부적인 비교 포인트
① 사라져가는 농촌에 대한 '비가(悲歌)’
◇이용악: 털보네 가족이 떠난 '낡은 집'은 더 이상 생명이 살지 않는 공간입니다. 꽃이 피어도 벌이 오지 않는 살구나무 그루터기는 파괴된 한국 농촌의 불모성을 상징합니다.
◇예세닌: 그는 자신을 "마지막 농민시인"이라 불렀습니다. 철도와 공장이 들어서면서 순수한 농촌의 자연과 질서가 파괴되는 것을 목격하며, 마치 이용악이 '낡은 집'을 보듯 황폐해진 고향의 풍경을 구슬프게 노래했습니다.
② 동물적 심상을 통한 비극의 극대화
◇이용악: "노랑고양이 울어울어 잠 이루지 못하는 밤", "늙은 둥글소" 등 동물의 울음과 기척을 통해 가난의 음산함을 고조시킵니다.
◇예세닌: 예세닌 역시 시에서 강아지, 소, 말 등 가축의 고통을 인간의 고통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동물의 슬픈 눈망울을 통해 시대의 비극을 투영하는 방식은 두 시인이 매우 유사합니다.
③ 유랑과 상실감
◇이용악: 털보네 식솔들이 눈 위에 발자국만 남기고 '아라사(러시아)'나 '오랑캐령'으로 떠나는 장면은 강제적 유랑의 슬픔을 극대화합니다.
◇예세닌: 예세닌의 시에서도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방황하는 화자의 '부랑자적 정서(Hooliganism)'가 두드러집니다.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자의 상실감이 두 시인의 시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정서입니다.
3. 시평: 시대의 목격자로서의 시선
이용악의 「낡은 집」이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 하에서 민족의 생존권 박탈을 다루었다면, 예세닌은 급격한 현대화 과정에서 사라져가는 전통적 가치에 주목했습니다.
이처럼 두 시인 모두 '집(고향)'이라는 근원적인 공간이 파괴되는 과정을 통해 인간 소외와 시대적 고통을 형상화했습니다. 이용악의 시에서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이 '공포'와 '추위'를 상징한다면, 예세닌에게 고향의 눈은 '순수했던 과거로의 회귀'이자 '죽음'의 이미지를 동시에 갖습니다.
이용악의 「낡은 집」의 서사구조와
세르게이 예세닌과의 문학적 연관성
이용악의 「낡은 집」을 서사적 구조와 표현 기법, 그리고 예세닌과의 심층적인 문학적 연관성을 중심으로 더 세밀하게 분석해 보겠습니다.
1. 서사 구조의 분석: ‘현재-과거-현재’의 입체적 구성
이 시는 단순한 묘사를 넘어 한 가족의 몰락사를 추적하는 서사시적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도입 (1~2연): 현재의 황폐한 풍경. '흉집'이라 불리는 공간을 제시하며 독자의 시선을 폐허로 이끕니다. "초라한 내음새"라는 후각적 심상을 통해 과거의 흔적을 소환합니다.
◇전개 (3~5연): 과거의 회상. 털보네 가족의 가난한 삶을 묘사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화자)'와 '털보네 셋째 아들'의 관계입니다. 싸리말 동무였던 친구의 탄생과 성장 과정을 통해 비극은 개인의 기록을 넘어 공동체의 기억이 됩니다.
◇절정 (6~7연): 야반도주와 유랑. 아홉 살 되던 겨울, 일곱 식구가 북쪽으로 떠난 사건입니다. "눈 위에 떨고 있었다"는 발자국 묘사는 추위라는 물리적 고통과 앞날에 대한 심리적 공포를 완벽하게 결합한 표현입니다.
◇결말 (8연): 현재로의 회귀. 생명력을 잃은 살구나무 그루터기를 통해 민족의 절망적인 현실을 재확인하며 끝을 맺습니다.
2. 예세닌과 이용악: ‘비극적 향토색’의 심층 비교
러시아의 예세닌과 한국의 이용악은 각기 다른 시공간에 살았지만, ‘농촌의 몰락을 노래하는 시인’이라는 점에서 소름 돋는 평행이론을 보여줍니다.
① ‘동물’을 바라보는 연민의 시선
이용악: "늙은 둥글소", "노랑고양이" 등 가축의 울음소리는 가난한 집안의 음산한 분위기를 증폭시킵니다.
예세닌: 예세닌의 시 「개에 관한 노래」나 「암소」를 보면, 새끼를 뺏긴 어미 개의 눈물이나 늙은 소의 슬픔을 통해 인간의 잔인함과 시대의 비극을 고발합니다. 두 시인 모두 동물을 단순한 배경이 아닌, 고통을 공유하는 주체로 설정했습니다.
② ‘눈(Snow)’의 미학
◇이용악: 눈은 떠난 자들의 발자국을 보존하는 기록 매체인 동시에, 유랑민을 압박하는 가혹한 자연 환경(북방 정서)입니다.
◇예세닌: 러시아의 눈은 예세닌의 시에서 고향의 상징이자,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죽음의 수의와 같습니다. 이용악의 '북쪽'과 예세닌의 '러시아 들판'은 모두 시리고 시각적인 비극의 공간입니다.
3. 표현 기법의 특징
① 방언의 활용과 사실성
이용악은 '짓두광주리', '저릎등', '글거리' 등 함경도 방언을 적극적으로 사용합니다. 이는 단순히 지역색을 드러내는 것을 넘어, 그 땅에서 뿌리 뽑힌 사람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보존하려는 리얼리즘적 장치입니다.
② 감각의 전이와 대비
◇청각의 시각화: "차그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 보냈다"는 표현은 마을 사람들의 무심한 대화(청각)를 차가운 물의 이미지(시각/촉각)로 치환하여 가난의 일상성을 서늘하게 그려냅니다.
◇대비: "도토리의 꿈"을 꾸던 아이의 순수함과 "사냥개 꿩을 쫓아다니는" 살벌한 겨울 현실을 대비시켜 비극성을 극대화합니다.
4. 종합적 평가: ‘집’을 잃은 세대의 기록
이용악의 「낡은 집」은 1930년대 일제의 수탈로 인해 만주나 러시아로 떠나야 했던 '유랑민의 보고서'입니다. 예세닌이 근대화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사라져가는 농촌의 영혼을 붙잡으려 했다면, 이용악은 식민지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무너진 민족의 '삶의 터전'을 증언하려 했습니다.
두 시인은 모두 "고향은 더 이상 안식처가 아니다"라는 슬픈 진실을 노래했다는 점에서 인류 보편의 소외를 대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