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보즈네센스끼

by 김양훈

고야¹

안드레이 보즈네센스끼


나는 고야!

적은 헐벗은 들판으로 하강하며

내 눈구멍을 포탄 구덩이처럼 쪼아 먹었다.


나는 고통.


나는 전쟁의

고성(高聲). 1941년 불타버린

도시의 눈 덮인 잔해


나는 기근.


나는 목매단 아낙의 목구멍.

그녀의 육신은 텅 빈 광장 위에서

종처럼 뎅그렁거린다.


나는 고야!


오, 징벌의

포도송이여!² 나는 불청객의 유해를

일제사격으로 서방을 향해 날려 보냈다!


그리고 추도의 하늘에 단단한 별을

못처럼 박았다.

나는 고야. (1959년)


이명현 엮고 옮김. 러시아 현대대표 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창비세계문학) 中

[註]
1) 프란시스꼬 데 고야(Francisco de Goya, 1746-1828). 스페인의 화가.
2) ‘징벌의 포도송이’는 존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1939)에서 민중의 분노를 상징하는 포도송이와, 그것의 원형인 요한계시록 14장의 ‘진노의 포도주’와 관련된다.
작품의 배경과 시평(詩評)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의 시 「고야」는 20세기 러시아 현대 시학의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시는 스페인의 거장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화풍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비극을 결합하여, 인간이 겪는 고통의 보편성을 강렬한 언어로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1. 작품의 배경: 예술과 전쟁의 만남

◇역사적 배경: '대조국전쟁'의 상흔

이 시가 쓰인 1959년은 소련 내에서 스탈린 사후 '해빙기'라 불리는 자유로운 창작 분위기가 감돌던 때입니다. 보즈네센스키는 어린 시절 목격했던 제2차 세계대전(러시아 측 명칭: 대조국전쟁)의 참상을 떠올립니다. 시에 등장하는 "1941년"은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한 해로, 러시아인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고통과 기근, 죽음의 상징입니다.

◇예술적 배경: 프란시스코 고야의 '전쟁의 참화'

보즈네센스키는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기 위해 18세기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를 소환합니다. 고야는 나폴레옹 군대의 잔학 행위를 다룬 연작 판화 『전쟁의 참화』를 통해 전쟁의 추악함을 가감 없이 드러낸 화가입니다. 시인은 고야의 기괴하고도 사실적인 묘사 방식이 자신이 겪은 1941년의 비극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도구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2. 시평: "나는 고야" — 자아와 고통의 일체화

◇'고야(Goya)'라는 이름의 변주

이 시의 핵심은 언어적 유희와 소리의 울림에 있습니다. 러시아어로 '고야(Goya)'라는 이름은 다음과 같은 단어들과 음성적으로 연결됩니다.

•Gore (고레): 슬픔, 고통

•Golod (골로드): 기근, 배고픔

•Gorlo (고를로): 목구멍

시인은 "나는 고야!"라고 외치며 자신을 화가 고야와 동일시하는 동시에, 그 이름 속에 숨겨진 고통(Gore)과 기근(Golod)의 화신이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강렬한 이미지와 시각적 전이

시적 화자는 자신의 눈구멍을 "포탄 구덩이"에 비유하고, 목매단 여인의 몸을 "종(鐘)"으로 묘사합니다.

•눈구멍: 보는 주체였던 시인의 눈이 파괴되어 전쟁의 상흔 그 자체가 됩니다.

•종소리: 죽음의 이미지가 청각화되어 광장에 울려 퍼집니다. 이는 비극을 외면하지 말고 직시하라는 시각적, 청각적 경고입니다.

◇분노에서 추모로

후반부에서 시인은 '진노의 포도송이'를 언급하며 침략자들에 대한 처절한 복수와 응징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시의 마무리는 "추도의 하늘에 단단한 별을 못처럼 박았다"라는 표현을 통해, 죽어간 이들에 대한 영원한 기억과 애도로 승화됩니다. 차가운 겨울 하늘에 박힌 별은 고통의 산물이자,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역사의 증거입니다.

3. 요약 및 감상

이 시는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시가 아닙니다. "나는 ~이다"라는 반복적인 선언을 통해, 과거의 비극이 현재의 나(시인)를 구성하는 핵심임을 강조합니다. 보즈네센스키는 고야의 붓터치처럼 거칠고 파괴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전쟁이 인간의 영혼에 남긴 구멍을 독자의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 보입니다.

◇한 줄 평: 고야의 캔버스 위에 러시아의 겨울과 전쟁의 비명이 덧칠해진, 인류 보편의 비극에 관한 짧고도 강렬한 서사시.


Андре́й Вознесе́нский, Andrey Voznesensky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
(Andrey Voznesensky)

러시아의 시인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Андре́й Вознесе́нский, Andrey Voznesensky, 1933년~2010년)는 1933년 5월 12일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을 주로 소비에트 연방의 도시 블라디미르에서 보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어머니와 함께 우랄산맥에 있는 쿠르간 지방에서 살기도 했다. 그의 양친은 모두 문학과 예술에 깊은 관심이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시절부터 그에게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시를 읽어주었다. 그의 아버지는 레닌그라드에서 공학 교수로 일했다. 보즈네센스키는 전쟁 중 전선으로 돌아가던 아버지가 쿠르간에 들렀던 날을 회상한다. 그의 아버지는 면도를 하지 않아 초췌한 모습으로 약간의 식량이 들어 있는 배낭과 고야의 작품집을 가져왔다. 고야의 그림은 화가가 되고자 했던 꿈 많은 어린 소년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보즈네센스키는 고야의 그로테스크하고 무시무시한 전쟁 그림을 통해서 전쟁의 참상을 이해했다. 바로 그의 유명한 시 <나는 고야>(1957)가 전쟁에 대한 시인의 이해를 반영한 작품이다.

전쟁 후 보즈네센스키의 가족은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청년이 된 그는 예술가가 되고 싶었으나 건축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대하여 그는 말한다. “나는 이미 글을 쓰고 있기는 했으나 주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시는 얼음장 밑의 강물처럼 내 마음속에서 흐르고 있었다.” 1957년 모스크바 건축대학을 졸업하기 바로 전에 화재가 발생했다. 이 화재는 그에게 있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이 화재로 인해 보즈네센스키가 수년간 공들여 작성한 졸업 작품이 완전히 불타버렸다. 이 사건은 보즈네센스키에게 불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는 상징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건축학은 이미 그의 마음속에서 타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시인이 되었다. 이 화재 사건은 그의 시 <건축대학의 불>(1957)의 테마가 되었다. 그가 화재 때문에 시를 쓰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림과 건축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림과 건축은 그의 시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는 많은 시 속에서 특히 테마와 이미지 선택에 있어서 건축에 대한 꾸준한 관심을 보여준다. 그의 시 <대가>에서 그는 모스크바 붉은 광장 위에 있는 성(聖)바실리 성당의 건축가 바르마가 이반 4세에 의해 눈이 멀어 다시는 어떤 건물도 지을 수 없었다는 전설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시 속에서 건축 이미지를 통해서 시각적 이미지를 부각하고 있다. 시각 이미지는 그의 성공적인 실험시 속에서 중요한 예술적 기법으로 나타난다.

보즈네센스키의 형식적 교육은 건축대학으로 끝났으나, 그의 시 수업은 정신적 스승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와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 만남은 보즈네센스키의 생애에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그는 자신의 첫 시 작품들을 파스테르나크에게 보냈으며, 그로부터 격려의 편지와 초대장을 받았다. “나는 페레델키노(Peredelkino)까지 이사 가서 그가 죽을 때까지 그의 곁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나의 유일한 스승이었다”라고 보즈네센스키는 말하고 있다. 보즈네센스키의 초기 작품들은 파스테르나크와 비슷한 시풍을 보여준다. 물론 보즈네센스키는 이내 자신의 독창적인 시어를 발견하지만 시 속에서 풍기는 연민의 정과 비애감은 파스테르나크 시의 특성과 어느 정도 일체감을 주고 있다. 보즈네센스키의 유기체적 삶의 통일감은 파스테르나크의 시적 분위기와 유사하다. 보즈네센스키는 시뿐만 아니라 도덕적 일상에서도 파스테르나크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파스테르나크는 도덕적 지성의 상징이었다. 그는 스탈린 시대에 일어난 언어의 타락과 황폐화에 반대하여 행동했다. 스탈린에 의해 황폐해진 러시아 순수문학을 재창조하기 위한 투쟁에서 그는 도덕적 지성으로 무장했다. 그는 인간 개인의 가치를 믿고 있었다.

작품 세계

보즈네센스키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주된 관심사로 두면서도 전통적인 시 형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장르를 창조하고자 과감한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 열정은 다양한 예술적 기법을 사용한 다중 운율시, 산문시, 시와 산문의 혼합시, 그래픽시, 시각시 등을 개발하게 했다.

시인으로서 보즈네센스키의 인기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러시아에서 시인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알아야 한다. 보즈네센스키는 과거 소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시인이었다. 독재자 스탈린의 사망 후 저항 시인 옙투셴코와 더불어 ‘젊은 시인들’의 선두 주자인 보즈네센스키는 195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줄곧 화제의 중심이 되어온 러시아의 대표적인 시인으로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시 낭송회, 텔레비전과 신문 등 각종 매스컴을 통해 대중과 친숙한 이 시인은 러시아 시 전통 속에서 독자적인 시어를 개발하고 자작시 낭송을 통하여 언어 예술의 진수를 보여준다. 수많은 청중의 갈채와 환호 속에서 행해지는 그의 시 낭송은 새로운 예술 장르, 즉 낭송 예술의 창조라 할 수 있다.

시어 선택과 배열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 시인은 일상의 단어들을 조합하여 신어(新語)를 만들어낸다. 그의 시 속에서 일상적인 단어와 신어는 새로운 표현력과 생명력을 지니고 살아난다. 그리하여 그의 시어는 새로운 의미와 이미지를 창출한다. 그가 종종 ‘언어의 마술사’라고 불리는 것은 지나친 말이 아니다. 분명히 그의 언어는 러시아 문학어 발전에 상당한 공헌을 하고 있다.

인간과 역사, 인간과 자연, 인간과 사회, 문명과 기술의 위태로운 공존, 역사와 현대 생활의 상호작용, 비난받기 쉬운 시인의 사회적 위치 등 다양한 테마들이 그의 시 속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그의 시 세계 속에서 주된 핵심은 무엇보다도 인간이다. 그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인간의 본질과 특성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시에는 자연과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포착된 많은 표상들이 인간에 대한 다양한 상징과 알레고리로서 나타난다. 그리고 역사와 인간의 행동에 비교되는 자연의 절대적 위치와 최고의 가치에 대한 테마들이 그의 시 <정적>과 <죽은 듯이 고요하다> 등에 나타난다. 이런 시들은 60년대 자신의 고민스러운 상황과 그에 대한 어려움을 노래한 것들이다. 이런 시들에서 지배적인 선율은 사랑과 자연에로의 도피와 후퇴다. <위키백과>


프란시스코 고야
Vicente López Portaña - el pintor Francisco de Goya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 이 루시엔테스(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1746~1828)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이자 판화가이다. 고야는 궁정화가이자 기록화가로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18세기 스페인 회화의 대표자로 특히 고전적인 경향에서 떠나 인상파의 시초를 보인 스페인 근세의 천재 화가로 알려져 있다. 파괴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과 대담한 붓터치 등은 후세의 화가들, 특히 에두아르 마네와 파블로 피카소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생애


유년기

프란시스코 고야는 1746년 3월 30일 스페인 아라곤 지방의 푸엔데토도스에서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호세 베니토 데 고야 이 프랑크는 도금 업자였으며 처가에 살았다. 때문에 고야는 어린 시절을 어머니 집안에서 보냈다. 1749년 무렵 고야의 가족은 사라고사에 집을 마련하였고 몇 년 후 그곳으로 이사하였다. 이곳에서 고야는 마르틴 사파테르와 막역한 사이였던 에스쿠엘라스 피아스의 학교에 다녔으며 이때의 경험은 고야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고야는 어릴 때부터 재능을 보였고 14세가 되자 화가 호세 루산의 도제로 들어갔다.

1765년 마드리드에서 벨라스케스와 렘브란트의 작품에 감동을 받았다. 후일 고야는 마드리드로 옮겨 당대의 유명한 궁정화가인 안톤 라파엘 멩스의 제자로 들어갔다. 그러나 고야는 스승과의 불화로 인해 졸업을 인정받지 못했다. 고야는 1763년과 1766년에 왕립 미술 학회에 입회신청서를 제출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1771년 고야는 이탈리아로 여행하였고 파르마의 회화전에서 2등으로 수상하였다. 그해 말 고야는 사라고사로 돌아가 필라 성모 대성당 소속의 화가가 되었다. 그곳에서 고야는 프란시스코 베이유 이 수비아스와 함께 작업하였다. 고야의 뛰어난 색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명해졌다.

성숙기

1773년 7월 25일 고야는 베이유의 여동생 호세파와 결혼하였다. 그 후 고야는 왕립 미술 학회의 회원이었던 베이유의 도움으로 엘 에스큐리알과 엘 파르도 궁전의 테피스트리 제작에 참여하여 5년간에 걸쳐 42개의 패턴을 제작하였다. 고야는 이 작업으로 왕가의 주목을 받았고 성 프란시스코 성당의 제단화를 그려 실력을 인정받은 후 왕실 미술 학회의 회원이 되었다.

1783년 고야는 카를로스 3세의 측근이었던 플로리다블랑카 백작의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고야는 많은 왕가의 초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 1788년 카를로스 3세가 사망하고 1789년 카를로스 4세가 즉위하였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이해에 고야는 궁정화가가 되었다.


궁정화가


카를로스 4세의 가족, 1800년

1786년 카를로스 3세의 초상화를 그린 이래 고야는 왕가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1789년에는 정식으로 궁정화가가 되었고 1799년 수석 궁정화가가 되어 연봉으로 50,000 레알과 사륜마차 비용으로 500 두캇을 받았다. 궁정화가로서 고야는 왕과 왕후를 비롯한 많은 왕족과 귀족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 가운데 1800년 작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이 유명하다.

카프리초스


카프리초스 52번째 그림, 1799년 by 고야

1792년 콜레라에 걸린 고야는 고열로 인해 청각을 잃게 된다. 5년 뒤 회복에 이르기까지 고야는 깊은 상실감을 맛보았다. 이 기간 동안 고야는 프랑스 대혁명의 이상에 이끌렸고 관련 철학책들을 탐독하였다. 1799년 고야는 에칭의 일종인 애쿼틴트 기법으로 제작한 판화집 《카프리초스》(Caprichos, 변덕)를 발표하였다. 이 작품 속에서 고야는 가톨릭 성직자들을 괴물이나 악마로 묘사하며 마녀와 악마에 대한 미신에 사로잡힌 스페인의 풍조와 부패한 가톨릭 교회의 실상을 고발했다. 마카브르의 일종인 이 판화집은 카툰의 시초로 평가받기도 한다. 어두운 분위기의 판화들로 채워진 이 판화집에 그는 다음과 같은 부제를 붙였다.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

한편 1798년 고야는 파도바의 안토니오를 기념하는 마드리드의 플로리다 성 안토니오 성당의 벽화를 그렸다.

말년
El Tres de Mayo, by Francisco de Goya《1808년 5월 3일》

1808년에서 1814년까지 프랑스와 스페인 간에 반도 전쟁이 일어났다. 고야는 반도 전쟁에 관한 여러 기록화를 남겼다. 특히 1808년 5월 2일과 5월 3일의 사건을 그린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이 유명하다. 그는 프랑스 대혁명의 지지자였지만 자신의 조국 스페인을 침략한 프랑스군의 만행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였다. 1810년에서 1820년까지 제작한 《전쟁의 재난》(Los Desastres de la Guerra)은 전쟁 중에 일어난 학살과 비인도적 만행을 기록한 판화집이다. 1812년 고야의 아내 호세파가 사망하였다.

1814년 프랑스군이 물러가고 페르난도 7세가 왕위에 복귀하였으나 고야는 왕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후 고야는 가정부 도냐 레오카디나와 그녀의 사생아 로사리오 웨이스와 함께 살았다. 고야는 로사리오에게 그림을 가르쳐 주었는데 그녀는 고야의 딸이었으리라 짐작되고 있다. 말년의 고야는 《유스타와 루피나》와 같은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고야는 세상과 떨어져 지내고자 만사나레스 근처에 집을 한 채 구해 "귀머거리의 집"(Quinta del Sordo)이라 이름 붙였다. 그는 여기서 검은 그림들을 제작하였다.

1824년 고야는 프랑스 보르도로 이주하였고 이후 파리에도 잠시 있었다. 1826년 스페인으로 돌아왔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보르도로 갔으며 1828년 8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작품

작품으로 벨라스케스풍의 종교화와 초상화 및 민중 생활에서 제재를 취한 사실적 풍속화가 많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초상화 <옷 입은 마하> <옷 벗은 마하> <카를로스 4세의 가족> 등과 역사화 <1808년 5월 3일>, 그리고 동판화 <투우> 등이 특히 유명하다. 대다수의 작품이 마드리드 왕립 회화관에 보관되어 있다.

고야의 작품은 그가 콜레라를 앓고 청각을 잃은 1792년을 기점으로 전기 작품과 후기 작품으로 뚜렷이 나뉜다. 전기 작품은 고야가 궁정화가로서 그린 왕족과 귀족의 초상화들과 여러 태피스트리의 원화들로 화려하고 밝은 느낌의 그림들이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1792년 이후 고야의 그림은 눈에 띄게 어두워진다. 게다가 반도 전쟁 이후의 참상을 겪으면서 그의 그림은 무거운 주제와 어두운 색조를 담은 것으로 변하게 된다. 말년 부인을 잃고 퀸타 델 소르도에 그린 일련의 검은 그림에서 그의 이러한 성향은 최고조에 달한다.

《옷 벗은 마하》
《옷 입은 마하》

마하

마하 연작은 고야의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림들 가운데 하나이다. 1800년에 〈옷 벗은 마하〉를 그렸고 1803년에는 〈옷 입은 마하〉를 그렸다. 같은 여인이 똑같은 포즈로 그려져 있는 이 두 그림은 어떠한 비유나 신화적 연관성이 없는 현실의 여인을 대상으로 한 그림으로, "서양 예술 최초의 등신대 여성 누드"로 평가받는다. 《옷 벗은 마하》는 신성 모독 논란을 일으켰고 고야는 그림에 옷을 입히라는 압력을 받았다. 이에 고야는 그림에 옷을 입히는 것을 거절하고 《옷 입은 마하》를 새로 그렸다.

그림의 모델인 마하가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림을 소유하게 된 카를로스 4세의 수상 마누엘 데 고도이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마하의 후보로 알바 여공을 꼽았으나 고야는 이를 부정하였다. 마누엘 데 고도이의 아끼는 정부라는 설도 있다. 여러모로 보아 마하는 실존의 어떤 인물이기보다는 이상화된 여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1808년 고도이가 실각하자 이 그림은 그의 모든 재산과 함께 페르난도 7세에게 귀속되었다. 1813년 스페인 종교재판은 마하 연작을 외설스럽다고 압수하였으나 1836년 반환하였다. 고야는 간신히 이단 심판을 면할 수 있었다. 현재 마하 연작은 스페인 프라도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어두운 세계

1793년에서 1794년 사이 고야는 일련의 환상적인 그림들을 그렸다. 이 시기 그는 머리를 울리는 이상한 소음과 청각 상실로 고통받고 있었다. 신경쇠약에 걸린 그는 이 시기에 환상적이면서도 악몽을 표현하는 어두운 그림들을 남겼다. 이러한 그림들은 만년의 고야가 그린 검은 그림들과 깊은 연관성을 보인다. 1799년 그는 마카브르의 영향을 강하게 보여주는 82개의 판화들을 묶어 《카프리초스》를 발표한다. 고야는 이러한 제목을 붙인 까닭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 모든 문명사회는 수없이 많은 결점과 실패로 가득 차 있다. 이는 악습과 무지, 당연한 것이 되어버린 이기심으로 인해 널리 퍼진 편견과 기만적 행위에 의한 것이다. ” — 고야

전쟁의 광기, 검은 그림

반도 전쟁이 가져온 결과는 참혹했다. 스페인 전역은 프랑스군에 의해 학살과 죽음의 공포에 떨었다. 프란시스코 고야는 전쟁의 참상을 그림을 통해 고발하였다. 《1808년 5월 3일의 처형》이 널리 알려져 있다. 고야는 전쟁의 참상을 담은 판화집 《전쟁의 재난》을 제작하였다. 고야는 전쟁을 기록한 이 판화 연작에서 프랑스 군인의 만행을 기록함과 동시에 스페인 사람들이 프랑스에 협력한 자국민에게 벌인 만행 역시 똑같이 기록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스페인 왕정이 복귀하였으나 고야는 이미 왕가의 신임을 잃은 상태였다. 외딴집에서 살기로 작정한 고야는 퀸타 델 소르도에서 검은 그림 연작을 남겼다. 이 그림들 속에서 그는 이성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광기를 묘사하였다. 검은 그림들 가운데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가 유명하다.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전쟁의 재난》중에서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는 귀머거리의 집 1층 식당 정면에 그려져 있었다. 고야는 이 그림을 감상하며 식사를 했다고 한다.


전쟁의 재난


그는 프랑스 대혁명의 지지자였지만 자신의 조국 스페인을 침략한 프랑스군의 만행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였다. 1810년에서 1820년까지 제작한 《전쟁의 재난》(Los Desastres de la Guerra)은 전쟁 중에 일어난 학살과 비인도적 만행을 기록한 판화집이다. (아래 그림은 上 <잘하는 짓이다! 시체를 가지고>와 下 <더 이상 어쩔 수 있겠는가!>이다.

검은 그림 연작


《검은 그림 연작》中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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