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야르

by 예브게니 옙뚜셴꼬

by 김양훈

바비야르¹

예브게니 옙뚜셴꼬


바비야르에는 기념비라곤 없다.

조야한 묘비 같은 험준한 벼랑뿐.

나는 무섭다.

오늘 나는

유태민족만큼이나 나이를 먹었다.

어쩌면 오늘 나는

저 옛날 유태인.

나는 지금 고대 이집트를 배회한다.

그런데 나 여기, 십자가에 매달려 숨을 거두니,

지금까지 나에게 남아 있는 못 박힌 자국.

어쩐지 내 느낌에, 드레퓌스

그는 바로 나.

속물근성

그것은 나의 밀고자이자 재판관.

나는 투옥되었고

감금되었다.

박해받고,

모욕당하고,

비방당한 채.

브뤼셀풍 소매장식의 부인네들은

괴성을 지르며 양산으로 내 얼굴을 찌른다.

어쩐지 내 느낌에

나는 비아위스또끄²의 소년.

피가 흘러내려, 바닥에 흥건히 번진다.

선술집의 두목들이 행패를 부리며

동강 난 양파와 보드까 냄새를 풍긴다.

발길질에 내동댕이쳐진 무력한 나.

나는 헛되이 학살자들에게 읍소한다.

껄껄대며 하는 말.

“유태놈들을 두들겨 패, 러시아를 구하라고!”

곡물가게 주인이 우리 엄마를 강간한다.


오, 나의 러시아 민중이여!

그대는 본질적으로

국제주의자임을

나는 안다.

그러나 종종

더러운 손 지닌 자들이

순결하기 그지없는 그대의 이름을 떠들어댄다.

그대의 대지가 품은 선량함을 내가 아는데,

유태인 혐오자들이

눈도 깜박하지 않고

스스로를

“러시아인민연합”이라고

호사스럽게 명명하다니

그 얼마나 비열한가!

어쩐지 내 느낌에,

내가 바로 안네 프랑크,

사월의 나뭇가지처럼

투명한 소녀.

나 역시 사랑을 한다.

나에게도 미사여구 따윈 필요 없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것.

볼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는 게

얼마나 적은가!

우리는 나뭇잎도

하늘도 볼 수 없다.

그러나 아주 많은 것이 가능하니

그것은 어두운 방 안에서

서로를 다정하게 얼싸안는 것.

사람들이 이리로 오고 있다고? 두려워 마라―

이 울림은 봄이 이곳으로 다가오는 소리.

나에게 오라. 어서 나에게 키스해 다오.

문을 부스고 있다고?

-아니, 이것은 유빙(遊氷)의 소리…


바비야르에는 야생풀들이 사각거린다.

나무들은 판관처럼 준엄하게 바라본다.

여기는 모든 것이 침묵으로 소리치고,

어쩐지 내 느낌에,

모자를 벗은 채,

서서히 백발이 되어가는 듯.

자신 또한

그칠 줄 모르는 소리 없는 비명처럼

매장된 수만 명의 사람들 위에 서 있다.

나는

여기서 총살된 노인들 한 사람, 한 사람.

나는

여기서 총살된 아이들 한 명, 한 명.

내 안의 그 무엇도

이것에 관하여 잊지 못하리!

지상의 마지막 유태인 박해자가

영원히 땅속에 묻히는 그때

「인터내셜가」가

울려 퍼지게 하라!


내 핏줄 속에 유태인의 피는 흐르지 않는다.

그러나 거친 악의를 뿜는 나를

모든 유태인 박해자들은

유태인처럼 증오한다.

왜냐하면

나는 진정한 러시아인이니까!

(1961년)


이명현 엮고 옮김. 러시아 현대대표 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창비세계문학) 中

[註]
1) 우크라이나 키이우(Київ) 외곽의 협곡. 1941년 독소전쟁 때 독일군이 이곳에서 이틀 동안 3만 명이 넘는 유태인들을 학살하고 매장하였다.
2) 폴란드 북동부에 있는 도시. 2차대전 당시 소련 영토였던 이곳에서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유태인들이 독일군에 의해 무참히 살육당했다.

역사적 배경과 시평
예브게니 옙뚜셴꼬의 <바비야르(Babi Yar)>는 단순한 시 한 편을 넘어, 소련 사회의 금기를 깨뜨리고 인류의 양심을 깨운 거대한 외침이었습니다. 이 시에 대한 배경과 문학적·사회적 의미를 정리해 드립니다.

1. 작품의 역사적 배경: 침묵에 가려진 비극

바비야르(Babi Yar)는 우크라이나 키이우 인근의 깊은 협곡입니다. 1941년 9월, 나치 독일은 이곳에서 단 이틀 만에 33,771명의 유태인을 학살했습니다. 전쟁 전체 기간을 통틀어 이곳에서 희생된 이는 약 1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전후 소련 정부는 이 비극을 '소련 인민의 희생'으로만 일반화하려 했으며, 유태인만을 타깃으로 한 인종학살(홀로코스트)이라는 특수성을 지우려 했습니다. 시의 첫 구절인 "바비야르에는 기념비라곤 없다"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망각과 반유태주의에 대한 고발입니다.

2. 시평:

타자의 고통을 내 것으로 만드는 공감의 연대

① "나는 ~이다": 경계를 허무는 자아 확장

옙뚜셴꼬는 시 전체에서 자신을 역사 속 박해받는 유태인들과 동일시합니다.

고대 이집트의 노예, 십자가의 예수, 드레퓌스 사건의 주인공, 포그롬(유태인 박해)에 떨던 소년, 그리고 안네 프랑크까지.

시인은 러시아인이지만, 고통받는 이들의 역사를 자신의 몸에 새겨진 "못 박힌 자국"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는 '나'라는 개인의 자아를 인류 공동의 고통으로 확장시키는 강력한 문학적 장치입니다.

② 위선적인 애국주의에 대한 일침

시인은 당시 러시아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반유태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합니다. '러시아인민연합' 같은 이름을 내걸고 폭력을 휘두르는 자들을 "비열하다"라고 일갈하며, 진정한 러시아 정신은 배타적인 민족주의가 아니라 국제주의(인도주의)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③ 침묵의 함성과 백발의 애도

바비야르의 협곡을 "조야한 묘비"라 부르고, 그곳의 나무들이 "판관처럼 준엄하게 바라본다"라는 표현은 대자연이 인간의 죄악을 증언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그곳에서 스스로 백발이 되어가는 노인이 되어 수만 명의 비명소리를 온몸으로 청취합니다.

④ 진정한 '러시아인'의 정의

마지막 연은 이 시의 백미입니다. 시인은 자신에게 유태인의 피가 흐르지 않음을 밝히면서도, 박해자들이 자신을 유태인처럼 증오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나는 진정한 러시아인이니까!"

이 역설적인 선언은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불의에 저항하는 자만이 그 나라의 진정한 시민'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역설합니다.

3. 문학사적 의의

이 시는 1961년 발표 당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옙뚜셴코는 당국의 검열 위협 속에서도 이 시를 낭독했고, 이는 이후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13번 '바비야르'의 텍스트가 되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바비야르>는 국가가 지우려 했던 역사를 문학이 어떻게 복원해 내는지, 그리고 한 시인의 양심이 어떻게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불멸의 고전입니다.


Dmitri Shostakovich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13번 '바비야르'

https://youtu.be/_VHrV0f8WyE?si=u9fslwU_9BEIvXPo


매거진의 이전글러시아에서 시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