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A,B의 엄마입니다. C 댁에 글 올려 본의 아니게 맘 상하셨다면 미안합니다."
나는 사람이기 이전에 엄마다. 엄마이기에 용기가 났다. 먼저 전화하는 사람도 될 수 있다.
"지금에 와서야 왜 그런 말을 하시지요?"
"오늘 그런 마음이 들어서요."
사무장이 되묻는다. 사과를 전하려면 사과받는 놈에게 몇 가지 트집을 잡혀 추궁을 당하고 말도 안 되는 갑질에 휘둘려도 나 죽었다는 마음으로 조금 참아야 한다. 그 순간만 견디면 된다. 다행히 그 순간을 잘 견뎠다.
"관장 옆에 있으면 좀 바꿔 주세요."
관장은 전화를 받지 않으려고 부인과 약간의 실랑이를 벌였다. 결국 전화를 건네받았다.
"우리 변호사랑 이야기하세요."
그들이 생각하는 그걸 바라고 전화하지 않았다. 나는 용서해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A,B의 엄마입니다. C 댁에 글 올려 본의 아니게 맘 상하셨다면 미안합니다."
용기를 내서 내 마음을 전했으니 그걸로 되었다.
바른 길이 빠른 길.
마음에 그림이 그려지면 행한다. 행할까 말까 고민하지 않는다. 다만 아이들이 들을까 베란다에 나왔다. 창 밖의 욕망산을 바라보고 적어놓은 공책을 바라보며 찰나의 시간을 견디었다. 전화도 떨리는 마음도 끊기었다. 너른 산과 맑은 하늘이 시원하다.
해가 지고 남편이 돌아왔다. 그 인간들에게 전화한 사실에 화를 냈다.
"사과를 하면 지는 거야."
"지긴 뭐가 져?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했는데. 사람이면 마음이 무거울 텐데, 잘못을 저지르고 그걸 인정하지도 않고 내 블로그나 와서 글을 훔쳐보는 놈이 못난 놈이지. 적어도 나는 내 마음에 솔직해. 가해자는 모른척한다고 해도 피해자는 힘들어. 입장 바꿔 생각하면 내가 올린 글로 자신의 마음이 찔리고 피해를 봤고 힘들었다고 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들이 행한 짓으로 우리가 힘들고 불행했던 것처럼. 내 글로 인해 힘들다고 하니 미안하다고 한 거야. 용서해달라고 징징거리지 않았어."
"넌 내일 졌어. 아까 전화한 것도 다 증거로 낼 거란 거 생각 못 했어? 충분히 그럴만한 사람이야. 자신이 살기 위해 남에게 뭔들 못하겠어? 우리나라는 미안해도 절대 미안하다고 하면 안 돼. 그게 상식이야. 미안하다는 말이 곧 죄를 인정하는 거지. 그럴 때는 그냥 유감이라고 했었어야지. 드라이하게, I am sorry."
"나는 아니야. 나는 미안하면 미안하다고 말해. 그런 세상에 살 거고 그런 세상을 물려줄 거야."
"너 하나 발버둥 친다고 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이제 그만 좀 하자."
11월 25일 목요일.
경찰서 출두 일이다. 남편은 내 옆을 지켜준다고 일까지 뺐다. 아이들을 허겁지겁 학교와 유치원으로 보내고 남편과 차에 올라탔다. 경찰서에 조사받으러 가면서 지각한다는 건 뭔가 죄를 하나 만들고 시작하는 느낌이 들었다. 20분 일찍 도착했다. 사이버 수사팀에 들어가 담당 경찰을 찾았다.
"어? 오늘 맞으세요? 자리에 안 계시는데요. 잠시만요."
텅 빈 내부를 지키는 경찰은 전화를 건네주었다. 담당 경찰관이었다.
"어. 오늘 맞으세요. 내 달력에는 없던데. 제가 오늘 출동해서 조사를 못하는데. 이게 왜 전달이 안된 거지? 오늘 확실히 맞아요? 이상하다. 내 달력에 표시가 되어있지 않아서 연락을 못 드렸네요."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네 알겠습니다. 다음에 오지요."
남편이 전화를 낚아챘다.
"아, 이거 뭐 일을 이렇게 합니까? 조사받는다고 일까지 뺐는데... 일을 또 빼라는 소리인 가요?"
"아, 유감입니다. 일정에 맞추어서 다시 조사받으실 날자 잡아드리겠습니다."
그렇게 경찰서를 나왔다.
남편은 담배를 한대 태우고 차에 탔다. 뜨끈한 국밥집으로 차를 몰며 그가 말했다.
"봐라. 우리나라는 경찰도 미안하다 소리를 안 한다. 미안하다는 내 죄를 인정한다는 소리거든. 어떻게든 미안하다는 말을 안 하고 그 순간만 넘어가려는 게 요즘 사람들이다. 아까 들었지? '유감'이란 단어로 자신이 잘못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거. 너도 좀 배웠으면 좋겠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어제 관장에게 전화할 때 미안하단 말 대신 유감이란 단어가 떠올랐다면 더 좋았겠다고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인생은 결국 혼자 걷는 고행길
11월 29일 10시
막내의 등원 준비를 하면서 버스의 위치를 알아보았다. 배차 간격은 30~40분.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는데 305번이 지나갔다. 757번은 놓치면 안 된다. 정류장을 돌아보니 757번 버스도 출발한다. 아! 망했다.
콜택시를 부른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출근 시간이라 콜택시도 바쁜가 보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큰길을 향해 걸었다. 붉은색 '빈 차'란 글씨를 달은 택시들이 야속하다. 모두 누군가의 부름에 바쁘게 달리고 있다. 택시 정류장을 향한다. 차가 있을 리 없지만 그래도 간다. 약속시간은 다가오는데 경찰서에 갈 방법이 없다.
택시 한 대가 다가온다.
"저 00 경찰서에 갈 건데요, 너무 멀어서. 가는 길에 보건소 아래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주세요."
"네? 아, 네"
경찰서에 간다고 말하니 벌써 죄인이 된 것 같다. 그냥 보건소 밑 버스정류장에 내려 달라고 하면 되지 왜 그렇게 말했을까, 다른 택시를 갈아타고 싶다.
택시 미터기에 눈이 간다. 2만 원에서 3만 원을 넘어갈 찰나, 내렸다.
보건소 아래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 정류장에는 아무도 없다. 낡고 긴 나무 의자에 덩그러니 내가 앉아있다. 경찰서 방면의 버스는 15분 뒤 도착이다. 덤프트럭, 출근하는 차들, 사람을 가득 실은 버스들 저마다 속도계가 고장 난 것처럼 내리막길 달린다. 나를 집어삼킬 듯이 매섭다. 까마귀 몇 마리가 전깃줄에 앉아있다. 이내 '깍깍'거리며 날아간다.
버스에 올랐다.
아이 태운다고 놓친 757번 버스다. 맨 앞자리가 비어있다. 몸과 마음은 벌써 지쳐버려서 한 번도 앉아본 적 없는 그곳에 앉았다. 버스가 멈출 때마다 쏠리는 몸을 이겨내기 위해 엉덩이와 다리에 힘을 주어야 한다. 어르신이 타신다. 냉큼 일어나 뒤로 들어갔다.
늦지 않아 다행이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터질 것 같은 이 내 사랑을. 그댈 위해서라면 나는 못할 게 없네'
버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를 흥얼거리며 버스가 지나온 길을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 아침 햇살 마사지에 떨리는 마음이 진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