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이 뭐어때서
학교에서 들었던 말중에 가장 웃기는 말은,
나와 동갑인 남교사에게 들었던 말이다.
진심으로 내가 너를 걱정해서 하는 말인데, 너 지금 애를 낳아도 생물학적으로 노산이야. 지금 빨리 낳아야 돼. 언제 만나서 언제 결혼할거야? 서른이면 너 하나도 젊은 나이 아니야. 나이에 맞게 연애를 해.
도대체 내 여자인 친구들도 하지 않는 걱정을 왜 자기가 해주는지 모르겠다.
내가 자기 애를 낳을 것도 아닌데, 동료 교사로서 함께 겪는 다른 수만가지 걱정들 중에 왜 하필 내가 고민하지도 않는 출산에 대한 걱정을 본인이 사서 해주는지 모를 일이다.(몇번, 나는 이런 부분에 대해 이들에게 사서하는 걱정이라는 말로 웃으며 반박해보았으나, 그때마다 듣는 말은 진짜 너는 젊은 나이가 아니라는 것을 간과하지 말라는 당부의 말이었다. 혹여, 내가 진지하게 불쾌감을 드러내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예민하다고 몰아가는 행태로 인해.. 그냥 흐르는대로, 그런 생각을 하는 동료 교사가 있구나, 받아들이기로 했다.)
간혹 동료 남자들은 넘쳐나는 애국심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미래의 나의 남편감이라도 될 수 있겠다는 설레발로 인한 걱정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자신과 같은 가치관을 가진(임신 생각 때문에 서른이 지나면 아무나 만나 일단 결혼을 하고 싶어해야 하는) 후진 사람이라는 생각을 기저에 깔고 있기 때문인지, 어찌되었든 나의 임신과 출산에 관심이 많다.
설령, 내가 그것을 고민하는 30대 여성이더라도(실제로 나는 그때당시에 개미똥꾸멍만큼도 임신에 관심이 없었지만), 내가 머리가 비어보이는 그에게 향후 남성들의 90프로 이상이 탈모가 오니까 너는 꼭 탈모에 유의하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그를 걱정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서로가 지키는 예의인 것은 당연하다.(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걱정과 무례함을 발화자 스스로 분별하지 못하면,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예민한 사람으로 비춰지는 듯하다. 그래서 일단, 나는 여기에서 묵비권을 택하곤 한다. 예전에 함께 근무했었던 예의있던 동료 교사와 친구들을 생각하며, 예의 없음이 디폴트가 아닌 사람들이 정상인 사회에 근무하는 나를 상상한다. 그러면 다시 한번 나는 한번도 묵비권과 지랄맞음의 선택지(말주변이 없어서 그 중간의 대화라는 합리적인 선택지가 없음이 안타깝다.)라는 시험대에 놓이지 않았던 사람처럼 행동하며, 낙천적인 성격을 연기해보곤 하는 것이다.
그와 그리고 그와 비슷한 남자들은 자신보다 젊은 남자들에 대한 부러움과 동경어린 말을 자주 하곤 한다. 내가 저 나이였으면, 실컷 놀고도 한참을 더 놀 수 있겠다, 젊음이 부럽다. 라는 등. 물론 과거의 영광과 그때만의 청춘이 가질 수 있는 당돌함, 패기 등등이 부러울 수 있겠으나, 가만히 하는 말들을 들어보면, 현재는 그들에게 이미 빛바랜 가치가 되어버려, 다른 사람들도 자기의 생각처럼 젊음을 부러워할 것이라 여기는 듯하다. 쉽게 말하자면, 나를 볼 때, 자신을 투영해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는 꽤나 자주 있다. 나는 워낙 감정과 표현이 투명해서, 계산적이라는 평을 들어본 일이 없다. 그런데 딱 한번 사회생활을 하며, 동료 교사에게 계산적이다라는 평을 들어보았는데, 그 주변 교사들에게도 들어본 바와, 내가 관찰한 바로는 바로 그가 그 누구보다 계산적인 인간이었다.
이처럼,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특정한 면모를 타인에게 투영해서 바라보는 듯 하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나는 나를 무척이나 갑작스레 "어떻다"라고 평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속성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논리로 생각해보자면, 임신과 출산, 그리고 나이에 대해 위기감을 조성하는 그 친구의 말 속에는 사실 그 자신이 은연중에 정해둔 나이대에 맞는 역할에 순서대로 절박하게 따라가고자 하는 욕심과 노력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를 존중해보려고 노력하지만, 그 표현 방식이 무척이나 방어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나 또한 문득, 다른 사람을 향한 걱정을 가장하며, 나의 욕심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욕심타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