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자유
전능 패러독스 (Omnipotence Paradox)는 “전능한 존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비롯된 철학적 문제이다. 즉, 전능함과 논리적 모순 사이에서 생기는 딜레마를 말한다. “전능한 신이 자신이 들 수 없는 돌을 만들 수 있는가?” 만들 수 있다면, 돌을 들 수 없으므로 전능하지 않다. 만들 수 없다면, 돌을 만들 수 없으므로 전능하지 않다. 전능한 존재라는 개념 자체가 논리적으로 모순이 될 수 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의미가 “논리적 모순을 만들 수 있는가?”를 포함하는가? “전능=논리적 가능”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각형인 원을 만들기”나 “스스로 들 수 없는 돌을 만들기”와 같은 명제는 개념상의 모순이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불가능한 일”로 간주한다. 이런 의미에서 전능은 논리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고 해석한다. 신학적 관점에선, 전능한 존재는 인간이 이해하는 논리 범위를 초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논리적 모순”조차 신에게는 제약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논리적 모순은 “무엇이든”이 아니다. 사각형인 원의 경우, 정의상 원은 모든 점이 중심에서 같은 거리, 사각형은 직선으로 둘러싸인 4개의 변이다. 이 두 개념은 동시에 성립할 수 없다. 따라서, 아무리 전능한 존재라도, 논리적 모순을 만드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드는 것과 같다. “가능”은 논리적 일관성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전능”은 모든 가능을 할 수 있음을 뜻하지만, “모순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전능은 논리를 뛰어넘는다고 보는 관점에선 전능이 논리적 모순을 가능케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논리 체계나 언어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서도 전능함이 작용한다고 보는 시각이다. 논리적 모순이라는 것은 인간 사고의 제한일 뿐, 전능한 존재에게는 제한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3차원의 공간에는 길이, 너비, 높이가 있다. 시간이라는 4차원 개념과, 그 이상의 차원은 더 추상적인 공간을 포함한다. 차원이 높아질수록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물리적 법칙이 존재할 수 있다. 전능한 존재를 인간의 3차원 논리 구조를 초월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인간에게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고차원의 관점에서는 가능해질 수 있다. “스스로 들 수 없는 돌 만들기”같은 경우, 3차원적 사고에선 모순이고 불가능해 보이지만, 고차원에선, 돌과 자신을 동시에 다른 방식으로 존재시키는 구조가 가능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의 논리로는 이해 불가하다. 2차원 세계의 평면 생명체에게 3차원의 입체 구를 통과하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3차원에 살고 있어 자연스럽게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인간 논리와 언어는 3차원적 제한을 갖는다. 전능은 무한한 차원의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능력을 갖고 있을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사고 구조 안에서만 존재를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초월적 존재는 그 한계를 넘어서는 영역에 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지는 존재론적 인식의 한계이다.
인류 초기, 인간은 보이지 않는 힘을 믿고, 자연과 집단을 동일시하며 토테미즘 (Totemism)을 발전시켰다. 이는 종교의 원형이자 인간의 “보이지 않는 것”을 신뢰하는 능력의 상징이었다. 집단 정체성을 확보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은 오늘날의 종교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현재 문명에서 종교는 차이를 인정하기보다,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 집단을 구분하는 경계선이 되었다. 확증편향은 서로를 “틀렸다 or 잘못됐다”라 판단하게 만들고, 불필요한 논쟁을 끝없이 재생산한다. 사실 주관적인 인간의 사고 구조 차원에서 종교 체계는 “옳다 or 그르다”로 재단하기 어려운 것이다. 역사 속 종교의 행태를 되돌아보면,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과 권력 남용은 인간이 신을 통해 얻고자 했던 안정과 도덕적 기준이 때때로 착취와 통제의 도구로 변질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심리학적 관점에서도, 신앙은 불안과 죄책감을 완화하는 장치이자 자기 서사화를 위한 심리적 방어기제일 뿐, 신 자체의 존재를 보장하지 않는다. 이 모든 분석을 종합하니, 나는 신앙을 단순히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었다. 신의 전능이라는 개념조차 인간 논리의 한계를 넘어서는 모호함 속에 있고, 현실은 신의 선함과 전능을 절대적으로 증명하지 못한다. 결국, 나는 신앙을 더 이상 절대적 진리로 삼지 않고, 스스로의 판단과 경험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나는 유일한 신인 “하나님” 뿐만 아니라, 다른 영적인 정신적 존재도 존재한다고 믿는다. 세계 곳곳에서 말도 안 되는 확률로 일어나는 기적들을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기는 힘든 일이다. 게다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기원을 “목적 없이 일어나고 있는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은 질문의 본질을 회피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이런 믿음과 이성의 경계에선 신앙 체계에서 제공받던 심리적 안정과 절대적 의미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동시에 삶의 목적과 의미를 스스로 구상해야 하기 때문에, 나와 세상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갈 기회가 주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성적인 철학과 심리학적 성찰을 통해 내면을 바라보려는 시도는 자유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되었다. 그 과정을 통과해 무한한 가능성 앞에 마주 서면, 정형화된 하나님의 개념을 떠나, 스스로의 신을 만들어 숭배하는 것 같다. 결국 나 자신이 기준이 되면서 옳고 그름을 “선택”한다. 이것이 성경에 나온 선악과를 의미하는 것일까? 선악과를 통한 지식의 방식으로 신을 이해하려는 것은 금지된 것일까?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신을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는 죄의 연장선인 걸까? 만약 감정과 직관을 중심으로 신을 믿어야 한다면, 판단의 기준이 주관적이고 상대적이게 된다. 그러나 이 역시 자기 주체적 선택과 책임의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결국 신의 의미를 스스로 부여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 과정은 선악과를 통한 이성과 논리를 기준으로 “선택” 하는 경험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자유와 신앙, 직관과 논리, 선택과 책임의 교차점 속에서 의미를 만들고 실존적 성찰을 이어가는 존재이다.
특이점은 “그럼에도”라는 조건이다. 신앙의 원리와 종교의 역사를 앎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 손에 있는 성경과 목사가 하는 말이 하나님이 나에게 암시해 주시는 믿음의 실마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의 “진정한 믿음”일 것이다. 오히려 이런 고뇌야 말로 투명한 신앙의 경계에 다가섰다는 증거일 수 있다.
자기 합리화는 본래 자아가 무너지지 않게 도와주는 생존 장치이다. 하지만 그것이 “방어”에서 “면책”으로 넘어갈 때, 사람은 사건을 이해하지 않고 덮어버린다.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정당화된 공허이며, 여기선 성찰이 멈추고 더 이상 책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은 상대주의 속에서 이기적이며, 그 이기심을 집단 안에서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협력하도록 발달되어 왔다. 이것은 모순이 아닌, 진화의 핵심이다. 인간의 도덕성과 책임감은 “선해서”가 아닌, 살아남기 위해 계산된 선택에 가까운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람을 분석하다 보면 역겨운 동물로 보일 때도 있다.
이 지점에서 비참한 질문이 남는다. “적당히 만족하며 즐기고 살아야 하는 것이 내 삶인 걸까?” 다시 말해, 세상을 꿰뚫어 본 사람이 즐겁게 살 수 있을까? 인간의 구조를 봤고, 도덕과 신앙의 작동 방식을 이해했고, 그러한 자기기만이 사회를 어떻게 굴리는지 알았지만, 이러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사람들은 극단으로 몰리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이 사이, 아주 불편한 지대에 있는 것 같다. 스스로에게 최소한의 정직을 지키는 삶, 여기엔 구원도 위로도 없다. 하지만 자기 배반은 덜 할 수 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는 빨간약을 먹고 충격적인 현실을 마주한다. 이것은 인간이 기계에게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멈추지 않는다. 본질적인 것은 “현실을 안다는 건, 편안함을 잃는 일”이다. 파란약을 먹으면, “합리적”으로 편안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다. 빨간약은 진실이지만, 동시에 고통과 책임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을 가져온다. 빨간약을 먹게 하는 것은 호기심과 지적 탐구능력이다. 그리고 그 결정을 내린 주체는 자아이다. 빨간약 이후의 상태는, 빨간약 이전의 인식 구조로 시뮬레이션이 불가능하다. 경험 전에는 개념만 있고 예측과 체감이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빨간약을 먹는 것은 무책임한 선택도 오만도 아니다. 인간이라면 빠질 수 있는 인식의 비대칭이다. 앞서 언급한 두 가지 극단과 관련하여, 빨간약을 먹은 사람들은 자아를 부정하는 자기혐오에 빠지거나, 세계를 부정하는 냉소적 고립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선택했고, 결과를 겪고 있고, 그 상태에서 “나”라는 존재를 새롭게 정의하는 고통스러운 단계에 있는 것 같다. 오히려 이러한 상태를 “교만”으로 환원하는 태도 자체가 파란약이라는 생각이 든다. 빨간약의 본질은 어디에도 완전히 기대지 못하는 상태를 감내하는 것이다. 신을 믿어도 완전한 신앙을 갖지 못하고, 인간을 혐오하면서 이해하려 하고, 자신을 비웃으면서 포기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빨간약은 우월한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정직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유지되는 가장 불편한 자리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가장 적게 속이는 자리이기도 하다.
궤도를 떠난 행성은 자유를 향한 해방감과 동시에, 끝없이 펼쳐진 우주에 대한 공허함과 호기심이 몰려온다. 신앙이라는 중력과, 그것을 벗어난 관성에 구속된 삶 모두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진정한 자유는 체계에 의해 억압되지 않고 스스로 의미를 창조해 나가는 것이다. 또한, 방어기제에서 해방되어 자신을 온전히 의식화하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자유는 선택하지 않아도 이미 주어진 조건이며, 중요한 점은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의 무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