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 그리고 죽음

신앙과 자유

by 박민규

신이 없는 인간은 선한가? 악한가? 인간이 본능적으로 선한가 악한가를 묻는다는 것은, 결국 “우리는 무엇을 향해 태어났는가? “라는 질문과 같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하나의 색으로 단정되기 어렵다. 오히려 인간의 내면은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는 스펙트럼이고, 그 어느 순간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심리학은 인간이 선과 악의 씨앗을 모두 가지고 태어난다고 말한다.


1. 애착이론: 안정 애착을 가진 아이는 자연스럽게 타인을 신뢰하고 공감하지만, 불안정 애착은 공격성과 회피 그리고 불신을 키운다.

2. 진화심리학: 생존을 위해 협력을 선택하기도 하고, 생존을 위해 배신과 이기성을 선택하기도 한다.

3. 도덕 발달 이론: 도덕성은 타고나기보다 “발달되는 것”이다. 즉, 인간은 선의 잠재력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실제로 그것을 선택하는 능력은 성장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결국 인간은 선의 능력도, 악의 가능성도 모두 가진 채 태어난다. 악은 본능이 아닌, “결핍”에서 생긴다. 악을 끌어내는 건 본능이라기 보다, 결핍과 왜곡이다. 사랑받지 못한 경험, 존중받지 못한 기억, 반복되는 배신 등 이들은 사람의 공감 능력을 줄이고, 타인을 “위험”이나 “도구”로 보게 만들며, 결국 악한 행동을 선택하게 만든다. 악은 뿌리가 아니라 손상된 자아의 부산물에 가깝다. 선은 선택의 결과다. 선은 단순히 “착한 마음”에서 나오지 않는다. 선은 의식적인 선택이고, 그 선택은 흔히 원가가 든다.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리고 약자를 돕는 것은 시간, 에너지, 인내, 감정적 소비가 들어간다. 그래서 선은 의지가 필요하고, 인간은 그 의지를 통해 성장한다.


인간은 선하게 태어나지 않고, 악하게 태어나지도 않는다. 인간은 “양쪽의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태어나며, 어떤 방향을 선택하는지가 그 사람의 삶을 결정한다. 인간의 본성은 하나의 결론이 아니라, 갈등과 선택의 장이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선해질 수도, 약해질 수도, 이기적일 수도, 너그러울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어떤 본성을 타고났냐가 아니라, 어떤 본성을 기르고 싶은가이다. 갓 태어난 존재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정확히 말하면 도덕적 판단 능력이 없기 때문에 “선과 악”이라는 개념을 적용할 수 없다. 선과 악은 도덕적 판단, 의도, 책임성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신생아는 아직 의도 (Intent)가 없고 선택 (Choice)을 할 능력도 없으며,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인지할 능력도 없다. 즉 도덕성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가 아예 발달하지 않은 상태다. 신생아가 보이는 행동은 배고픔, 추위, 고통, 생존 욕구에 기반한 완전한 생물학적 반응이다. 이건 도덕이 아니라 신경시스템의 자동반응이다. 여기엔 “이기적이다 “혹은 “착하다” 같은 의미를 붙일 수 없다. 심리학적으로 인간의 도덕성, 그리고 선과 악의 기준은 시간이 지나며 관계 속에서 발달한다. 또한, “악”은 타고나는 것이 아닌, “환경+경험+선택”의 결과이다. 선과 악을 판단하는 “자아”는 절대적으로 선하지 않다.


1. 인간의 자아는 감정, 경험, 상처, 욕망에 영향을 받는다. 완전히 순수하거나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는 존재가 아니다.

2. 우리가 “선”이라고 판단하는 것도 결국 사회 문화가 만든 틀 중 하나다. 어떤 행동이 선하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타고난 절대선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문화에서 배운 감정적, 사회적 기준에 가깝다.

3. 인간의 자아는 타락도 하고 성장도 한다. 즉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주체조차 완성된 존재가 아니며, 계속 변화한다. 따라서 판단하는 자아가 절대적으로 선하다는 가정은 성립할 수 없다.


왜 불완전한 자아가 선과 악을 판단하는가?


1. 생존을 위해 판단이 필요하다

“이 행동은 위험하다 혹은 안전하다”를 구분하는 건 도덕 이전의 기능이었고, 생존 그 자체였다. “해를 끼치는 행동”은 생존 위협, “협력하는 행동”은 생존 이득. 이 선택구조가 시간이 흐르며 도덕적 판단이라는 복잡한 형태로 진화한 것이다.

2. 공동체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하다

도덕 판단이 없으면 사람은 타인을 예측할 수 없고, 신뢰가 깨지고, 공동체가 유지될 수 없다. 즉, 판단은 공동체적 안정성을 위해 형성된 심리적 장치다.

3.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

자아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기준이 있어야 유지된다. 도덕 판단은 자아가 자신을 규정하기 위한 기준점이다. 만약 판단을 하지 않는다면, 선과 악은 존재할 수 있을까? 결론은 존재할 수 없다. 이유는 단순하다. 선과 악은 자연에 존재하는 물리적 실체가 아니다. 태양, 무게, 속도처럼 객관적 속성이 아니다. 관찰자(자아)가 의미를 부여할 때 처음으로 존재한다. 판단이 없다면 “선과 악”은 그저 중립적 사건일 뿐이다. 타인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인간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비도덕적 존재”에 가깝다. 즉, 선과 악이 아니라 도덕이 성립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 선과 악은 관계적 개념이다. 도덕심리학과 철학의 핵심 전제는 다음과 같다.


“선(善)”은 타인에게 이로운 행동

“악(惡)”은 타인에게 해로운 행동


이처럼 선과 악은 관계적 의미를 갖는다. 타인이 없으면 “해를 끼치기도” “도움을 주기도” 할 대상이 없다. 즉, 타인이 없는 세계에서는 선행도 악행도, 책임도 죄도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절대적 기준인 신과 상대적 타인의 기준이 없는 인간은 선악 이전의 존재이며, 본능적 이전의 원형적 자아만 남는다. 도덕은 없지만 감정은 있고, 판단은 없지만 충동은 있으며, 선과 악은 없지만 선택 가능성은 남는다. 인간은 선과 악이라는 도덕적 스펙트럼 속에서 매 순간 선택한다. 이러한 선택과 책임의 반복 속에서 삶은 의미를 얻고, 결국 인간이 사람 답게 사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렇다면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의 한계는 이러한 선택과 어떻게 맞물리는가?


죽음이란 누군가에겐 모든 것을 빼앗는 공포이고, 누군가에겐 더 이상 버티지 않아도 되는 해방의 시작이다. 이러한 죽음은 인간을 유한한 존재로 규정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시간의 의미와 선택의 무게 그리고 후회의 개념을 인식할 수 있다. 죽음은 가치의 기준을 만들어 준다. 무한한 시간 속에선 모든 것이 대체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이 있기에 정해진 시간과 기회 속에서 우리는 중요함과 사소함을 구분할 수 있다. 죽음이 새로운 시작인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죽음이 삶을 다시 시작하게 만드는 질문이라는 것이다. 윤회나 영생 같은 관점에서 죽음은 심판의 순간이다. 이는 더 완전한 존재 상태로의 이행이며 삶의 윤리를 지탱하는 서사가 된다. 누군가에겐 완전한 끝인 죽음의 개념은 어떤 보상도 약속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책임은 무거워지고 선택은 신중해진다. 우리는 죽음 이후의 인식을 직접 경험할 수 없기에, 역설적으로 죽음을 통해서만 삶 전체를 하나의 서사로 인식한다. 시작과 끝이 명확해질 때 현재의 위치가 드러나고, 현재의 선택은 방향성을 얻는다. 죽음을 인식하는 순간, 삶은 더 이상 무한히 수정 가능한 초안이 아니다. 모든 선택은 되돌릴 수 없는 흔적이 되고, 그 흔적들은 모여 한 인간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인간은 죽음을 극복하는 존재가 아니라, 죽음을 전제로 살아가는 존재다.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죽음을 의식하는 동안 우리는 삶을 밀도 있게 만들 수 있다. 그 밀도는 성공이나 성취가 아니라, 스스로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들에 얼마나 충실했는가로 측정된다. 죽음은 새로운 시작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죽음이 인간에게 끝없이 묻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응답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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