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봄을 맞이하는 자세

'빼앗긴 삶에도 봄은 오는가'

by 작은콩


전편) 겨울을 맞이하는 자세











봄의 냄새를 아시나요?


엊그제 벌써 경칩(驚蟄)이 지났다고 합니다. 겨울잠을 자던 벌레와 개구리가 깨어 꿈틀거린다는 의미라지요. 코끝에 스치는 바람에서 '칼처럼 쨍하고 날카롭지만 깨끗 투명한' 냄새가 나던 겨울과 달리, 약간 '부드러운 흙 같은' 냄새가 나기 시작합니다. 겨울 공기가 투명하고 차가운 얼음을 닮았다면 봄 공기는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소풍을 닮았습니다. 봄과 겨울뿐만 아니라 여름과 가을도 각자의 냄새가 있습니다. 같은 햇볕도 색깔과 느낌이 다르고요. 신기하게도 매년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 냄새도 함께 옵니다. 그래서 눈으로 보지 않아도 이미 코로 계절을 느낍니다.



저는 봄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추운 겨울을 견뎌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불과 몇 주 전 어느 날만 해도 온 몸, 손끝까지 관절 통증이 심해 무엇 하나 쥐지 못했던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간을 참아냈으니까 지금 봄바람을 느낄 수 있잖아요. 전편 <겨울을 맞이하는 자세>에서 '봄이 올 거니까 겨울이 와도 견딜 수 있다'라고 적었듯이 결국 또 봄이 왔잖아요.

아니 사실은 꼭 견뎌낸 게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몸이 아파 누워있던 날 창 밖의 봄 풍경은 사실 그 자체로도 위로가 되었거든요. 그러니 제가 행복하든 불행하든 결국 봄은 위로와 위안의 계절인 겁니다.


하지만 2022년의 봄은 조금 다르게 느껴집니다. 따뜻한 햇볕은 어디든 공평하게 닿겠지만 닿는 곳이 모두 봄이 되지는 않나 봅니다. 아침마다 들려오는 안타까운 지구 반대편 소식에, 그리고 큰 산불로 고생하는 사람들 이야기에 너무 평화로운 제 주변 풍경이 이질적으로 느껴집니다. 얼마 전 몸이 좀 아팠던 날 몰래 속으로 '아 이렇게 아픈 날은 정말 살기 싫다' 생각했던 것을 후회했습니다. 지금의 평범한 순간이, 평화로움이 어제 누군가에겐 간절한 소원이었겠구나 싶었습니다.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은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떠오릅니다. (얼마 전이 3.1절이었지요?) 제 식대로 <빼앗긴 삶에도 봄이 오는가> 정도로 바꿔보고 싶습니다. 전쟁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빼앗긴 평화에도, 저처럼 병이든 어떤 자연재해든 불가항력적인 힘에 많은 것을 빼앗긴 삶에도, 끝내는 봄이 닿을까요? 복잡한 인간사야 상관할 바 아니라는 듯 무심히 똑같게 온 자연의 봄이 올해는 약간 매정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지금, 이 글 건너편에서 제 이야기를 듣고 계시는 당신의 삶에는 봄이 왔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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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 <작은콩의 류마티스 그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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