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의 편집 — 불편함을 자르지 않고 견디게 하기
고통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누구나 당장 불구가 될 수도, 더 나아가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막을 방법을 모른다. 강도가 들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언제 죽음이, 늙음이, 고통이 찾아올지 몰라 종종거릴 뿐이다. 불안해하고, 고통에 시달리는 것 밖에 할 수 없다면, 차라리 고통을 끌어안아버리는 것이 나을까.
늙음은 추레하고 힘겹다. 그것은 부와 명예, 사랑하는 배우자, 잘 큰 자식을 가졌다고 해서 다르지 않다. 죽음을 앞둔 이라면 모두 그렇게 된다. 몸뚱이는 굳어가고, 부끄러우며 수치스러운 날들의 연속이다. 내 곁의 사람을 보며 죄의식까지 느끼게 되는 늙음. 그것은 모두에게 찾아오는 운명이다.
한 줄 소개 :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늙음, 그것을 함께한 부부의 이야기
<아무르>는 답답할 만큼 컷의 길이가 길게 구성되어 있다. 보통의 영화라면 촬영하지도 않았을 장면들을 카메라는 계속해서 찍는다. 주로 원테이크로 구성된 씬들은 일상적인 장면이다. 정작 보여줄 것 같은 장면들은 과감히 자르고 넘긴다.
나이 듦이란 그런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매일이 새롭고 빠르게 흘러갔던 젊은 시절과는 다르게 늙어 갈수록 삶은 지난하다. 화장실에 가는 그 몇 걸음마저도 길어지고, 물 하나 삼키는 게 어려워 입 밖으로 흐른다. 영화는 그 모든 것들을 노인의 시선에 맞추듯 편집 없이 보여준다. 그 긴 씬들을 관객들은 견뎌야 한다. 조르주와 안느가 그 긴 투병을 견뎌냈던 것처럼.
영화 속 집은 조르주와 안느를 상징한다. 다소 오래되어 보이지만, 고풍스럽고 잘 정리된 집은 초반의 안느와 조르주를 연상시킨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기품 있는 부부였던 그들은 갑작스러운 병이란 이름의 강도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만다. 영화에서는 그것을 미리 언급한다(극초반, 강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부분). 또한 조르주의 악몽이나 계속해서 집 안으로 들어오는 비둘기는 조르주와 안느가 자신의 집(=조르주와 안느)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다는 연출로도 보인다.
조르주는 결국 안느를 죽이는 선택을 한다. 그것은 단순히 힘든 간병에 대한 종지부를 찍는 것이라기보다, 더 이상 안느가 아니게 되어버린 이를 보내주는 일에 가깝다. 영화의 중반, 안느가 앨범을 보며 하는 말 '인생은 아름다워, 인생은 길어'가 떠오르는 행위다. 안느와 조르주가 그동안 함께해 온 세월, 삶은 분명 아름답지만 늙고 병든 몸과 정신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삶은 그저 길기만 할 뿐이라는 것이다.
안느의 죽음 이후 조르주는 슬퍼하지 않는다. 담담하게 꽃을 사 와 안느의 장례식을 준비한다. 조르주가 갔던 장례식에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카트에 유골함을 태워 이동하거나, 예스터데이를 갑자기 튼다거나)을 미리 거절이라도 하듯 조르주는 그들이 그간 잠을 잤던 침대에 안느를 눕힌다. 조르주의 마지막은 보이지 않으나, 멀쩡한 모습의 안느를 따라 집 밖으로 나가는 씬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조르주 또한 죽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장례식 대신 안느를 집에 눕힌 것은 '죽음에 대한 예의'가 어떤 것인지 생각하게 한다. 장례식은 분명 산 자를 위한 것이기도 하나, 본질적으로는 죽은 자를 위한 것이다. 영화에서 조르주의 딸이 안느의 병간호를 두고 말을 얹는 장면과도 연결된다. 늙는다는 것, 죽음이라는 것은 그 본인만이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노인과 젊은이는 그 살아온 시간의 양 탓에 본질적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딸이 아픈 안느의 옆에서 부동산이니 주식이니 말하는 것, 라디오에서 노조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젊은 안느와 사람들에게 부동산이나 돈, 노조는 현재 중요한 가치다. 그러나 편마비가 와 몸 하나 가눌 수 없는 노인인 안느에게 중요하지 않다.
영화에서는 어쩌면 가장 이상적인 노인의 모습으로 그들을 그려냈다. 부유하고, 명예도 있으며, 잘 큰 자식도 있고 유망한 제자도 있다. 가장 서로를 아끼는 배우자도 있다. 그럼에도, 노화와 죽음은 고통스럽다. 아무리 움직이는 휠체어를 사고 간호사를 집으로 부른다고 해서 막을 수 없다. 그저 죽음이라는 끝이 찾아오기만을 버티며 기다리는 것뿐. 그 상황에서 조르주는 제 손으로 안느의 끝을 정했다. 안느의 정신이 돌아왔다면 분명 조르주에게 끝내고 싶다 했을 테니까. 그렇기에 조르주의 결정은 살인이라기보다 존엄을 지켜준 행위이고 그것은 사랑이란 이름으로도 읽힌다.
극도로 제한된 편집이나 카메라 무빙으로 인해 영화는 정적인 연극의 느낌을 준다. 마찬가지로 동명의 연극을 영화화 한 <더 파더>를 연상시킨다. <더 파더>에서는 치매로 환각, 환청을 겪는 노인의 이야기인데 <아무르>는 그 노인의 보호자의 시점과 같다. 두 영화 모두 노화로 인한 괴로움에 대한 주제를 표현하는데 영화를 보고 나면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는 점이 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죽는다. 죽음이란 건 그렇게도 흔한 일이다. 당장이라도 죽을 수 있음에도 우리는 남의 일인 마냥 태연하다. 내가 어렸을 때는 나 자신이 선택받은 인간이어서 병이나 죽음을 피해 갈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에 와서는, 그 모든 고통을 피하기보다 차라리 받아들이는 것만이 유일한 해탈의 길임을 느낀다.
고통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 조르주와 안느도 그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르주는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었다. 끝의 방식. 안느가 더 이상 안느가 아니게 되기 전에, 그들이 함께 잠들었던 침대에 눕히는 것. 그것이 조르주가 안느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이었다.
차라리 고통을 끌어안아버리는 것이 나을까. 영화는 그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다만 조르주의 선택을 보여줄 뿐이다.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의 끝을 어떻게 지켜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