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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원 Jul 26. 2024

사랑, 애틋함, 파란색은 모두 같은 이름이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

  

  


  누군가 말하기를, 사랑하는 것은 닮아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살아온 환경부터 성격, 말투, 외모까지 전부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함께하며 자신의 삶을 공유하며 닮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랑일 거라고. 무채색의 아델이 엠마를 만나 푸르게 물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영화의 시작은 아델이 지각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무채색의 옷을 입은 아델은 알 수 없는 표정이다. 그러나 막상 수업이 시작하자 아델의 눈은 빛난다. 그리고 이어지는 수업 내용은 앞으로 일어날 아델의 이야기를 암시하는 장면이기도 한다. 소설을 읽는 학생에게 ‘나는 여자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하는데, 이 부분에서 이 영화는 여자의 이야기며 여성 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감독의 의도가 담겨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업이 끝나고, 아델은 정말 길에서 소설의 내용처럼 엠마를 만난다. 이 장면에서 엠마가 등장하자 기묘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둘은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되지만 소설 속 주인공처럼 엠마를 떠나보낸다. 그렇게 엠마를 떠나보낸 아델은 얼떨결에 남자와 데이트도 하고 잠도 자게 되지만 남자와는 전혀 맞지 않고 아델은 지루함을 느끼고 이별을 고한다. 아델은 집으로 돌아와 초콜릿을 입에 넣고 씹으며 아이처럼 울기 시작한다. 이 장면에서 아델은 자기 자신의 기분이나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이 아주 원초적임을 알 수 있다. 아델이 음식을 먹는 장면이나 잠을 자는 장면은 아주 자주 등장하고 그 모습을 클로즈업이나 (게걸스럽게 먹는 장면을) 길게 보여줌으로써 드러낸다.


  후에 게이바에서 엠마를 만난 아델은 엠마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점차 가까워진다. 엠마를 만나고 난 뒤부터 아델은 파란색 옷을 자주 입기 시작하는데, 무채색 옷에서 무채색 옷 안에 파란색 옷을 입는다거나, 아예 파란색 옷을 입는 등 파란색이라는 색채가 자주 등장한다. 파란색은 엠마를 상징하기도 하나, 우울하고 이상한 색으로 동성애, 즉 퀴어를 상징하는 색이기도 하다. 그렇게 점점 엠마에게 스며드는 아델의 모습을 옷의 색이나 집 안의 소품의 색, 벽지의 색 등의 미장센으로 표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델은 엠마와 함께 살며 조금씩 바뀌게 된다. 먹지 않던 굴을 먹게 된다거나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함께하는 시간이 늘수록 둘의 너무나도 다른 삶 탓에 둘 사이에는 균열이 생기게 된다. 엠마는 아델이 글을 쓰며 자기실현을 하기를 원하지만 아델은 그러지 못한다. 아델을 당당하게 애인이라고 소개하는 엠마에 비해 아델은 엠마를 그저 친구라고 소개한다. 둘은 점점 삐걱거리기 시작하다 헤어지게 된다. 그러나 여느 퀴어 영화의 클리셰처럼 그들이 헤어진 이유는 동성애자여서가 아닌 보통의 연인들과 같은 이유였다. 이는 감독이 영화 전반에서 은연중에 강조했던 사실적이고 실제적인 영화처럼 보이는 데에 한 몫을 했다. 영화 초반에 소설을 읽는 수업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나 영화 내내 클로즈업 샷으로써 전개되고 핸드헬드로써 거칠고 사실적인 느낌을 주려고 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델은 푸른색 원피스를 입고 뒤돌아 걸어간다. 첫 장면의 무채색의 옷을 입고 걸어가던 아델과는 전혀 다르다. 엠마의 머리 색은 파란색에서 금색으로 바뀌었지만 아델은 엠마와 헤어지고 나서도 파란색 원피스를 입고 걸어간다. 이는 엠마는 아델을 지워버렸고 새롭게 나아가지만 아델은 엠마를 잊지 못했으며 잊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퀴어 영화에는 어떤 영화든 간에 새드엔딩으로 끝난다는 클리셰 아닌 클리셰가 존재했다. 일반적인 이성애가 아닌 동성애를 다룬 영화에서는 늘 그들의 사랑이 망가진 이유는 동성애 였기 때문으로 그려졌고 끝은 늘 파국이었다. 이 영화도 어떻게 본다면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둘의 헤어짐의 이유가 동성애였기 때문이 아닌 그저 다른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는 점 때문에 영화가 더 진실되게 다가왔다. 클로즈업이나 헨드헬드 기법, 사실적인 배우들의 연기로 완성된 사실적이고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아델과 엠마의 사랑은 나조차도 그들에게 물들게 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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