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견디게 하는 지독하고도 달콤한 거짓말
우리는 종종 삶의 한가운데에서 기묘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지금 겪고 있는 이 상황이, 혹은 이 감정이 마치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기분 말이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선명한 착각들이었다. 팬데믹이 정점에 달했을 때는 평생 마스크를 쓰며 살아야 할 것 같은 막막함에 갇혀 있었고, 미국에 머물던 시절의 나 역시 그곳의 풍경이 내 삶의 영원한 배경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세상 모든 일에는 정해진 시작과 필연적인 끝이 존재한다. 그런데 왜 우리 마음은 매번 이 당연한 진리를 망각하고 '영원'이라는 함정에 빠지는 것일까? 그 답은 우리 마음의 깊은 심리적 기제 안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우리 뇌의 효율적인 작동 방식 때문이다. 심리학에는 '투사 편향'이라는 개념이 있다. 미래를 상상할 때 현재의 감정과 상태를 그대로 미래로 투영하는 오류를 말한다. 배가 몹시 부를 때 다음 끼니의 배고픔을 상상하기 어렵듯, 현재의 강력한 상황은 미래를 판단하는 유일한 잣대가 되어버린다. 지금의 고통이 크면 미래도 고통의 연장선일 뿐이고, 지금의 안정이 견고하면 그 벽에 균열이 생길 리 없다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뇌에게 있어 '현재'는 미래를 그리는 가장 쉽고 강력한 밑그림인 셈이다.
사실 뇌는 몸무게의 2% 남짓한 무게로 전체 에너지의 20% 이상을 써버리는, 상당히 가성비가 떨어지는 기관이다. 공부를 많이 한 날 유독 배가 고프고 단것이 당기는 이유는 뇌가 그만큼 엄청난 에너지를 몰아 썼기 때문이다. 이런 에너지 과소비 기관인 뇌가 생존을 위해 선택한 전략이 바로 '예측의 생략'이다.
원시 시대의 인류는 늘 배고픔에 허덕였다. 팔 다리를 움직여서 먹을 것을 구하기도 어려워 인류가 적응한 방식은 뇌의 효율적 활용이다. 내 인생 전체에서 어떠한 점을 기준점으로 잡고 그 것 대비 좋다, 나쁘다를 판단하기에는 뇌가 기억해야할 정보량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매 순간 미래를 새롭게 설계하고 시뮬레이션하는 것은 뇌에게 너무나 고된 노동이다. 그래서 우리 뇌는 '현재의 상태가 미래에도 이어질 것'이라고 가정함으로써 계산의 수고를 덜어버린다. 즉, 우리가 빠지는 '영원할 것 같은 착각'은 사실 뇌가 생존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선택한 가장 효율적인 지름길이었던 셈이다.
생물학적으로 에너지를 아끼는 것이 뇌의 경제적 선택이라면, 심리적으로 영원을 꿈꾸는 것은 생존을 위한 '방어적 선택'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불확실성을 거부하도록 진화했다. 원시 시대 인류에게 '변화'는 곧 맹수의 등장이나 독초의 발견 같은 치명적인 위협이었기 때문이다. 내일이 오늘과 전혀 다를 것이라는 예감은 우리 뇌의 공포 회로를 자극하여 엄청난 심리적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역설이 발생한다. 인간은 '낯선 희망'보다 '익숙한 고통'을 차라리 더 안전하다고 느낀다. 혹시 그런 경험이 없는가?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하면 훨씬 더 잘될 것이라는 객관적인 지표가 눈앞에 수두룩해도, 왠지 모를 불안감에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원래 하던 방식을 고집했던 순간 말이다. 분명 이대로 가면 결과가 좋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익숙한 패배와 낡은 습관의 궤도 안에 머물 때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이는 우리 마음이 '예측 가능성'을 '안전함'과 혼동하기 때문이다. 내일 어떤 변화가 닥칠지 모른다는 불안에 떠느니, 차라리 고통스러운 오늘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고 믿어버리는 편이 뇌의 입장에서는 훨씬 통제하기 쉬운 상태가 된다. 비록 그 통제권이 고통 속에 있을지라도, '어떻게 전개될지 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가짜 위안을 주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빠지는 '영원할 것 같은 착각'은 거친 변화의 파도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마음이 스스로 친 부드러운 방어막이다. 지금의 괴로움이 마침표 없이 계속될 것이라는 믿음은, 역설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내일'이라는 더 큰 공포를 견디게 하는 심리적 완충 장치이자 가짜 안정감인 셈이다.
결국 우리가 영원할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발을 붙이고 살아가기 위해서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에서도 그것이 일상이라 믿어야 버틸 수 있고, 찬란한 순간이 영원할 것이라 믿어야 그 행복을 온전히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착각이 주는 안락함 속에서도 늘 한 줌의 깨어있음을 간직해야 한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풍경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 단지 인생이라는 거대한 영화 속 한 장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 즉, 나를 둘러싼 이 견고한 시스템이 영원한 진리가 아니라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가변적인 상태임을 인지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가 이 '영원할 것 같은 착각'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거리 두기'에 있다.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자각이 들 때, 비로소 우리는 고통의 틀 밖으로 걸어 나올 수 있다.
섬은 섬 바깥에서 가장 잘 보이는 법이다. 우리가 삶이라는 거대한 섬 안에서 파도와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는 그 섬의 모양도, 끝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너무 힘든 순간일수록 잠시 그 섬에서 나와 외부 관찰자의 시점으로 스스로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지난날의 고통스러웠던 시간들을 나중에 '그땐 그랬지' 하며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는 이유는, 시간이라는 물리적 거리가 우리를 그 시절이라는 틀에서 자연스럽게 끄집어내 주었기 때문이다. 즉, 시스템의 내부에서는 절대 볼 수 없던 전체의 형상을 시스템 밖으로 밀려나서야 비로소 온전히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 진리는 개인의 감정을 넘어 세상의 이치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영원히 공고할 것만 같은 사회 시스템도, 세상을 호령하는 강력한 권력자도 결국엔 그 자리에서 내려오게 마련이다. 역사 속 그 어떤 절대 권력도 시간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는 한 줌의 모래성에 불과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가 어깨를 짓누른다면 스스로에게 나지막이 읊조려 보자. 지금 내가 겪는 이 시스템도, 나를 억누르는 상황도 결코 영원한 철옹성이 아님을 말이다.
GD의 노래 '삐딱하게'에는 짧지만 강렬한 한 줄의 노랫말이 등장한다.
"영원한 건 절대 없어."
이 말은 때로 허무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를 가둔 견고한 프레임에서 해방시켜 주는 희망의 주문이 된다. 지금의 고통이 끝이 없을 것 같아 절망스러울 때, 혹은 지금의 권력이 영원할 것 같아 오만해질 때, 이 한 문장은 우리를 섬 바깥으로 끌어내어 차가운 '관찰자의 시선'을 회복하게 한다.
결국 우리가 영원할 것 같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현재를 아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의 전체 모습을 온전하게 조망하기 위해서다. 착각의 껍질을 깨고 나와 그 유한함을 직시할 때, 우리는 비로소 나를 억누르던 상황에 휘둘리지 않는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 섬 바깥으로 한 걸음 물러설 용기를 가질 때, 비로소 우리는 인생이라는 거대한 바다 위에 떠 있는 우리 삶의 섬이 얼마나 작고도 아름다운지 비로소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