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이 먼저 보여준 인공지능 이후 우리의 미래
장강명 작가의 '먼저 온 미래'를 읽었다. 무겁고 복잡한 이야기를 르포 형식으로 다루며 이만큼 읽기 좋게 쓸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장강명의 문체는 무심한 듯 시크하고, 그러면서 다정하다. 힘을 주고 쓰는 문장이 아니라 옆에서 이야기해 주는 것 같은 느낌. 그게 좋아서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 '책, 이게 뭐라고' 같은 책도 찾아 읽었다. AI 이야기를 하다가 소설가의 에세이까지 읽게 될 줄은 몰랐는데, 좋은 글은 그렇다. 장르를 넘어서 사람을 데려간다.
2016년 3월 9일, 서울 포시즌스 호텔. 이세돌 9단이 구글 딥마인드의 알파고와 첫 대국에서 패배했다. 일반인에게는 신기한 뉴스였을지 모르지만 바둑인들에게는 일생일대의 사건이었다. 책에 따르면 당시 대국을 지켜본 프로기사들 중 상당수가 잠을 못 자거나 밥을 못 먹었고, 내내 술을 마셨다고 한다. 5번기 결과는 알파고의 4승 1패. 수천 년 쌓아온 인간 바둑의 질서가 며칠 만에 흔들렸다.
장강명은 이 사건 이후 바둑계에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추적한다. 전현직 프로기사들과 바둑 전문가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한 르포르타주. 인공지능 이후 미래는 어떨까. 가장 먼저 인공지능의 파도가 덮친 바둑계의 변화를 통해 다른 업계의 앞날 또한 대비해 보겠다는 기획이었다.
바둑에는 오래된 질문이 하나 있다. 바둑은 예술인가, 스포츠인가. AI 이전에 이건 그냥 취향의 문제였다. 이세돌류의 공격적인 바둑, 이창호류의 견고한 바둑. 같은 국면에서도 누가 두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그림이 나왔다. 기사마다 기풍이 있었고, 그 개성이 바둑을 예술이라 부를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알파고 이후 이 질문의 의미가 달라졌다. 이제는 AI가 찍어주는 블루스팟, 즉 최적의 수를 따라가는 것이 바둑의 일상이다. 인간이 쌓아온 기보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인간이 이해하기도 어려운 절예 같은 인공지능이 제시하는 답을 참고하며 두는 바둑. 수천 년간 쌓아온 인간의 정석은 오답이 되었고, AI의 바둑이 정답이 된 세상에서, 그것을 예술이라 부르기는 좀 어렵다. 이세돌 본인도 2019년 은퇴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바둑을 예술로 배웠는데, 이제는 AI 때문에 정답만을 찾는 계산의 영역이 됐다고.
반면 스포츠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골 때리는 그녀들'의 시청률과 현재 여자 프로 축구의 시청률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는데, 사람들은 꼭 최고 수준의 경기만 보는 게 아니다. 거기에 스토리가 있으면 본다. 프로기사들도 바둑을 스토리로 기억한다. 여기서 상대가 당황했고, 이 수로 흐름이 바뀌었고, 여기서 기세를 잡았다. 그런 서사가 있는 한 인간의 바둑은 볼 만하다.
문제는 그 서사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다. 최정상은 어떻게든 빛나고, 취미로 즐기는 아마추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가장 크게 흔들린 건 그 사이의 중간 부류였다. 예전에는 프로라는 타이틀만으로 한 수 두어주고 봐주는 것만으로도 존중받고 수입이 됐는데, 스마트폰 하나면 프로급 분석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되자 그게 다 사라졌다. 초양극화라는 말이 바둑계에서는 이미 일어난 일이다.
일자리가 사라지면 기본소득을 주면 되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장강명은 여기서 도스토옙스키를 끌어온다. 시베리아 유형 생활을 바탕으로 쓴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화자는 사람을 가장 깊이 파괴하는 건 매질이나 배고픔이 아니라, 아무런 의미 없는 일을 끝없이 반복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일이 어떤 결과도 만들지 않고,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고, 본인도 그걸 안다면, 사람은 그냥 힘든 게 아니라 자기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된다. 고통은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쓸모없다는 감각은 안쪽부터 사람을 무너뜨린다. 바둑 기사들이 겪은 것도 비슷하다. 수입보다 먼저 무너진 건 의미였다. 평생 갈고닦은 것이 하루아침에 쓸모없어지는 경험은 돈으로 메울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반전이 하나 있다. 최근 신진서 9단과 알파고 리의 재대결이 추진 중이라고 한다. 최신 AI가 아니라 2016년 당시 버전의 알파고를 상대로, 인간이 지난 10년간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직접 확인하겠다는 것이다. 현존 최강 AI인 절예나 알파고 제로는 인간이 이길 수 없는 수준이지만, 신진서는 고레이팅 기준으로 2016년의 알파고 리를 이미 넘어섰다. 이세돌 본인도 신진서가 이길 확률이 매우 높다고 했다. 알파고 리의 약점은 드러났고, 인간은 AI를 보며 10년간 공부해 왔지만 알파고 리는 그걸 모르니까.
그리고 오늘, 2026년 3월 9일. 정확히 10년이 지난 같은 날, 같은 장소인 포시즌스 호텔에 이세돌이 다시 섰다. 이번에는 AI와 대결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AI 에이전트와 협업해서 AI 바둑 기사를 만들고 시범 대국을 두는 자리였다. 이세돌이 말 몇 마디를 하자 AI 에이전트가 30분 만에 바둑 기사를 만들어냈다. 범용 AI가 뚝딱 만들어낸 바둑 기사와 시범 대국을 시작한 이세돌은 몇 수 두지 않아 웃으며 항복했다. 체감상 10년 전 알파고보다 훨씬 뛰어난 수준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AI는 승부나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더 큰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게 돕는 도구로 정의돼야 한다고.
10년 전에는 AI 앞에서 절망했던 사람이, 10년 후에는 AI와 함께 웃으며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 대결에서 협업으로. 바둑판이 또 한 번 먼저 보여주고 있는 풍경이다. 이 풍경이 곧 우리 모두의 것이 된다면, 우리는 거기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바꿀 것인가.
솔직히 나도 답은 모른다. 다만 이 책을 읽고 나서 달라진 게 하나 있다면, 그 질문을 품게 됐다는 것이다. AI가 모든 것을 더 잘하게 될 세상에서 인간으로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 내가 하는 일의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 건지. 대단한 답을 찾은 건 아니고, 바둑 기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마 우리도 각자의 자리에서 계속 질문을 던지면서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