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양면

미국의 석유 재벌, 존 데이비슨 록펠러

by 성효경

1916년, 록펠러는 인류 역사상 첫 번째 억만장자에 등극한 사람이다. 뉴욕 미드타운 한복판에는 아직도 그의 이름이 박힌 빌딩이 서 있다. 론 체르노우가 쓴 록펠러의 전기 『타이탄』에 보면 록펠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지켜볼 수 있는 대목들이 있다. 스탠더드 오일 이사회에서 그는 회의 테이블의 상석에 앉지 않고, 자기와 가장 갈등이 심한 이사에게 상석을 넘기고 동료들 사이에 섞어 앉았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전부 들은 뒤에야 자기 생각을 이야기했고, 그때도 지시가 아니라 질문이나 제안의 형식을 따랐다. 모든 사안은 만장일치로 처리했다. 하지만 그 만장일치를 만들기 위해 회의 전에 혼자 며칠을 준비했다.

체르노우에 따르면 이 침착함은 기질이 아니라 훈련된 전략이었다. 록펠러는 젊은 시절에는 화를 참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스스로 감정을 제어하는 훈련을 거듭했고, 성인이 된 뒤에는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주변이 동요할수록 그는 더 차분해졌다고 한다. 그는 밤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어머니에게 배운 잠언으로 자신을 다스렸다. 그가 가장 아끼는 격언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성공은 귀를 열고 입을 닫는 데서 온다"라는 말들이었다. 이 사람의 무기는 속도가 아니라 침묵이었다.


John D. Rockefeller (Image created by Gemini.)


이 침묵이 무기가 된 대표적인 사건이 1872년의 '클리블랜드 학살' 사건이다.

스탠더드 오일은 자본금 100만 달러로 1870년에 설립되었다. 록펠러는 회사를 세우고 먼저 2년 동안 뉴욕 수송 계약을 정리하고, 운영을 간소화하여 이익을 쌓아 나갔다. 회사 설립 후 1년 만인 1871년, 확장 중인 회사로서는 이례적으로 주주들에게 40퍼센트 배당을 결정한다. 성장에 재투자해도 모자랄 현금을 주주들에게 돌려준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은행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 대부분의 은행은 정유 회사에 돈을 빌려주지 않으려 했다. 정유소 폭발 사고, 유가 폭락, 운송업자 파업 등과 같이 리스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탠더드 오일의 40% 배당은 이 회사가 다르다는 증거 그 자체였다. 이때부터 진짜 돈을 가진 은행가들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록펠러가 2년 동안 조용히 내실을 다지고 있을 때, 바깥에서는 전혀 다른 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1871년 말, 펜실베이니아 철도 사장 톰 스콧이 비밀 카르텔을 만들었다. '사우스 임프루브먼트 컴퍼니(South Improvement Company)'라는 이름이었다. 3대 철도사 (펜실베이니아, 이리, 뉴욕 센트럴) 와 대형 정유사들이 비밀 동맹을 맺은 것이다. 구조는 이랬다. 철도가 운송비를 대폭 인상하되, 동맹에 참여한 대형 정유사에게만 리베이트를 돌려준다. 동맹 바깥의 정유업자는 두 배 가까운 운송비를 내야 하니, 사실상 사업을 접어야 하는 구조다. 록펠러는 이 동맹의 핵심 멤버였다.

이 비밀이 새어 나갔다. 1872년 2월 말, 석유 산지인 펜실베이니아 오일 크리크에서 새 운송비 체계가 조기 공개되면서 폭동이 일어났다. 타이터스빌 오페라 하우스에 3,000명이 모여 스탠더드 오일과 펜실베이니아 철도를 규탄했다. 스탠더드 오일 간판에는 해골과 뼈가 그려졌고, 블랙리스트가 매일 아침 신문 1면에 실렸다. 협박 편지와 살해 위협이 록펠러의 사무실로 쏟아졌다. 석유 생산자들은 보이콧을 선언하고 30일간 시추를 중단했다. 결국 1872년 4월, 펜실베이니아 주의회가 사우스 임프루브먼트 컴퍼니의 법인 인가를 취소했다. 카르텔은 단 한 배럴의 석유도 운송하지 못한 채 무산됐다.

여기까지만 보면 록펠러의 패배다. 그런데 이 사람의 진짜 수는 카르텔이 아니었다. 사우스 임프루브먼트 컴퍼니가 무산되든 말든, 록펠러에게는 이미 다른 계획이 있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 스탠더드 오일 사람들은 사우스 임프루브먼트 컴퍼니를 만든 게 아니다. 우리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큰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다만 이용할 수 있는 데까지 이용하되, 실패하면 '자, 이제 우리 계획을 시도해봅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서려 했을 뿐이다."

그의 '진짜 계획'은 대중과 업계가 사우스 임프루브먼트 컴퍼니 스캔들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실행됐다. 록펠러는 클리블랜드의 경쟁 정유업자들을 한 사람씩 찾아가 세 가지를 말했다. 첫째, 정유업은 과잉 경쟁으로 대부분의 업자가 적자다. 클리블랜드의 정유 능력은 실제 원유 생산량의 세 배에 달했고, 1870년 기준 정유업자의 90%가 적자였다. 둘째, 스탠더드 오일은 철도와의 운송비 협상력에서 다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 사우스 임프루브먼트 컴퍼니가 무산되더라도 또 다른 시도가 있을 것이다. 셋째, 지금 팔면 스탠더드 오일 주식이나 적정 현금을 받을 수 있지만, 나중에는 그마저도 없다.

여기에 보이지 않는 포위망이 하나 더 있었다. 독립 정유업자가 버텨보려고 은행에 대출을 받으러 가면, 클리블랜드의 주요 은행들이 이미 스탠더드 오일 편이었다. 록펠러가 주요 은행가들에게 미리 스탠더드 오일 주식을 사게 해놓았기 때문이다. 은행의 이해관계가 스탠더드 오일과 묶여 있으니, 경쟁 정유업자에게 돈을 빌려줄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팔아도 록펠러, 안 팔아도 록펠러인 구조. 정유업자 존 알렉산더의 증언이 체르노우의 책에 나온다. "사우스 임프루브먼트 컴퍼니에 들어가지 않으면 정유업자로서 사실상 죽는다는 압박이 있었다. 팔지 않으면 짓밟히겠다는 말이었다." 록펠러 본인도 경쟁자에게 이렇게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철도와 결합했다. 클리블랜드의 모든 정유소를 사들일 것이다. 모두에게 참여 기회를 주겠다. 거부하는 자는 짓밟힐 것이다. 우리에게 팔지 않으면 당신의 재산은 가치가 없어질 것이다."


1872년 2월 17일부터 3월 28일까지, 6주. 록펠러는 26곳 중 22곳을 인수했다. 어떤 주에는 이틀에 6곳을 인수하는 기염을 토했다. 대부분의 정유소가 적자 운영 중이었기 때문에 상당수를 장부가 이하에 사들였고, 일부는 거의 고철값 수준이었다. 체르노우에 따르면 경쟁사 존 알렉산더는 액면가의 10분의 1에 매각을 제안하기도 했다. 매입 협상에서 록펠러는 두 가지를 제시했다. 스탠더드 오일 주식으로 받을 것인가, 현금으로 받을 것인가. 주식을 선택한 사람들은 나중에 부자가 됐고, 현금을 선택한 사람들은 그걸로 끝이었다. 체르노우에 따르면 "공포에 팔아넘긴 사람이 클리블랜드에 20명 가까이 있으며, 그중 누구에게 물어봐도 같은 이야기를 할 것"이라는 증언이 남아 있다.

역사가들이 이것을 '클리블랜드 학살'이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형식은 M&A였다. 하지만 실질은 철도 카르텔의 위협, 은행 봉쇄, "팔지 않으면 가치가 사라진다"는 압박 속에서 이루어진 강제적 매각에 가까웠다. 록펠러 자신은 이것을 "무질서한 업계에 질서를 부여한 것"이라고 봤다. 경쟁자들은 이것을 학살이라고 불렀다. 두 가지 모두 사실이었다.

이듬해인 1873년에는 공황이 터졌다. 뉴욕 증권거래소가 사상 최초로 문을 닫았고, 철도 회사의 3분의 1이 파산했다. 대규모 실업이 시작됐다. 록펠러는 이 와중에도 같은 패턴을 반복했다. 아무도 사지 않을 때 샀다. 경쟁자들이 공포에 매물을 내놓으면, 그는 공포의 가격에 인수했다. 1879년이 되면 스탠더드 오일은 미국 석유 정제량의 90퍼센트를 장악하게 된다. 클리블랜드에서 피츠버그, 필라델피아, 뉴욕으로 — 도시 하나씩 같은 방법으로 먹어 들어간 결과다. 자체 탱크카, 선박, 부두, 통 제작 공장, 창고까지 갖추게 된다.

체르노우는 이 시기의 록펠러를 묘사하며 한 가지 장면을 들고 있다. 1870년대 초, 록펠러가 뉴욕의 등유 캔 공장을 시찰하다가 캔 뚜껑에 땜납을 얼마나 쓰는지 물었다. "40방울입니다." "38방울로 해본 적 있나?" 38방울에서는 일부가 샜다. 39방울에서는 하나도 새지 않았다. 39방울이 스탠더드 오일 전 공장의 새 기준이 됐다.

2년을 준비하고 6주 만에 실행한 클리블랜드 학살. 공황 속에서 남들이 파는 것을 산 1873년. 땜납 한 방울까지 쥐어짠 효율. 이 모든 것의 바탕에는 같은 원리가 있다. 남의 속도에 맞추지 않는다는 것, 남의 질문이 아니라 자기 질문을 유지한다는 것, 충분히 준비한 뒤에 그때서야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원리가 그를 무너뜨린 사건이 있다.

1902년 11월, 기자 아이다 타벨이 맥클루어 매거진에 스탠더드 오일 폭로 기사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타벨은 펜실베이니아 석유 산지에서 자란 여성이었다. 아버지가 석유 저장 탱크를 만들고 직접 정유업에도 뛰어들었는데, 록펠러의 사업 관행 — 철도 리베이트, 경쟁사 압박, 가격 덤핑 — 에 피해를 입었다. 타벨은 그 기억을 30년 동안 품고 있었다고 한다. 맥클루어 편집장이 진보 시대의 반독점 분위기를 타고 트러스트를 파헤치겠다고 제안했을 때, 타벨에게 이것은 기사가 아니라 인생의 과제였다.

2년 가까이 법원 기록, 연방 보고서, 신문 기사를 파고들었다. 수십만 건의 서류에서 록펠러의 사업 수법을 추출하여, 일반 독자도 따라올 수 있는 서사로 재구성한 것이다. 연재는 19회까지 이어졌고, 매거진 부수는 37만 5천 부까지 치솟았다. 당시 기준으로 150만 부 이상의 영향력이었다. 타벨의 결론은 파괴적이었다. "록펠러 씨는 체계적으로 눈속임 주사위를 굴려왔으며, 1872년 이후 경쟁자와 공정하게 출발선에 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에 대한 록펠러의 대응은 침묵이었다.

지인이 타벨의 주장에 반박하겠다고 나서자 그는 이렇게 막았다. "한마디도 하지 마. 그 길 잃은 여자에 대해 한마디도." 그는 타벨을 "미스 타르 배럴"이라고 비꼬며 무시했다. 나중에 조금 더 신중하게 이야기한 대목이 있다. "맥클루어 기사에 대한 반박을 내볼까 생각했지만, 스탠더드의 방침은 늘 공격에 침묵하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사업에서 통했던 원칙을 여론전에도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남의 속도에 맞추지 않는다. 남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자기 페이스를 유지한다.

그러나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19세기의 미국은 엘리트가 지배하는 사회였고, 대중 매체는 약했고, 기업이 여론을 신경 쓸 필요가 별로 없었다. 20세기 초의 미국은 달랐다. 대중 잡지가 급성장하고, 진보 운동이 불붙고, 여론이 정치를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록펠러가 침묵을 지키는 동안,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타벨의 기사를 읽고 있었다. 대통령 재임 중에도 하루 한 권, 많을 때는 서너 권씩 읽어치우는 다독가였다. 타벨에게 팬레터까지 보냈다. 단순한 독서 감상이 아니었다. 루스벨트는 개인적으로 록펠러를 좋아하지 않았고, 스탠더드 오일을 자기가 깨부수고 싶은 독점의 전형으로 봤다. 타벨의 기사는 반독점 정책에 대중적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완벽한 탄약이었다. 루스벨트는 사회 비평서를 읽고, 저자와 친분을 맺고, 그것을 정책에 반영하는 대통령이었다. 업턴 싱클레어의 소설 『정글』을 읽고 육류 검사법을 밀어붙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루스벨트는 팬레터로 끝내지 않았다. 1903년에 기업 관행을 감시하는 기업국(Bureau of Corporations)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이 과정에서 록펠러를 "샌드백"으로 이용했다는 평가가 있다. 1905년에는 스탠더드 오일에 대한 공식 조사를 명령했고, 1906년에는 법무부가 셔먼 반독점법 위반으로 스탠더드 오일을 제소했다. 40년간의 사업 관행을 정리한 12,000페이지 분량의 기소장이었다. 1908년 퇴임을 앞두고 루스벨트는 록펠러를 "가장 위험한 범죄 계급의 일원 — 거대한 부의 범죄자"라고 공개적으로 불렀다.


록펠러에게 타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재정적 타격은 없었지만, 개인적 타격은 컸다. 타벨은 록펠러를 '살아 있는 미라', '혐오스럽고 병든 파충류적 인물'이라고 묘사했다. 록펠러가 점점 비판받으면서 언론과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됐는데, 대중은 이 침묵을 유죄의 증거이자 타벨 주장의 확인으로 받아들였다. 가장 구체적인 타격은 가족에게 갔다. 록펠러의 아내 세티는 타벨의 가혹한 기사로 인한 스트레스 속에서 뇌졸중을 겪었고, 이후 회복하지 못한 채 1915년에 세상을 떠났다. 체르노우에 따르면, 타벨의 연재에는 실제로 사실관계 오류가 몇 가지 있었고, 록펠러에게 PR 담당자가 있었다면 타벨의 명성에 상당한 타격을 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록펠러는 3년 동안 단 한 번도 반박하지 않았다.

스탠더드 오일이 적극적 홍보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05년이다. 타벨의 연재가 시작된 지 3년이 지나서였다. 전담 홍보 담당자를 고용한 것은 1906년. 20세기 중반의 기업이었다면 믿기 어려운 속도지만, 당시의 기업인들은 대중의 시선을 관리한다는 발상 자체가 없던 세대였다. 그렇다 해도, 3년은 너무 길었다. 1911년, 대법원은 스탠더드 오일 해체를 명령한다. 34개 회사로 분할. 이 회사들 중 일부가 오늘의 엑슨모빌이고 셰브론이다.

해체 판결 소식이 록펠러에게 전해진 것은 골프장에서였다. 함께 라운드하던 가톨릭 신부에게 그는 물었다. "레넌 신부, 돈 좀 있으십니까?" 신부가 고개를 저으며 이유를 묻자, 록펠러가 답했다. "스탠더드 오일을 사시오." 72세의 이 노인은 맞았다. 해체 이후 34개 자회사의 주가가 폭등하면서, 록펠러의 순자산은 3억 달러에서 9억 달러로 뛰었다. 그래서 그가 "역사상 첫 번째 억만장자"가 된 것이다. 해체 판결이 없었으면, 이 타이틀은 다른 사람에게 갔을 것이다.

이 결말에는 묘한 대칭이 있다. 타벨의 기사가 여론을 움직이고, 여론이 루스벨트를 움직이고, 루스벨트가 법무부를 움직여서 스탠더드 오일이 해체됐다. 그런데 그 해체가 록펠러를 더 부자로 만들었다. 침묵이 제국의 해체를 불렀지만, 해체가 더 큰 부를 낳은 것이다. 사업적 판단에서 록펠러는 끝까지 옳았다. 스탠더드 오일 주식을 계속 쥐고 있으라는 판단, 해체 직후 "사시오"라고 말한 판단 — 이것은 투자자의 촉이다. 그러나 여론전에서는 완패했다. 같은 침묵이 투자에서는 신중함이었고, 대응에서는 오만이었다.




록펠러를 어떻게 봐야 할까? 당대에 그는 '도적 남작'의 대명사였다. 철도 카르텔, 은행 봉쇄, "팔지 않으면 짓밟힌다"는 협박 — 이런 수법으로 제국을 쌓은 사람이다. 체르노우는 스탠더드 오일에 대해 이런 평가를 인용한다. "자유 시장은 완전히 제 멋대로 방치되면 끔찍하게 자유롭지 않게 될 수 있다는, 중요하지만 역설적인 교훈을 미국 국민에게 가르쳤다." 만년의 록펠러는 재산의 절반 이상을 사회에 돌려줬다. 생전 기부액이 5억 달러를 넘는다. 시카고대학교, 록펠러 의학연구소, 흑인 교육기관 스펠만 칼리지, 미국 남부의 구충 퇴치 사업. 이 목록은 인상적이다. 그런데 이 기부에는 맥락이 있다. 타벨의 기사 이후 록펠러는 미국에서 가장 증오받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재산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동안 이미지는 바닥을 치고 있었다.

이때 프레데릭 게이츠 목사가 나타나 록펠러의 재산을 체계적 자선 사업으로 설계했다. 록펠러 이름을 딴 재단과 연구소를 세우고, '석유 독점의 악당'을 '자비로운 자선사업가'로 재포장하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록펠러를 증오하던 세대가 하나 둘 세상을 떠나면서, 새로운 세대에게 그는 존경받는 인물로 자리 잡았다. 97세까지 살았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사업 자체를 놓고도 양면이 있긴 하다. 스탠더드 오일 시절 등유 가격은 갤런당 23.5센트에서 7.5센트로 떨어졌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록펠러 덕분에 등유가 싸졌다. 경쟁자 입장에서는 그 과정에서 짓밟혔다. 체르노우의 한 줄 요약은 이렇다. "그의 좋은 면은 그의 나쁜 면만큼이나 좋았다. 역사가 이토록 모순적인 인물을 만들어낸 적은 드물다." 멋진 문장이지만, 클리블랜드 학살과 타벨 사건을 지나온 뒤에 읽으면 — 좋은 면이 나쁜 면을 지워주지는 않는다는 것도 동시에 읽힌다.


록펠러가 평생 연마한 것은 하나였다. 남의 속도에 반응하지 않는 힘. 남의 공포에 동조하지 않는 힘. 자기 질문을 유지하는 힘. 이 근육이 1872년에는 클리블랜드를 삼켰고, 1873년에는 공황을 먹었고, 땜납 한 방울까지 쥐어짜는 효율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 근육에는 한 가지가 빠져 있었다. 상대가 바뀌었을 때 도구를 바꾸는 능력이다. 경쟁자에게 통하던 침묵이 기자에게도 통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 이사회에서 통하던 페이스가 대중 앞에서도 통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 — 이것이 그의 유일한 오판이었다. 그리고 이 오판의 뿌리는 정확히 그의 가장 큰 강점과 같은 곳에 있다.

침묵은 도구다. 록펠러는 이 도구를 역사상 누구보다 잘 썼다. 다만, 모든 도구가 그렇듯, 문제의 종류가 바뀌면 도구도 바꿔야 한다. 39방울의 땜납으로 캔을 밀봉할 수는 있지만, 37만 5천 부의 잡지를 밀봉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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