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그게 글쓰기다
구글 스콜라에 들어가서 확인해 보면 지금까지 논문을 100편 넘게 썼다. 은퇴하기 전까지 300편 쓰는게 목표라 은퇴가 25년 정도 남았고, 10년 동안 100편 정도 썼으니 계획대로 순항 중인 셈이다.
예전엔 논문 한 편 한 편 쓰면서 영어 문장 쓰는 데 공을 많이 들였다. 좋은 논문들 찾아서 읽고 거기에서 좋은 표현들이 있으면 발췌해두고, 내 논문에는 paraphrasing 해서 인용하고. Paraphrasing 잘 하기 위해서 수동태를 능동태로 바꾸고, 도치구조도 활용하고, 유의어 사전 켜두고 단어도 바꿔보고. 시간을 참 많이 들였던 것 같다. 그러다 좋은 논문들 읽으면서 나는 왜 저렇게 쓰지 못 하는지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고 매일 꾸준히 논문을 써 내려갔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는 것을 좋아하는데, 너무 영어가 써지지 않을 때 국립중앙박물관에 갔다. 주먹도끼 설명이 왼쪽에 한글로 되어 있고, 오른쪽에는 영어로 되어 있는데 그 설명들을 모두 하나하나 다 읽으면서 어떤 새로운 영어 표현이 있는지 봤다. 보통 유물들을 보러 가는 박물관에 나는 텍스트를 보러 갔던 셈이다. 물론 효율만 따지면 그 시간에 영어로 된 원서들을 더 보는게 바람직했겠지만 지친 나에게 주는 작은 선물이었다. 그 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LLM의 발전으로 인해 가장 달라진 점이 논문 작성, 다시 말하면 영작에 드는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었다. 예전에 사전 찾고 했던 일들이 지금은 내가 원하는 문장들을 여러 개 보여주고 선택할 수 있게 해 주니까.
그러면 그 줄어든 시간에 무엇을 하게 되었는가. 글쓰기였다. 방향만 바꿨을 뿐 논문 쓸 때 글 쓰던 역량을 다른 곳에 쏟기 시작했다. 하지만 막상 쓰려고 하다 보니 글 쓰기가 쉽지 않았다. 나의 내면을 더 채워넣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지성의 '일독'을 읽고 나서 하루에 한 권은 아니라도 많이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다행인건 책 사는데 드는 돈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2만원 정도에 엄청난 양의 지혜와 지식을 한 번에 습득할 수 있는 가장 저렴한 수단이 독서다.
닥치는대로 책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E-book 하나 사고 밀리의 서재 가입해서 쭉쭉 읽어내려갔다. 제일 처음엔 게리 켈러의 ‘원씽’, 제임스 클리어의 ‘아주 작은 습관의 힘’, 모건 하우절의 ‘불변의 법칙’, 엔절라 더크워스의 ‘그릿’ 과 같은 자기 계발 서적들을 많이 읽었고, 그 이후엔 투자 및 재테크와 관련된 앙드레 코스톨라니의 '돈, 뜨겁게 사랑하고 차갑게 다루어라', 김승호의 ‘돈의 속성’, 우석의 ‘부의 인문학’ 같은 책들을 탐독했으며, 최근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 ‘눈먼 시계공’,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넥서스’ 같은 벽돌책들과 함께 독서토론회를 하며 톰 치버스의 ‘모든 것은 예측 가능하다’, 액설로드의 ‘협력의 진화’, 장강명의 ‘먼저온 미래’ 와 같은 책들을 읽었다. 책을 읽을 때 가슴을 딱 때리는 문장들은 하이라이트 해 두거나 메모해두었고 책을 다 읽으면 항상 간단하게라도 독후감을 썼다.
그렇게 조금씩 메모하며 글을 쓰다보니 내 생각을 조금 더 전개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처음에 티스토리에 글을 하나씩 써 보긴 했는데 보는 사람도 거의 없고 일기 같이 쓸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다가 밀리로드에 책도 연재해 보고 지금은 책도 내고 브런치에 글도 쓰고.
글을 쓰면서 자유함을 느꼈다. 논문의 글쓰기는 정형화되어 있다. 주제를 정하고, 가설을 세우고, 실험하고, 결과에 따라 쓴다. 서론-실험방법-실험결과-고찰-결론, 이 5단계 구조 안에서 저자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부분은 서론과 고찰 정도인데, 그마저도 형식이 있다. 서론 첫 단락은 왜 중요한지, 둘째 단락은 지금까지 뭘 해왔는지, 셋째는 그래서 이번 연구의 목적은 뭔지, 넷째는 어떻게 해결했는지. 칸이 정해져 있고, 그 칸 안에서만 쓸 수 있다.
실험 데이터를 들여다보고, 왜 이 결과가 나왔는지 고찰하고, 영어로 한 문장 한 문장 쌓아가는 그 과정이 싫지 않다.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논문에서는 데이터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말할 수 있다. 내가 아무리 이 현상이 흥미롭다고 느껴도 통계적으로 유의하지 않으면 한 줄도 못 쓴다. 결론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 데이터가 정한다. 리뷰어가 "이 해석은 과하다"고 하면 깎아내야 하고, "추가 실험이 필요하다"고 하면 몇 달을 더 기다려야 한다.
글쓰기는 다르다. 오늘 먹은 봄동 비빔밥에 대해 써도 되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본 부식 작품에 재료공학을 대입해도 되고, 양재천을 걸으며 생각나는 내용에 대해 써도 된다. 주제를 고르는 것도 나, 어디서 시작할지도 나, 어디서 끝낼지도 나. 어떤 주제건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다 쓸 수 있다는 것 — 이 무한한 자유가 주는 쾌감은 논문 쓰기의 그것과 결이 완전히 다르다.
1편에서 도파민과 자기계발의 매트릭스를 그렸다. 도파민은 나오는데 성장은 없는 것(도박, 무한 스크롤), 성장은 있는데 도파민이 약한 것(공부, 절제), 둘 다 없는 것, 그리고 둘 다 작동하는 몰입의 영역. 나에게 그 몰입의 영역이 뭔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글쓰기였다. 정확히는 브런치 글쓰기.
오해하지 말길. 논문 쓰기가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다. 자기계발 축에서 논문만 한 게 없다. 100편을 쓰는 동안 분석력도, 논리 구성력도, 영어 문장력도 확실히 늘었다. 성장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도파민 쪽이다.
논문은 보상이 느리다. 투고하고 첫 리뷰가 오기까지 최소 한두 달. 그 사이에 리젝 메일이 올 수도 있다. 수정해서 다시 보내고, 또 기다리고. 출판까지 반년, 그 논문이 인용되기 시작하는 건 몇 년 뒤. 보상이 없는 게 아니라 너무 멀리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 논문에선 내 목소리를 낼 수 없다. 과학 논문은 저자의 개성을 지우는 글쓰기다. "I think"는 쓸 수 없고 "It is suggested that" 정도로 돌려야 한다. 내 해석보다 데이터의 해석이 먼저다. 글쓰기의 규율이지 자유가 아니다.
1편의 매트릭스로 보면, 논문 글쓰기는 2사분면. 자기계발은 확실하지만 도파민은 간헐적인, 인내의 영역에 가깝다.
그렇다면 브런치 글쓰기는 왜 1사분면으로 이동하는가. 나 자신을 관찰하며 뜯어봤다.
주제를 고르는 순간부터 이미 시작된다. 길을 걷다가, 밥을 먹다가, 논문을 읽다가 "이거 글로 쓰면 재밌겠다" 싶은 순간이 온다. 그 순간 이미 머릿속에서 뭔가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논문은 연구 과제가 주제를 정해주지만, 브런치는 내가 흥미로운 것만 골라 쓴다. 출발선에서부터 보상 회로가 작동하는 셈이다.
쓰는 동안 생각이 만들어진다. 이게 핵심이다. 브런치 글쓰기는 이미 정리된 생각을 옮겨 적는 게 아니다. 쓰면서 생각한다. 첫 문장을 치면 다음 문장이 떠오르고, 문단을 쌓다 보면 처음엔 몰랐던 연결 고리가 보인다. 계란 깨는 법에서 파괴역학이 나오고, AI에이전트 글쓰기를 하며 나도 스스로 배운다. 이 예측 불가능한 연결이 도파민을 만든다. 동시에, 연결을 만들어내는 과정 자체가 사고력을 키운다. 도파민과 자기계발이 같은 동작 안에서 동시에 발생하는 구조다.
발행 버튼을 내가 누른다. 논문은 투고하면 남의 손에 넘어간다. 브런치는 내가 완성이라고 판단하면 바로 세상에 내보낸다. 조회수가 올라가고, 누군가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이 달린다. 피드백까지의 거리가 극도로 짧다. 몰입의 조건 중 하나인 "즉각적 피드백"이 구조적으로 내장되어 있다.
그리고 결론을 내가 내린다. 논문에서 결론은 데이터의 것이다. 브런치에서 결론은 나의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를 당당하게 쓸 수 있다. 매번 내 관점을 정리하고 언어로 꺼내는 훈련. 100편의 논문이 분석력을 키웠다면, 브런치의 글들은 내 세계관을 만들고 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다"고 하면 제약 없이 편한 글쓰기처럼 들릴 수 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주제가 자유로운 만큼 매번 스스로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논문은 Introduction–Methods–Results–Discussion - Conclusion이라는 틀이 있지만, 브런치 에세이에는 정해진 포맷이 없다. 독백으로 시작할지, 질문으로 시작할지, 한가운데를 잘라서 보여줄지. 매번 새로운 설계. 이게 적절한 난이도를 만든다. 너무 쉬워서 지루하지도, 너무 어려워서 포기하지도 않는 그 지점. 1편에서 말한 몰입의 세 번째 조건이다.
그래서 브런치에서의 자유는 "아무거나 해도 된다"가 아니라 "모든 것을 내가 선택한다"에 가깝다. 뭘 쓸지, 어떻게 쓸지, 어디서 멈출지. 이 선택의 반복이 쌓이면 그게 자기계발이 된다. 내가 뭘 중요하게 여기는지,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지 — 글을 쓰지 않았으면 몰랐을 것들을 글을 쓰며 알게 된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한 가지 불편한 질문이 남는다.
내가 만약 글쓰기를 본업으로 삼게 되고 글쓰는 행위만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면 과연 그 때에도 글쓰기는 1사분면에 위치할까? 그 때는 이러한 글쓰기 또한 지금의 논문처럼 2사분면으로 이동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작가 분들은 어떨까? 당연히 더 좋은 글을 위해 머리를 쥐어뜯고 고생하며 글을 쓰고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도파민이 나오는 구간이라는 것은 내가 초보 상태를 벗어나 어느 정도 상위권, 예를 들자면 하위 50% 미만에서 상위 10%까지 갈 때까지는 도파민이 터지고 자기계발도 되지만 상위 10% 이상, 또는 상위 1%에서 상위 0.1%로 갈 때는 도파민의 영역이 아닌 인고의 영역이 되는 것이 아닐까?
나에게 논문이란 이미 상위 10% 이상의 레벨에 있고 (JCR 기준), 이를 상위 1% 논문을 쓰기 위해서는 더 좋은 아이디어를 발굴하고 더 핵심적인 실험을 하고, 한 문장 한 문장에 공을 들여야 하는 것처럼 (내가 지난 10년간 경험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글쓰기 또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아직까지는 즐겁지만 이를 더 잘하게 된다면 스트레스를 받는 영역으로 갈 것 같다.
그러면 그 이후에 1%를 상위 0.1%로 올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또 다른 영역에서, 가령 내가 하위 50% 미만의 영역인 춤추기를 배워서 잘하게 된다면 도파민이 터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럼 나는 계속 평생을 잘 못하는 영역을 어느 정도 잘하는 영역으로 끌어올리면서 만족하고 살아야 하는가. 물론 폴리매스적인 사고로는 그게 옳다고 할 수 있지만, 인고의 과정 이후 상위 0.1%를 달성하며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다 포기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사실 이렇게 랭킹을 매기는 것이 의미가 있나. 이런 랭킹은 누가 부여하고 누가 정당화시키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이 꼬리를 물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논문 쓰기는 나에게 도파민을 제공하지 않는가.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인생에서 정말 큰 도파민을 줬던 경우 중의 하나가 재료 분야 최상위 저널인 Acta Materialia에 게재 승인을 받았을 때다. 시간만 나면 Acta 홈페이지에 들어가 쪼아보면서 게재가 확정을 받았는지 확인해 보고, 며칠을 지켜보다 마침내 게재 판정을 받았을 때 가슴 속 깊은 곳이 몽글몽글거리며 기뻐했던 그 감정을 기억한다.
2사분면이라고 정의했던 논문 쓰기가, 그 순간만큼은 의심의 여지 없이 1사분면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2사분면과 1사분면을 어떤 일로 나누는 것이 가능한가? 사실은 2사분면에서의 많은 경험들 또한 그 보상이 지연되기는 하지만 결국엔 1사분면에 해당하는 일이 아닐까. 물론 도파민이 나온다고 하는 것 자체가 즉각적인 보상을 함의하기는 하지만 우리는 참고 인내하며 나중에 올 보상을 위해 노력하며 사는 것이 아닐까. 대입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지금도 많은 학생들은 인생에서 가장 황금같은 12년이라는 시간을 초중고를 보내며 대입을 준비하고 결과를 얻고 기뻐하고 환호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어쩌면 사분면은 영원히 거기 머무는 장소가 아니라, 순간순간 들어갔다 나오는 방 같은 것일 수 있다. 같은 글쓰기여도 마감에 쫓기면 2사분면이 되고, 쓰고 싶은 말이 넘쳐서 키보드를 잡으면 1사분면이 된다. 논문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은 인내의 영역이지만, 논문 게재 승인 확인 순간 만큼은 확실히 1사분면이었다.
1사분면과 2사분면은 일의 성격으로만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같은 일이라도 시간에 따라, 마음가짐에 따라 바뀐다.
논문도 그렇다. 논문 게재 승인만이 도파민은 아니었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좋은 논문을 읽다가 "이 사람은 왜 이런 해석을 했을까" 궁금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새로운 데이터에서 예상 못 한 패턴이 보이는 순간도 있었다. 게재 결과에 매달리지 않더라도 읽고, 배우고, 한 문장씩 쌓아가는 과정 안에 이미 1사분면의 순간들이 숨어 있었다.
우리 삶의 많은 일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1사분면이 즉각적인 보상의 영역이고 2사분면이 지연된 보상의 영역이라면, 그 경계는 생각보다 얇다. 일을 하며 알게 되는 소소한 것들 — 어제 몰랐던 걸 오늘 알게 되는 순간, 안 되던 게 되는 순간, 내 생각이 한 뼘 더 깊어지는 순간. 그런 것들에 감사하며 하다 보면 2사분면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일들이 1사분면으로 넘어온다.
고정된 지도는 없다. 있는 건 순간의 조건뿐이다. 그리고 그 조건은 꽤 자주 내가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