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프린스턴의 머서 스트리트 112번지에서 고등연구소까지는 약 2.4킬로미터다. 아인슈타인은 이 길을 매일 걸었다. 혼자 걸은 것은 아니다. 수학자 쿠르트 괴델과 오전 열 시에서 열한 시 사이에 만나 함께 출발했다. 30분 남짓한 이 산책에서 둘은 물리학, 철학, 정치를 논했고, 오후 1시쯤 같은 길을 되돌아왔다. 아인슈타인은 이 일과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무실에 가는 이유는 괴델과 함께 걸어서 돌아오는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다." 비서 헬렌 두카스의 추산에 따르면, 이 산책은 아인슈타인의 하루 업무 시간 중 30퍼센트를 차지했다고 한다.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가, 하루의 거의 3분의 1을 걷는 데 썼다.
그의 하루를 들여다보면 더 놀랍다. 아침 9시에서 10시 사이에 일어나 조간신문을 읽으며 아침을 먹었다. 10시 30분에 집을 나서 걸어서 연구소에 갔다. 날씨가 나쁜 날에는 대학 소속 스테이션 왜건이 픽업했다. 사무실에서 일한 시간은 10시 30분부터 오후 1시까지, 두 시간 반이었다. 1시에 퇴근해서 1시 30분에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자고, 차를 한 잔 마셨다. 낮잠 방식이 독특했다. 의자에 앉아 손에 금속 숟가락을 쥐고, 바닥에 금속 접시를 놓았다. 잠이 깊어지면 손에서 힘이 풀리고, 숟가락이 접시에 떨어지고, 그 소리에 깨어났다. 너무 깊이 자면 인지 기능이 떨어진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사람의 장치다. 오후에는 집에서 편지를 쓰거나 방문객을 만났다. 저녁 6시 30분에 식사를 하고, 그 뒤에 다시 작업하거나 바이올린을 켰다. 모차르트를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걷는 것에는 몸의 이유도 있었다. 인지신경과학자 아르네 디트리히는 '일시적 전두엽 활동 저하(transient hypofrontality)'라는 가설을 제안한 바 있다. 운동 중 뇌가 다리 근육과 호흡 리듬과 지면의 경사에 자원을 쏟느라, 전두엽의 분석 기능이 잠시 뒷자리로 물러난다는 설명이다. 의식적 집중이 느슨해지면 연상이 활발해진다. 논문을 정면으로 12시간 노려봐도 안 풀리던 문제가, 카네기 호수 옆길을 한 바퀴 돌고 나면 풀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
이 일정을 다시 보자. 사무실 실질 근무 2시간 반. 산책 1시간. 숟가락 낮잠. 바이올린.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시간이 하루의 절반을 넘는다. 의식적 사고와 무의식적 연상을 번갈아 돌리는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스템으로 이 사람은 20세기 물리학을 두 번 뒤집었다.
첫 번째 뒤집기는 상대성이론이다. 특수상대성이론은 1905년, 스위스 특허청 3급 기술심사관 시절에 나왔다. 일반상대성이론은 8년이 걸렸다. 1907년, 특허청 사무실에서 "자유낙하하는 사람은 중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는 등가원리를 착상한 뒤 1915년 완성까지, 뉴턴 이래 200년간 당연하게 여겨졌던 중력 개념을 혼자서 해체하고 다시 지었다. 수학이 부족해서 대학 동창 마르셀 그로스만에게 리만 기하학을 배워야 했다. 1915년 11월, 베를린 프로이센 과학원에서 네 차례 강연을 했는데, 마지막 강연 직전까지 방정식을 고치고 있었다. 동시에 같은 문제를 풀고 있던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와 시간 경쟁을 벌이면서.
8년. 이 기간 동안 아인슈타인을 지탱한 것은 동료의 격려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이 프로젝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고, 일부는 불필요하다고 봤다. 그를 지탱한 것은 자기 질문에 대한 고집이었다. 중력은 힘이 아니라 시공간의 곡률이다 — 이 직관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과는 혁명이었다. 1919년 일식 관측이 일반상대성이론의 예측을 확인했을 때, 아인슈타인은 하룻밤 사이에 세계적 유명인이 됐다. 산책과 낮잠으로 채워진 하루가 이 혁명을 만든 토양이었다.
1927년 브뤼셀 솔베이 회의. 아인슈타인은 48세였고, 이미 전설이었다. 이 회의에서 그는 닐스 보어와 충돌한다. 쟁점은 양자역학의 해석이었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가 이끄는 코펜하겐 학파는 이렇게 주장했다. 전자의 위치는 관측하기 전에는 정해져 있지 않다. 자연은 근본적으로 확률적이다. 아인슈타인은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양자역학의 수학적 정확성은 인정했지만, 그 밑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더 깊은 실재가 있다고 확신했다. "이 이론은 많은 것을 보여주지만, 우리를 '그 늙은 분'의 비밀에 더 가까이 데려다주지는 않는다. 나는 어쨌든 그 분이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막스 보른에게 보낸 1926년 편지다.
두 사람의 충돌은 수차례 이어졌다. 가장 유명한 것이 1930년 솔베이 회의에서 벌어진 '상자 속 시계' 논쟁이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사고 실험을 제안했다. 빛(광자)이 들어 있는 상자가 있다. 벽에 셔터가 달려 있고, 셔터를 여닫는 시계가 상자 안에 있다. 이 상자를 정밀 저울 위에 올려놓는다. 시계가 정확한 시각에 셔터를 열어 광자 하나를 내보낸다. 광자가 빠져나가면 상자의 질량이 줄어들고, E=mc²으로 빠져나간 에너지를 정확히 계산할 수 있다. 시계가 셔터를 연 시각도 정확히 알 수 있다. 따라서 에너지와 시간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데, 이것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너지와 시간을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다)와 모순된다 — 이것이 아인슈타인의 공격이었다.
다음 날 아침, 반격이 나왔다. 핵심은 이것이었다. 광자가 빠져나가면 상자가 가벼워지면서 저울 위에서 미세하게 위치가 바뀐다. 그런데 아인슈타인 자신의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중력장에서 위치가 바뀌면 시간의 흐름이 달라진다. 이것을 중력적 시간 지연이라고 하는데, 상자의 위치 변화가 상자 안 시계의 정확도에 불확정성을 도입하고, 이 불확정성이 정확히 하이젠베르크의 부등식을 만족시킨다는 것이 보어의 논파였다. 아인슈타인은 자기가 만든 이론에 자기가 당한 것이다. 쓴웃음을 지으며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1935년, 포돌스키, 로젠과 함께 쓴 EPR 논문에서 '얽힘(entanglement)'이라는 현상을 지적하며, 양자역학이 불완전하다는 논증을 다시 들고 나왔다. 두 입자가 상호작용한 뒤 멀리 떨어졌을 때, 한쪽을 측정하면 다른 쪽의 상태가 즉시 결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아인슈타인은 이것을 "유령 같은 원격 작용"이라 불렀고,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리 없으니 양자역학의 기술이 불완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은 저녁 식탁에서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를 되풀이했고, 보어는 "아인슈타인, 신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시오"라고 받아쳤다.
이 논쟁의 결과는 좀 복잡하다. 아인슈타인의 논리는 항상 깨끗했다. "양자역학이 완전하다면, 이런 모순이 생긴다. 따라서 양자역학은 불완전하다." 구조가 명확하다. 반면 보어의 반박은 달랐다. 보어는 "측정이라는 행위 자체가 대상을 바꾸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이 전제하는 '관측과 무관한 객관적 실재'라는 개념 자체가 양자 세계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철학적으로는 깊은 주장이었지만, 구체적으로 뭐가 어떻게 틀렸는지를 수학적으로 깔끔하게 보여주는 방식이 아니었다. 보어의 글은 당대 물리학자들 사이에서도 난해하기로 유명했다.
그런데 대다수 물리학자들이 보어 편에 선 이유는 이론적이 아니라 실용적이었다. 양자역학의 수학적 예측이 실험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반도체가 작동하고, 레이저가 빛을 내고, 원자 구조가 예측대로 나왔다. "이 이론이 왜 이렇게 작동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작동한다. 그러니 쓰자." 이것이 물리학계에서 사실상 모토가 된 "닥치고 계산하라(shut up and calculate)"의 의미다. 아인슈타인이 제기한 "그래서 실재는 뭔데?"라는 질문은 대부분의 물리학자에게 실용적 가치가 없었다. 아인슈타인은 소수파로 밀려났다.
아인슈타인은 중력과 전자기력을 하나의 이론으로 통합하려 했다. 8년간 일반상대성이론을 완성한 그 방법 — 혼자 앉아서 수학적 직관을 밀어붙이는 것 — 을 다시 꺼냈다. 일반상대성이론에서 시공간의 기하학을 기술하는 수학적 틀을 확장하면, 중력뿐 아니라 전자기력까지 하나의 기하학 안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직관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대가 달랐다. 1930년대 이후 물리학의 주류는 양자역학과 입자물리학으로 이동했다. 강한 핵력과 약한 핵력이 발견되면서, 통합해야 할 힘이 둘이 아니라 넷이 됐다. 아인슈타인은 중력과 전자기력만 가지고 작업했다. 나머지 두 힘은 무시했다. 양자역학의 실험적 성공들이 쏟아져도, 자기 질문을 바꾸지 않았다. 고등연구소에서 그는 점점 고립됐다. 같은 건물에 오펜하이머와 파이스가 있었지만, 아인슈타인의 연구에 관심을 가진 동료는 거의 없었다.
조수 에른스트 슈트라우스의 회고가 이 30년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이론의 수학적 틀을 확장하는 특정한 방법론을 2년간 슈트라우스와 함께 밀어붙였다. 매일 산책하고, 돌아와서 방정식을 만지고, 막히면 바이올린을 켜고, 다음 날 다시 방정식으로 돌아오는 일상이었다. 어느 날 저녁, 슈트라우스가 그 방정식이 물리적으로 성립 불가능한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음 날 둘이 모든 각도에서 검토했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일찍 퇴근했다. 슈트라우스는 낙담했고, 아인슈타인은 더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아인슈타인은 여느 때처럼 활기차게 나타나 완전히 새로운 접근법을 제안했다.
이것이 30년간 반복됐다. 접근, 실패, 새 접근, 실패. 일반상대성이론을 만든 8년간 이 사이클은 혁명을 낳았지만, 같은 사이클이 통일장이론의 30년간은 막다른 길만 낳았다. 차이가 무엇이었을까? 8년간의 산책과 낮잠은 "중력은 시공간의 곡률이다"라는 올바른 질문 안에서 순환하고 있었다. 30년간의 산책과 낮잠은 "중력과 전자기력만으로 통합할 수 있다"는, 이미 시대가 추월해버린 질문 안에서 순환하고 있었다. 시스템은 같았다. 질문이 달랐다.
프린스턴 병원에 입원한 마지막에서 두 번째 날에도, 그는 침대 옆 테이블에서 통일장이론 방정식을 만지고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훗날 이렇게 평가했다. "말년의 아인슈타인은 좋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는 실험에 등을 돌렸다."
1964년, 아인슈타인 사후 9년이 지나서, 북아일랜드 출신의 물리학자 존 스튜어트 벨이 논문 한 편을 발표했다.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논쟁을 실험으로 판가름할 수 있게 만든 논문이었다. 벨의 논리는 이랬다. 아인슈타인의 주장대로 입자가 태어날 때부터 속성이 정해져 있고 우리가 모를 뿐이라면(이것을 '숨겨진 변수'라고 부른다), 두 입자의 측정 결과 사이의 상관관계에는 수학적 한계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벨 부등식'이다. 그런데 양자역학의 예측은 이 한계를 넘는다. 따라서 실험으로 확인하면 된다. 상관관계가 벨의 한계 안에 있으면 아인슈타인이 맞고, 넘으면 양자역학이 맞다.
1972년, 존 클라우저가 최초의 실험을 수행했다. 칼슘 원자에서 얽힌 광자 쌍을 만들어, 두 광자를 서로 다른 방향으로 보낸 뒤 편광을 측정했다. 아인슈타인이 맞다면 — 광자가 태어날 때부터 편광 방향이 정해져 있다면 — 두 광자의 측정 결과가 일치하는 빈도에는 수학적 상한선이 존재한다. 답이 미리 정해진 시험지에서 나올 수 있는 점수에 한계가 있는 것과 같은 원리다. 벨은 이 상한선을 수식으로 증명했다. 클라우저의 실험 결과는 그 상한선 바깥이었다.
1982년, 프랑스의 알랭 아스페가 더 정교한 실험을 했다. 클라우저의 실험에는 허점이 있었다. 측정 장치의 방향이 미리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광자가 어떻게든 그 설정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아스페는 광자가 날아가는 도중에 측정 방향을 무작위로 바꾸는 장치를 추가했다. 허점을 막아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후 수십 년간 전 세계에서 반복된 실험들이 같은 결과를 냈다. 오스트리아의 안톤 차일링거는 이 실험을 우주 규모까지 확장했다. 아인슈타인이 "유령 같은 원격 작용"이라며 가장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던 바로 그것이, 자연의 실제 작동 방식이었다. 2022년 노벨 물리학상은 클라우저, 아스페, 차일링거 세 사람에게 돌아갔다. 신은 주사위를 던지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1935년 EPR 논문에서 처음 명확히 지적한 '얽힘'은 오늘날 양자컴퓨팅과 양자암호의 핵심 자원이다. 벨의 논문도, 클라우저와 아스페의 실험도, 아인슈타인이 던진 질문이 없었으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질문 자체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질문에 대한 답이 그가 원한 방향이 아니었을 뿐이다.
하지만 더 냉정하게 봐야 할 부분도 있다. 30년간 아인슈타인은 고등연구소의 자원과 조수들의 시간을 사용했다. 슈트라우스처럼 유능한 젊은 물리학자들이 그의 프로젝트에 투입됐고, 그 프로젝트는 결실을 맺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의 이름이 아니었다면, 같은 연구 프로그램에 같은 규모의 자원이 투입됐을 리 없다. 명성이 고집을 지탱하고, 고집이 자원을 소모하는 구조였다. 록펠러의 침묵이 아내에게 뇌졸중을 안긴 것처럼, 아인슈타인의 고독도 본인에게만 비용이 든 것은 아니었다.
록펠러에게 침묵이 양면의 도구였듯, 아인슈타인에게 고독은 양면의 힘이었다. 자기 질문을 지키는 고집이 혁명을 만들고, 같은 고집이 막다른 길을 만들었다. 차이는 하나다. 자기 질문이 시대보다 앞서 있을 때 고독은 무기가 되고, 시대가 자기 질문을 추월했을 때 고독은 감옥이 된다. 문제는 그 경계를 걷고 있는 본인에게는 둘이 똑같이 느껴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