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옥 씨 부인전》을 보고~
"한 편의 영화가 책을 읽는 경험이 될 수도 있다"는 문장을 본 적이 있다.
그 문장이 내게 준 울림은 꽤 컸다.
이후 나는 단순한 오락이 아닌, 하나의 작품을 감상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OTT 플랫폼이 일상으로 들어오면서 영화뿐 아니라 드라마까지 정주행 하는 것이 쉬워졌다.
덕분에 작품을 본 후 독서 후의 감상처럼 친구들과 의견을 나누는 시간도 많아졌다.
‘눈물의 여왕’, ‘빨간 풍선’, ‘나쁜 엄마’ 등 다양한 작품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최근 나는 《옥 씨 부인전》에 푹 빠져 있다.
드라마를 보다 보면 어떤 작품은 초반 몇 회 안에 그 결이 드러난다.
《옥 씨 부인전》이 그랬다. 첫 회에서부터 이 드라마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강렬하게 전해졌다.
주인공 ‘옥태영’은 사실 양반이 아니다.
그녀는 신분을 숨긴 채 살아가고 있다.
과거, 노비였던 ‘구덕’(구더기)은 맞아 죽지 않고, 곱게 늙어 죽는 것이 유일한 꿈이었다.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을 목격한 그녀는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악착같이 돈을 모은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장을 하고 장에 나선 구덕은 예인의 꿈을 가진 서자 ‘천승휘’를 만난다.
그들이 마당놀이 심청전을 구경하며 나눈 대화는 이 드라마가 품고 있는 핵심적인 질문을 던진다.
"사는 게 힘드니까요. 이런 걸 보는 동안에 한 시름 잊는 겁니다."
"눈먼 아비가 어미도 없이 젖동냥으로 키운 심청이가 왕비가 되다니요. 현실에서 가당키나 합니까?"
"사람들은 그냥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이야기가 좋은 겁니다.
우리한테는 오지 않을 행복한 날들을 상상하면서 대리만족하는 게지요."
구덕의 말은 예인이자 서자인 승휘에게도, 그리고 드라마를 보는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작품의 위대함이 무엇인지, 예술이 사람들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구덕이 자신의 꿈을 이루는 과정에는 그녀를 도운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양반 옥태영, 태영 할머니, 주막 이모, 현감, 그리고 승휘와 친구들.
그들의 연대가 없었다면 구덕의 꿈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드라마를 보며 나는 묻고 싶었다.
"현실에서도 신분과 배경을 초월해 서로 돕는 이들이 있을까?"
"진정한 연대와 나눔이 존재할까?"
마지막 회에서 구덕은 결국 자신의 꿈을 이룬다.
그 장면은 마치 동화 같은 해피엔딩처럼 보이지만,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이라기보다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구덕의 꿈은 어쩌면 지금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소망과도 닮아 있다.
집값은 하늘을 찌르고, 내 집 마련은 더 이상 현실적인 목표가 아니다.
물가는 월급보다 두 배 빠르게 오르고, AI와 자동화 기술이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어디에서 올까?
드라마 《옥 씨 부인전》은 심청전 속 심청이처럼,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작은 빛이 되어준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지금의 현실 속에서도 ‘연대’와 ‘희망’이 여전히 존재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희망은 누군가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구덕처럼 스스로 노력해야 하고, 함께 손을 잡아줄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아직 희망을 가져도 될까?
아마도 가능할 것이다.
많은 이들이 ‘양반 옥태영’ 같은 인간애를 닮아가고, 또 다른 ‘구덕’의 꿈이 이뤄지는 세상이 오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