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fp입니다만
아침에 큰애가 깨운다. 엄마 7시 10분이야!
미쳤어, 후닥닥 계단을 뛰어 내려가며 생각한다. 요새 대체 왜 이렇게 못 일어나겠지. 어젯밤 막내 재우고 9시 반에 운동 갔다가 집에 오니 11시. 과제 두 개 제출하니 12시. 누워서 핸드폰 좀 보다 보면 한 시간이 후딱, 어제는 새벽 1시 반쯤 잠들었을까. 날이 더워서 잠을 설치느라 그런 걸까. 7시임에도 머리가 멍한 게 도통 잠이 깨질 않는다. 초등 두 아이들이 나가는 시간 7시 35분. 엄마가 미안타, 후닥닥 토스트에 치즈를 얹어 시판 야채 주스와 함께 간단한 아침을 먹이고 두 아이를 먼저 내 보낸다.
7시 45분 남편 출근, 8시 35분 유치원생 막냉이까지 모두 나가주시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사랑하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우리 집 거실이다. 하루에 여섯 시간씩 일주일에 세 번. 주 18시간을 즐길 수 있는 온전한 내 공간.
이 공간에서 나는 일도 하고 글도 쓰고 선생 신분으로 수업 준비도 하고 학생 신분으로 대학 수업도 듣는다. 비록 그전에 해치워야 할 집안일들이 산더미같이 있지만.
오늘은 학교 임원을 같이 했던 엄마들과 6개월 전부터 잡은 점심 약속이 있는 날이다.
나가기 전에 일단 빨래에 설거지부터 해야 하는데 도통 기운이 없다. 몇 걸음 걷다가 소파에 벌러덩 드러눕고 또다시 몇 걸음 걸어 설거지 한번 하고 또 드러눕는다. 40대의 저질체력이란.
오늘은 지인짜 나가기가 귀찮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저 옛날 가문의 조상님이 강가에서 빨래 널던 기력까지 끌어모아 빨래를 널고 겨우겨우 청소기만 돌리고 죽을 둥 살 둥 화장품이라도 찍어 바르고, 그리고 무거운 몸과 머리를 이끌고 운전석에 앉는다. 약속장소는 차로 15분 거리.
그리고 15분 후, 외향적 인간의 반전이 시작된다.
조금 전까지의 난 분명 물 먹은 바다코끼리처럼 소파에 널브러져 지느러미만 겨우겨우 움직이고 있었는데 막상 사람을 앞에 두면 하루종일 굶주리다 주인 만난 개처럼 돌변한다. 웃고 떠들고 근본 없는 오두방정과 저세상 텐션으로 내 앞의 당신들과의 만남을 기뻐한다. 누가 보면 6.25 때 헤어진 친언니들이라도 만난 줄 알겠다.
이렇게 다섯 여자들의 두 시간 반의 수다타임이 지나면 못내 헤어지기 아쉬운 듯 또 만날 것을 약속하고 차에 탄다. 근처 마트에 들러 간단하게 저녁거리 장을 보고 다시 15분을 운전해 집으로 돌아온다.
현관문을 열고 거실에 도착한 불혹의 외향적 인간은 다시 바다코끼리에 빙의한다. 방전된 바다코끼리는 지금 한 발자국도 움직이기 싫어서 소파에서 지느러미로 이 글을 쓴다.
문득 생각하면 좀 어이가 없다. 그것도 그럴 것이 나는 더 이상 이십 대의 깨발랄한 청춘이 아닌 것이다. 불혹에 우아하기는 둘째치고 체력이 달려 집에 돌아오면 방전되는 내가 아닌가. 왜 이렇게 조상님 에너지까지 끌어모아 깨방정을 떠는지.
물론 누군가를 마주한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다. 눈앞의 사람이 진심으로 좋기 때문에 가능한 텐션이다. 에너지가 넘친다, 부럽다는 말을 많이 듣는데 저질체력 외향형 인간의 이런 이면은 모르시겠지들. 텐션 낮추는 법.. 을 배워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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