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이슬비도 아닌 제법 굻은 빗줄기다. 카페를 오픈하고 연일 내리는 비에 몸도 마음도 지쳐가는 요즘이다. 우리 젊은 날에는, 비가 오면 창 넓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로망이 있었는데, 커피음료의 일상화로 요즘은 그런 낭만이 사라져 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 카페는 비가 오면 조용하다. 거실 창가의 맺인 빗방울을 바라보며 한숨을 토하다, 오픈 시간을 훌쩍 넘기고 카페에 도착했다.
빗자루를 들고 오픈 청소를 한다. 하염없이 내리는 야속한 비는 오늘 내로 그치지 않을 모양이다. 햇병아리 사장님은 빗속에 묻힐 오늘 장사를 내려놓으며, 커피를 내린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커피 한잔을 들고 카페를 한 바퀴 돌아본다. 그리고 냉장고 앞에서 멈춰 선다.
‘그래, 오늘은 뱅쇼를 끓여야겠어’
이렇게 비 오고 조용한 날은, 잠깐 미뤘던 일을 해야지
내 어릴 적, 엄마는 평소 바빠서 미뤄 두었던 일을 비 오는 날 했다. 시골은 비가 오면 농사일을 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휴무가 되었다. 아침부터 빗방울이 굻어지면 엄마는 큰방 마루에 걸터앉아 먼 산의 구름을 바라보며 말한다.
“에이고, 오늘은 쉬어야겠네.”
체념하는 말과 함께 엄마는 방으로 들어가, 장롱에 뒤엉켜 있는 옷가지를 꺼내 정리하셨다. 그리고 벌써부터 하얀 속을 드러내고 있는 이불과 구멍이 숭숭 뚫린 여덟 자식 양말을 기우셨다. 그렇게 저녁이 되면 오랜만에 밀가루 포대를 열어, 집안 가득 기름 냄새를 풍기며 부추 전을 부치거나, 손칼국수를 끓여주셨다. 그래서 어린 나는 엄마가 곁에 있고, 맛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비 오는 날을 은근히 기다렸다.
뱅쇼는 우리 카페에서 가장 인기있는 음료이다. 그래서 다른 메뉴보다 준비하는 횟수가 많아, 며 칠 전장을 미리 바뒀다. 이제 뱅쇼 끓일 준비를 한다. 냉장고에서 과일과 와인을 꺼내 깨끗하게 씻고천천히 끓인다. 검붉은 와인이 갖가지 과일을 품자, 카페 안은 순식간에 향긋하고, 달콤하며, 시큼한 냄새로 가득 찬다. 사이렌의 노래에 유혹된 선원들처럼 뱅쇼 향에 나도 모르게 서서히 빠져된다.
“딸랑”
문소리와 함께 드디어 첫 손님이 들어온다.
“사장님, 이게 무슨 냄새예요. 카페 안이 향긋하네요.”
“네. 오늘 뱅쇼를 끓였어요.”
“그럼 그거 한잔 주세요.”
손님도 향에 이끌렸는지, 뱅쇼를 주문한다. 오늘은 어둠이 깔리고, 비가 오는데도 손님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비 오는 날 손님 없다는 법칙이 깨지는 걸까? 아니면 뱅쇼 맛에 끌려오는 걸까? 뭐가 되었든 햇병아리 사장님의 기분은 좋아진다. 들려오는 음악에 콧노래까지 흥얼거린다. 이제부터 비 오는 날 우울해하지 말고 뱅쇼를 끓여야겠다. 오늘처럼 뱅쇼향에 끌리든, 커피 향에 끌리든, 비 오는 날의 징크스가 없는 카페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