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는 성삼문·박팽년과 친분이 두터웠다. 단종복위 옥사 때 성삼문과 박팽년이 국문을 당하게 되자, “성과 박은 죄가 없는데 죽이면 만고죄인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명회가 이 말을 세조에게 고했다.
사헌부에서는 환열형(수레에 묶어 찢어 죽이는 벌)을 주장했으나 세조가 정몽주의 손자라 죽음을 면하게 했다. 『매월당집』
(매월당 김시습은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머리를 풀고 광인처럼 다니며 세조를 비난하였다. 김시습이 죽은 18년 뒤에 중종의 명으로 그의 유고가 수집되기 시작하여 선조 때 『매월당집』이 간행되었다. )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피살되었지만 그 아들 정종성·정종본은 연좌를 피하여 세종 때 예조참의와 수령이 되었다. 문종 때 정몽주의 작위가 추증되고 두 아들도 봉작되었다.
정몽주의 손자 정보는 학문이 뛰어나 세종의 총애를 받았고, 한때 예안현감으로 나갔다가 사헌부감찰이 되었다.
정보의 부친 정종성이 노년에 낳은 서녀가 한명회의 첩으로 가 있었다. 성삼문과 박팽년 등이 세조에게 국문을 당하게 되어 한명회가 그 추국을 맡았다. 정보가 서매를 찾아가 한명회를 말렸지만 한명회는 난언죄로 정보를 고발하였다. 역모의 혐의를 받는 사람을 두둔하는 것은 역모나 마찬가지였다.
세조는 정몽주의 손자를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정보에게 장(杖) 1백 대를 때려 변방 노비로 보내고 집은 윤사흔에게 주었다.
정보의 딸은 이석형에게 시집갔는데, 이석형이 전라감사 때 사육신의 죽음을 듣고 시를 지었다.
순임금 때의 두 여인의 대나무와 진시황 때의 대부였던 소나무,
비록 슬픔과 영화가 다르지만 어찌 차고 뜨거운 얼굴을 하리오.
(순임금이 순행 중에 죽자 두 왕비가 흘린 눈물이 대나무가 되고, 진시황이 태산에 가다가 비를 만나 소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하고 소나무에게 대부 벼슬을 내렸거늘, 사육신의 죽음이 슬프다고 어찌 얼굴 냉랭하게 할 것이요, 신숙주의 영화에 어찌 화낸 얼굴 하리오.)
이 시가 익산 동헌에 남아있어 치죄하자는 대간의 여론이 일기도 했지만, 이석형은 성종 때 까지 관직을 이어나갔다.
양녕 대군의 아들 순성군이 정보의 누이와 혼인하였는데, 정보가 대역죄로 처벌되자 그 누이의 양반신분이 강등되니, 순성군의 아들 오천군 이사종이 서자로 격하되었다. 제사를 받들지 못해 자손들이 상소를 올렸는데, 숙종 25년에 이유(李濡)·김창집·민진원 등의 상소로 정보는 신원(伸寃)되고 증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조지서 후처 정씨는 정몽주의 증손이다. (세조 6년에 정종본 등을 원종 3등 공신에 기록하라고 명한 기사를 보면, 정종본의 손녀인 듯하다)
남편 조지서는 성종 때 청백리에 녹선 되고 충효와 시문으로 명망이 높았다. 세자시강원보덕이 되어 허침과 함께 동궁인 연산군의 교육을 담당했다. 연산군이 놀기를 좋아하니 천성이 굳세고 곧은 조지서는 연산군을 자주 꾸짖었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사직하고 은거하다가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처형되었다.
조지서가 붙잡혀가기 전에 부인 정씨에게 술을 따라주면서 “내 지금 가면 돌아오지 못 할 터인데 조부와 부친의 신주는 어찌하랴?”하고 슬퍼하니 정씨가 울면서 “죽음으로써 신주를 보전하겠습니다.” 하였다.
조지서의 집이 몰수되자 정씨 부친이 친정집으로 들어와 살라고 불렀지만, 정씨는 시집의 신주를 안고 조지서 첩의 집으로 가서 아침저녁으로 곡하며 제사지냈다. 관리가 근처에 오면 신주를 안고 대밭에 며칠 씩 숨어가며 삼년상을 치렀다. 『어우야담』
조지서는 중종 1년에 관작이 회복되고 통정대부 승정원도승지에 추증되면서 신원되었다. 경남 진주의 신당서원에 제향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