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 장사로 부귀를 누린 한확

by 금낭아

조선 초기에는 명나라에 공녀를 보내야 했다. 명나라 환관 황엄이 사신으로 와서 경복궁 마당에서 처녀들을 뽑는 행사를 대대적으로 시행하여 데려갔다.

그중에서 한확의 넷째 누이는 영락제의 후궁으로 낙점 되었다.

1417년 태종 17년 8월에 황엄이 한씨와 황씨를 데리고 명나라로 돌아가는 사행단에 한확은 부사정이 되어 따라갔다. 그리고 돌아올 때 바리바리 선물을 받아왔다. 말 6필, 안자 1개, 금 50냥쭝, 백은 6백 냥쭝, 각색 직물 56필, 비단 2백필, 털모자 4필, 면포 20종, 각종 직물, 설탕 80근을 받아와 절반을 궁에 바치니 태종은 금 25냥쭝과 백은 50냥쭝을 도로 주었다. 그리고 태종은 한확에게 월봉(月俸)을 주게 했다.

세종 1년에 한확이 영락제에게서 염소 20 마리와 말 2필을 받아 궁에 바치자, 세종은 노비 10명과 밭 70결을 내려 주었다. 그리고 한확의 모친상에 명나라에서 흠차관이 와서 문상할 정도였다.


하지만 한확의 누이는 고초가 심하였다.

함께 간 황씨가 형부의 친구 조예와 좋아하던 사이였는데 숨기고 끌려가다 복통을 일으켜 유산하였다. 영락제가 화를 내며 조선에 문책하려는데 한씨가 울면서 황제에게 애걸하였다.

“황씨는 민가에 있던 사람인데, 우리 임금이 그 부정한 관계를 어찌 알았겠습니까?”

황제가 감동하여 한씨에게 직접 벌을 주게 하였다. 하여 한씨는 황씨의 뺨을 때려야 했다.

그리고 함께 간 후궁 여씨가 본국의 후궁 여씨를 무고하여 본국 여씨와 환관 수백 명이 처형당했다. 그러고도 후궁 여씨는 환관과 간통하다가 두려워 자결했다. 이 일에 연좌 된 자 2천 8백 명이 모두 처형되고, 함께 간 황씨와 이씨도 참형 당했다.

이때 한확의 누이 한씨를 빈 방에 감금하고 음식을 주지 않았는데, 문 밖을 지키던 환관이 몰래 음식을 넣어주어 겨우 목숨을 유지했다. 한씨의 몸종은 모두 잡혀 죽고, 유모 김흑은 옥에 갇혔다.

한씨는 특별 사면 되었다가 영락제가 죽자 순장 된다. 순장 대상자 30여 명을 뜰에 모아 마지막 음식을 먹이고 올가미를 쓰게 했다. 한씨가 올가미를 목에 걸고 유모 김흑에게 울먹이며 마지막 인사를 하던 중에 환관이 걸상을 빼냈다. 죽기 전에 한씨는 태자에게 유모를 본국으로 보내달라고 청하였었다. 하지만 김흑 등 53인은 11년 후에야 본국으로 돌아왔다.

한씨가 순장 된 다음해에 한확은 간통죄로 고발되었으나 세종은 “이 사람은 내가 죄줄 수 없는 사람이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세종 9년에 한확의 막내 누이가 또 명나라 황제의 후궁으로 뽑혔다. 누이가 병을 핑계 대니 한확은 약까지 지어 주었다.

“누이 하나를 팔아서 부귀가 넘치는데 또 무슨 영화를 보려고 약까지 해 먹이오?”

누이가 울부짖으며 혼수이불을 찢고 혼수품을 모두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었지만, 결국 한확의 누이는 명나라의 제5대 황제인 선덕제의 후궁이 되었다.

세종은 이런 한확의 비위를 거스른 좌군 도사 최징을 의금부에 가두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한확은 둘째 딸을 계양군에게 시집보내고, 여섯째딸은 수양대군의 아들과 혼인 시켰다. 이 딸이 후에 인수대비가 된다.

한확은 사돈 수양대군의 즉위를 도왔다. 명나라에서 세조의 즉위과정을 의심하자 한확이 사은사로 가서 세조가 양위를 받았다고 설득하는데, 누이 공신부인의 큰 도움을 받았다. 한확은 세조의 책봉 고명을 받아 돌아오던 길에 병을 얻어 객사하였다. 당시 5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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