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1년 10월에 이성계는 정도전을 명나라에 보내 말 60필을 바치며 충성맹세서를 바친다. 이성계가 위화도까지 군사를 몰아간 전적이 있고, 왕씨를 폐하고 왕위를 차지했으니 어수선한 집안을 안정화 시키려면 이웃집에 선물을 잔뜩 안겨야 했을 것이다. 당시 명나라 주원장은 여진 세력을 견제해야 해서 조선에 신경 쓸 여유도 없었는데 조선이 미리 호구 잡혀 준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명에 조공으로 엄인((閹人-내시)들을 보내야 했는데, 명에서는 이들 엄인을 사신으로 보내왔다.
1394년 태조 3년 4월 엄인 최연이 흠차내사로 오니 임금이 직접 선의문 밖에서 맞이하였다. 명황제의 서찰(칙서라 하기 싫음)도 아닌 요동 좌군도독부의 외교문서를 받는데도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요동에서 도망친 사람을 잡아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조선 변방의 백성들이 요동으로 건너갔다가 군에 편입되자 다시 조선으로 도망쳐 왔는데, 이들을 잡아 요동으로 보내라는 것이다. 그렇게 다시 요동으로 끌려가는 조선인이 실록의 기록에 있다.
조선에서 바친 내시들이 돌아가면서 사신으로 왔는데, 진한룡은 옷을 찢으며 대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행패를 부렸다.
태조 5년에는 명나라 사신이 들고 온 외교 문서가 가관이다. ‘표문의 내용이 불경하니 표문을 지은 신하를 들여보내라......... 또 조선에서 보낸 내시들이 명나라 궁을 마음대로 다니니, 명에서 보낸 내시도 조선의 궁궐 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무엇이나 보게 두라.’
게다가 사신으로 온 우우(牛牛)는 거만하고 천하게 행동했다. 당시 태조가 종실 왕자들에게 사택에서 연회를 열어 명사신들을 접대하게 했다. 차례로 대군의 집을 돌며 접대 받던 우우는 창기를 들이라고 행패를 부리더니, 이방원의 집에 가서는 절을 했다. 이 행동은 세자(의안대군)의 측근들을 자극하는 행동이었다. 이들은 이방원의 죄를 얽으려 하다가 그만 두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무엄한 환관 사신들은 태조가 불러도 궁으로 들어오지 않아 두 정승이 직접 가서 데려와야 했다. 환관 왕예는 말에서 떨어지자 영접관 관리에게 채찍을 휘두르고 말리는 접반사에게도 행패를 부렸다. 이들은 6월에 들어와서 11월에야 돌아갔는데, 그동안 사신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태조는 내전 침실에서까지 연회를 열었다.
태종은 왕위 계승에 대한 인정을 받기 위해 공을 들였다. 태종 즉위 다음해에 온 사신 육옹과 임사영을 극진히 대접하여 보내고 왕위계승을 인정받았다.
그 다음에 온 사신 장근과 장목예는 태종과 시를 주고받을 정도로 예와 문이 있는 사람이었다.
1403년 태종 3년 4월에 고명과 영락(永樂) 원년의 대통력(大統曆)을 보내왔다. 조선왕조실록은 명나라 황제의 연도로 날짜를 표기해야 했다. 이때 태평관 잔치에서 환관사신 황엄이 무례하게 행동하여 태종이 연회를 파하였다.
또 사신들은 사냥구경을 요청하고 금강산 구경도 요청하였다.
이때 좌정승 하윤 등이 사신을 초청해 잔치를 열고, 다음날에는 태종 장인 민제가 사신들을 불러 연회를 열었다. 아마 사신 황엄이 “황제가 통혼할 의사가 있다”라고 한 말 때문인 듯하다. 이들은 양녕대군과 명나라 황녀와의 혼인을 주선하기 위해 황엄을 대접하고 선물을 안겨 보낸 듯하다. 하지만 명나라에서 아무 말이 없었다.
태종은 그해 9월에 명의 통혼 요청이 있을까 봐 경정공주를 상(喪) 중인 조대림에게 하가시켰다. ‘황제가 통혼할 의사가 있다’는 말은 아마 조선의 공주를 명에 시집보내는 것을 두고 한 말인 듯하다.
황엄 등은 제주를 정탐하려는지 제주 법화사의 미타삼존불이 원나라 때 양공이 만든 것이라 가져가겠다고 하였다. 황엄은 제주로 가려고 전라도로 출발하였는데, 왕이 직접 배웅하지 않는 것에 화를 내어 새벽 일찍 떠나는 바람에 관리들이 배웅하러 갔다가 허탕치고 돌아왔다.
태종은 황엄이 제주로 가지 못하게 불상을 미리 가져다 놓으라 명하였다. 황엄은 남원에서 유람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팔을 다쳤다. (술을 얼마나 처먹었으면) 또 불상을 가지고 올라오면서 사람도 때려 죽게 하고 행패를 부렸다. 한양에 들어오면서 이조판서가 맞이하자 정승이 마중 나오지 않았다며 화를 내며 ‘불상을 맞을 때 왕이 불상에 오배삼고두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화가 난 태종이 지신사 황희를 보내 양재역에서 맞이하게 하니 황엄은 왕이 직접 오지 않았다며 화를 내고 예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황엄은 태종에게 불상에 절을 하라 요청했다. 태종은 “명나라 황제가 보낸 부처에는 절을 하겠지만 제주에서 가져 온 것이니 절하지 않겠다.”하여 모면해야 할 만큼 굴욕을 겪었다.
그렇게 요란하게 조선을 들쑤셔놓고 돌아간 황엄은 다음해에 다시 사신으로 왔다. 이번에는 사리를 요구하는 명황제의 문서(칙서라고 쓰기 싫음)를 들고. 조정에서는 사리를 긁어모아 천백 개를 은합에 담아 주었다.
민제의 사위이자 태종의 동서인 조박은, 세자가 아직 혼례를 올리지 않았으니 명황녀와의 혼인을 다시 의논하다가 붙잡혀 벌을 받게 된다.
태종 8년에는 명나라 황제가 처녀조공을 요구했다. 태종은 각도에서 조선의 처녀 수백 명을 끌어다 경복궁에 줄 세워 놓고 황엄에게 선을 보인 것이다. 황엄은 수백 명의 처녀를 데려가고 다음해에도 황엄은 처녀와 말 수백 필을 끌고 갔다.
태종 11년 8월에도 황엄이 왔다.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모화루에 나가 맞이하여 거하게 길놀이 행사까지 하며 경복궁으로 들이어 예를 행하였다. 명나라 황제는 교서에서 전에 정윤후의 딸을 데려가고도 조관에 알리지 않고 다시 미녀를 보내라 하였다.
황엄은 태평관에서 연회를 받고 나서야 다른 외교문서를 공개했다. 명나라에 딸을 바친 여귀진의 죽음에 제문(祭文)과 향을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또 불경을 쓸 종이를 바치라 하니 태종은 1만 장을 바치겠다고 한다. 황엄은 각종 연회에 선물에 뇌물까지 바리바리 싸 가지고 화려한 전송연을 받으며 돌아갔다.
세종 즉위년 9월에 황엄의 조카 황귀가 사신으로 와서 바리바리 선물을 챙겨 가더니, 다음해에 또 황엄이 사신으로 왔다. 이번에는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에서부터 갑질을 했다. 평안감사로 하여금 미리 북경 출발일을 노출 시키니, 형조 판서 김점을 영접사로 의주에 보내고 태종의 사위 조대림을 평양에 보내어 연회를 열게 하였다. 황엄이 마산역에서 병이 났다고 드러누워 태종과 세종이 각각 신하를 보내어 문병하게 했다.
명나라 황제가 보낸 문서는 태종을 상왕으로 올리고 세종이 즉위한 것을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명황제는 연회를 열 음식과 물목을 보내면서 연회 절차를 장황하게 써 놓았다. '왕은 어디 앉고 신하는 어디 앉고, 왕이 어디를 향해 어떻게 절해야 하고, 술잔은 어떻게 받아서 어떻게 마셔야 하고, 조선 음악은 연주하면 안 되고, 창기와 악공들은 서서 연주해야 하고,..... '
사신들은 직접 경복궁에 가서 음식 준비를 감독하여 연회를 준비하였다. 연회가 끝나고 상왕과 세종은 사신들에게 선물을 바리바리 안겨 준다.
윤봉은 태종 때부터 황엄 등을 보좌하러 따라 들어오다가 세종 때는 정식 사신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선에서 우대하여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고 가족친지들의 관직도 올려주었다. 윤봉은 황제의 이름을 팔아 해동청이나 표범 등을 잡아 바치게 하여 사욕을 채웠다.
세종 14년에 명나라로 돌아가면서 경원부에 이르러 민가의 개를 달라고 하였다. 접반사 이징옥이 거절하니 경성군에 도착하여 민가의 개를 훔쳐가는 것을 이징옥이 슬쩍 풀어주었다. 하지만 다시 개를 잡아들여 이징옥에게 개먹이 심부름을 시켰다. 이징옥이 또 풀어 보내자 화를 내며 역관과 역리를 매질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해동청 매를 취하려 하자 이징옥은 해동청이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여 놓아 보내게 했다.
이 일로 이징옥은 의금부에 잡혀 들어갔다.
세조 때는 명나라 사신 김식의 진죽도(眞竹圖) 이야기가 있다. 문신 출신이라 예는 있었지만 거만했다.
세조 10년 5월 20일 명나라 사신 김식(金湜)이 대나무 그림을 그려 시를 쓰고 박원형에게 주며 조선의 대나무 그림을 보여 달라 하였다. 박원형이 아뢰니 세조는 그림을 찾아 보여주게 하였다. 김식이 그림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것은 대나무가 아니라 삼이나 갈대이니 진짜 대나무를 보여주시오.”
이에 신하들이 세조에게 아뢰었다. “김식이 시와 그림에 뛰어나고 전서와 예서에 능함을 자랑하여 조선의 기를 꺾으려는 것입니다. 안견의 그림실력은 명나라에도 전해져 있으니 안견을 부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세조는 원유에 명을 내려 대나무 화분을 가져오게 하여 안견에게 그리게 하였다.
안견은 빽빽한 잎을 따낸 화분을 난간에 두고 해 질 무렵이 되자 성긴 댓잎에 석양이 드리운 장면을 그려냈다. 세조는 문신에게 명하여 운에 맞춰 화답시를 지어 넣게 하여 김식에게 보내주었다. 그러자 김식이 깜짝 놀라 말했다.
“이것은 진죽이요. 중국의 뛰어난 그림도 여기에 견주지는 못 하겠소.”
또 김식은 청구물목을 적어 영접도감에게 주었다. 칼 백여 자루와 촛대·시고(匙考)·궁전(弓箭) 등 무릇 자기 욕심나는 대로 적어냈다.
이에 비해 성종 19년에 온 사신 동월은 점잖았지만 깐깐했다. 동월은 조선에 홍치제의 등극을 알리는 반조정사로 임명되자, 명에 파견되어 있던 조선통사 박효순에게 성종의 나이와 조선까지의 거리 등을 물어 철저히 조사하여 출발하였다. 동월은 사신을 마중하는 조선 관료들의 모든 행동을 엄격하게 제한했다. 또 조선 왕이 조서와 칙서를 마중하러 나올 때 연(輦)을 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성종은 조서를 맞이할 때에는 연을 타고, 칙서를 맞이할 때에는 말을 타는 것으로 타협하였다. 동월은 의례를 준행할 때 실수가 없었고 성종이 보냈던 선물 등을 모두 거절하였다. 또 조선에서 제공한 선물을 거절하고, 의주에서는 사행단의 무역 행위도 금지했다.
1537년 중종 32년에는 명나라 사신단이 압록강을 건너는 것부터 시작해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동안 온갖 세도를 다 부렸다. 사신은 원접사 정사룡에게 요동관리를 보내 압록강의 얼음위에 위교를 세우게 하고 왕이 마중 할 때 지켜야 할 수칙 등을 미리 알려왔다. 또 사신이 연로하니 여인이 시중드는 일을 못하게 하라는 말에 종종은 급하게 남악(男樂)을 연습시키게 했다.
겨우 강을 건너게 하여 의주에서 연회를 여니 의주관장 박언량에게 앉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박언량이 접대하기 위해 앉았더니 사신은 앉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앉느냐며 (지랄을) 했다. 그리고는 주도를 지키지 않고 앉아서 술을 받고 연회 중에 옷을 갈아입으러 교자를 타고 숙소로 들어갔다 나오고, 백상루를 구경할 때는 돌아가는 길에 다시 구경하겠다고 하여 안주 관청에서는 백상루의 단청을 다시 해야 했다.
중종은 사신이 시 짓기를 즐겨하는 것을 보고 미리 문신들을 선정하여 각자 차운을 지어 놓고 기다리게 했다. 중화군에서는 각 고을 수령들이 미리 활 잘 쏘는 사람들을 뽑아 활쏘기 시합을 관람하게 하고 밤에는 사신들이 활을 쏘며 밤이 늦어서야 파했다. 이렇듯 평안·황해·경기 세 도의 백성들이 지난 겨울부터 본업을 중단하고 사신 영접을 준비하느라 보리농사를 망쳐야 했다. 그렇게 사신단은 몇 개월 만에 한양에 도착하였다.
『대명회전』 개정에 대해 약속을 받아야 했기에 중종이 직접 경회루에서 연회를 열어 대접하였다.
(『대명회전』에 ‘이성계는 이인임의 아들인데 이인임은 공민왕을 시해했고, 아들인 이성계는 우왕·창왕을 시해했다’고 기록 된 것을 고쳐달라는 요청을 수차례 했지만, 명나라는 약속만 하고 이행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사신에 대한 접대에 만전을 기하다 못해 중종까지 사신들에게 설설 기었다. 칙서가 아닌 조서를 받는데도 중종에게 오배삼고두를 요구했다.
그리고 이 시기 실록의 기사는 사신 접대에 관한 내용 뿐이다. 경회루 연회에서 사신은 중종에게 머리에 꽃을 꽂으라 하고 예복이 불편하니 평복으로 갈아입자고 하고, 후원을 함께 산책하자고 하며 연못과 돌다리의 이름을 새로 지으며 무례하게 굴어, 신하들이 얼굴을 붉혔지만 중종은 다 받아 주었다.
그리고 사신단이 바리바리 선물을 받아 돌아가면서 도중의 관아 숙소에 있는 벼루를 다 가져 갔다고 한다.
1598년 선조 때 명나라의 정응태가 ‘조선이 왜인을 불러들여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의 옛 지역 요동땅을 회복하려 한다.’며 명나라 신종에게 무고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이항복과 이정구를 변무사로 정하여 서기관 한호(한석봉)를 함께 보냈다. 명나라에서는 이들 변무사를 방해하기 위해 사신 숙소에 촛불을 켜지 못하게 했다. 하여 이정구가 부르는 내용을 한호가 받아 적고 아침에 보니 한 획도 틀린 것이 없었다고 한다. 이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를 지어 보이니 명나라 정응태가 파직 되었다.
주지번은 사신으로 와서 일체의 선물을 거절했지만 시로 접반사들을 골탕 먹였다. 주지번이 평양에서 시를 짓고는 관리들에게 내일 아침 날이 새기 전까지 평양에 대한 오언 회고시 일백 운을 지으라고 한다. 접반사들이 다 동원 되었다.
차천로가 술독을 안고 밤새 시를 짓고 한호에게 받아 적게 했다. 새벽에 차천로는 쓰러지고, 주지번은 촛불을 켜고 시를 읽었다. 부채를 책상에 두드려 탄복하며 읽어 부채가 너덜너덜해 졌다고 한다.
이때 허균이 누이의 시집을 보여주어 환심을 샀다. 주지번이 감탄하여 허난설헌의 시집을 명나라에 출판하여 유명해 졌다.
인조 3년(1625년)에 명나라 사신이 돌아가면서 횡포를 부렸다. 반송사 김상용이 황주에 도착하여
진주 2백 개와 은 3천 냥을 주었지만 또 산 사슴을 요구하여 구하기 어렵다 하니 사신이 은으로 대신 내놓으라 하였다. 또 지방 수령과 아전들을 마구 구타하여 황해도 일대가 쑥밭이 되었다.
다음에 온 사신은 황주에 도착해서 예물이 적다며 움직이지 않고 눌러앉았다. 원접사가 예물을 은으로 주었는데, 중간에서 빼돌렸다고 생각하여 트집 잡기를, 오배삼고두와 개독례가 없다며 움직이지 않았다. 경기 감사 이성구와 원접사가 개독례 때 주는 은 1만 냥과 인삼 3백 근 외에 은 2천 냥과 삼 20근을 더 주겠다고 하자 움직였다. 그러면서 주지번 때는 오배삼고두를 억지로라도 했으면서 자기에게는 하지 않느냐고 구시렁거렸다.
참고문헌 『실록·학산한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