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와 남은 형제는 조선 개국 1등공신이다.
남은은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을 폐위시킨 장본인이다. 하지만 정도전과 뜻을 같이하다가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 의해 처형되었다.
남재는 평소 이방원과 친하였는데, 동생 남은의 일로 벌벌 떠는 것을 이방원이 친히 숨겨주었다. 남재의 졸기에 보면,
‘.........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고 시세에 밝고 ........ 개국 공신이 되자, 세도를 믿고 남의 노비를 많이 탈취하였다.
변정도감 제조 때에, 어떤 사람이 남재를 고소하니 남재가 성을 내어 다른 일로 (딴지를 걸어) 핍박하니, 그 사람은 분해서 죽었다.
남재는 만년에 재산이 제법 부유하였다. 그런데도 그 아우 남실과 재산을 다투어서 종신토록 화목하지 못하여, 남실이 아침밥을 겨우 먹는데도 구휼하지 않았다.........’
변정도감은 불법으로 빼앗은 노비에 대한 송사를 담당하는 기관이다.
태조 7년에 권지교감 허지신이 상중에 스스로 상복을 벗고 변정도감에 송사를 하니, 간관이 탄핵하여 가두었다.
(실록을 보면, 상을 당하면 삼년상 기간 동안 관직도 수행할 수 없고, 전쟁 중에도 상(喪)을 당하면 집에 갔다는 기사가 많다)
12월에도 호조 전서 당성이 변정도감에 송사하다가 이기지 못하여 화를 냈다. 또 남재는 변정도감의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하여 태조에게 자주 꾸중을 들었다.
남재의 손자 남지는 일명 ‘조상이 나라를 구한’ 사람이었다.
세종 1년에 남재가 사망하자 세종이 친히 거둥하여 조문할 정도였다.
세종 9년에 남지는 효령대군의 시양부(侍養父 - 성씨가 다른 사람을 양자로 들인 것)인 방여권의 아내 권씨가 사망하자 이맹유와 남지가 그 재산을 가로채려 그 집의 노비문서와 토지문서를 빼돌리고, 효령대군이 방여권의 시양자(侍養子)가 아니라고 사헌부에 거짓으로 고했다.
사헌부는 이것을 받아들여 엉뚱한 사람을 고문했다.
하여 효령대군 집 여종이 신문고를 울리자 의금부에서 조사하였다.
세종은 관련자들을 파면하게 했지만, 남지는 개국공신의 자손이므로 논죄하지 말라고 했다.
그 외에도 남지는 여러 일에 연루되었지만 혐의를 피했다.
또 세종 12년 10월에 남지가 연루된 사건이 있었다.
숙선옹주 안씨(태종의 후궁, 세종3년에 숙선옹주로 봉작됨)가 영평군 윤계동과 집터를 가지고 다투다가 고소장을 사헌부에 제출했다. 사헌부에는 일반 부녀자들의 소송 문제로 생각하고 처리하여, 한성부로 이첩했다. 남지가 서류를 보고 고소인을 狀氏(문서 장, 각시 씨 – 아녀자라는 뜻 같음)라고 적어놓은 것을 바로잡으러 가면서 도중에 만난 사헌부집의 정분에게 누설했다. 사헌부에서는 공문을 도로 회수하여 그 글자를 지우고 돌려보냈다.
이에 사간원에서 세종에게 요청하여 관련자들을 의금부에 잡아들였다.
하지만 세종은 이것을 문제 삼지 말라고 명했다.
그래도 처벌을 요청하자 “사헌부 관원만 파면하고 유배 보내고, 남지는 공신의 손자이니 역시 문제를 삼지 말라.” 하였다.
세종의 총애를 받아 승승장구 하던 남지가 경기감사 때 첫째 딸이 세종 15년에 임영대군과 혼인하였는데 이혼 당했다.
세종이 중신들을 불러 말하기를
“임영 대군의 아내 남씨는 나이가 12세가 넘었는데 아직 오줌을 싸고 눈빛이 바르지 못하여 혀가 심히 짧고 행동이 놀라고 미친 듯한 모습이 있기에, 병이 있는 줄 의심하였으나, 감히 말을 내지 못하고 있은 지가 달포나 되었다. 근일에 자세히 보니 인중과 이마에 뜸자국이 있어 알아보니 어릴 때 미친병이 생겨 치료받았다고 한다........ 내가 눈앞에서 두고 보았더니, 행동이 방자하여 주위에서 웃었으나 조금도 괴이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니, 과연 소문과 같다....... 의논하여 아뢰라.”
이렇게 병이 있는 딸을 왕자와 혼인 시키고 이혼 당했는데도 남지는 경기감사 직을 계속하다가 형조 우참판으로 제수된다.
두루 관직을 거쳐 문종 때는 좌의정에 오른다.
그리고 남지의 둘째딸과 안평대군의 아들 이우직과 혼담이 오간다.
이때 남지는 안평대군에게
“맹인 술사 김학로에게 점을 치니, 두 딸의 운명이 척박하다고 합디다. 큰딸은 임명대군에게 시집갔다가 이혼하여 혼자 살고 있고, 작은 딸은 외모가 모자랍니다.”
하고 말했다.
하지만 안평대군은 혼담을 성사시킨다.
이듬해 1452년 남지는 풍을 맞아 말을 못하게 되었다.
다음해 계유정난 때 안평대군과 그 아들 이우직이 처형되었다.
남지는 풍병으로 말을 못해 화를 면했지만, 대역죄로 죽은 사위로 인해 사망 후에 시호를 얻지 못했다.
후에 손자 남흔의 상소로 성종 때인 1489년 시호를 받았다. 『소문쇄록』
그리고 남지 후손에게 안 좋은 일들이 생긴다.
남지의 아들 남윤은 세조의 총애를 받아 관직을 두루 거쳐 13년에 사은사로 갔다가 북경에서 사망했다.
남지의 동생이 태종의 부마 남휘인데, 남휘의 손자 남이는 세조 때 권람의 사위가 되고 세조의 총애를 입어 승승장구하다가 예종 때 누명을 쓰고 대역죄로 죽었다.
남지의 손자 남흔은 성종 11년에 효령대군(당시 84세)의 첩 매화와 간통한 죄로 논죄 되어 유배되었다.
남흔은 성종 23년까지 관직을 살다가 사망했다.
남흔의 아우 남경은 연산군 때 악명 높은 탐관 탑3인 삼맹호의 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