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엄마가 발견하길 바라며
"딱 세편만, 딱 세편만 쓰면 알려줄게."
요즘 통화할 때 마다 너의 브런치 글은 어디서 찾아볼 수 있냐고 재촉하는 엄마한테 약올리듯 이야기한다.
전문지에서 에디터를 하던 시절도, 석사논문을 쓰던 때에도 피곤하다며 기가 막히게 내 글 읽는 것을 피하던 엄마다.
"얘, 파리에서 보물 찾기, 이 사람 너 아니야? 어쩌면 기가 막히게 너랑 생각하는게 똑같니?"
"엄마, 난 파리에 살지도, 보물을 찾으러 다니지도 않아"
"정말 아니니? 그저께 또 읽어봤는데, 꼭 너 같은데.."
나도 브런치에 글을 몇편 쓰지 않은 주제에, 엄마한테 딱 세편만 써서 올리시면 알려드린다고 했다. 엄마는 왠지 쓰라는 글은 안 쓰고, 저녁 때 마다 방대한 브런치 해외거주자들의 글 무더기에서 보물찾기를 하고 계신 것 같다.
우리 가족은 긴 치유의 과정에 있다.
80년대생 우리에겐, "가세가 기울"거나 "가정파탄", "트라우마" "아빠의 부도"와 같은 주제들이 대학시절 술자리에 어김없이 떠오르던 고백들이었다. 국제외환 위기 사태나 세월호 같은 같 큰 사건 뿐만 아니라, 사회보장제도의 부족으로 인한 사기, 사고, 건강악화, 누구든 겪어본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그 이후의 긴 치유 과정에 대해 우린 생각해 봤을 까?
치유과정은 수동적이지 않다. 능동적이어야 한다는 기본 방침이 있다. 하지만, 그 호흡은 아주 길 수 있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집은 20년째 치유과정에 있는지도 모른다. 인원수가 많다면, 각자의 일정에 맞춰도 된다. 그 인원들이 꼭 붙어 있을 필요도 없다. 우리가족의 경우, 딸 하나는 미대륙으로 딸 하나는 유럽에 정착하면서 부모님은 한국에 남겨두고 흩어져 살고 있지만, 떨어져 있는 것이 오히려 이 지난한 과정에 도움이 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치유는 아주 오래 걸리기 때문에, 모든 초월적인 힘을 다 끌어모아써도, 도루묵인 상태로 여러번 돌아오는 악순환을 겪을 수 있다. 하지만 괜찮다. 다시 힘을 끌어모으면 되기 때문이다. 삼년에 한번, 오년에 한번,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좌절할 수 있다. 하지만, 암흑 같은 좌절 속에서도 반짝 거리는 작은 이정표들이 있다.
이정표에 대해서 말하자면, 모두가 모인 온전한 평온한 가족식사 (우리집으로 말하자면 10년이 걸렸다), 서로 싸우지 않고 기분 좋게 통화를 마치는 것, 각자 곤경에 처한 일이 있어도, 때로는 눈감고 모른척 하기. 산에 다녀왔다고 생기 있는 엄마의 얼굴을 보는 것. 아빠가 보내 준 용돈, 그리고 매달 어김없이 들어오느 환급금. 언니와 적어도 일년에 두번씩은 통화를 하기로 약속하는 것 (새해때 한번, 나와 형부의 생일 사이에 한번). 먹고 싶은게 있으면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레시피를 바로 알아낼 수 있는 것.
그 중 가장 큰 이정표는 아마 우리가 글을 다시 쓰게 된 것이 아닐까? 우리의 과거를 대견하게, 또는 가엽게 봐줄 수 있다는 것. 상처가 되는 일을 겪에 된 사람은 현재, 미래, 과거 순으로 일을 쳐내야 되는 기로에 서게 된다. 먹고 살만해지면, 앞으로 먹고 살 방법을 고민하지만, 그마저도 조금은 숨 쉴틈이 생긴다면, 애써 부인하고 싶었던 과거의 낱장들을 들쳐보며, 오늘의 시점에서 다시 정리하며, 애썼다고 인정하는 순간이 온다.
낯선 도시에 와서 살기시작한지 일년, 한국을 떠난 후 지난 십년동안 꼬낏꼬낏 모아뒀던 영수증을 드디어 전부 버렸다. 언제 누가, 무슨 연유로 달라고 할지몰라 갖고 있던 것들. 혹시나 이 종이가 없으면 서류처리가 꼬여 더 이상 이곳에 살 수 없게 되지 않을 까 두렵던 것들. 쓰지 않는 일기장이 부끄러워, 언젠가는 언제 무엇을 했는지 다시 적어보리라, 가계부를 정리하리라 결심하던 것들. 전부 버리고 나니, 아무렇지도 않다. 그런 기억들은 이제 내 방식으로 다시 써 내려가면 된다. 엄마의 이야기도 곧 브런치에서 마주하길 빌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