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숙

by kurnau

비가 삼십오일째 매일 온다. 유명한 우기지역인 이곳 뿐이 아니다. 50년대 이후로 전국이 최장의 겨울 '장마'를 맞이하고 있다.


오후 다섯시면 컴컴해지는 겨울을 잘 버티다 보니, 어느덧 여섯시, 일곱시가 되도 하늘에 노을빛이 잔잔히 남아있다. 버티기 위해서는 닭백숙, 쇠고기 무우국, 향신료가 진한 쿠스쿠스, 등등 진한 국물에 녹두전, 김치전, 호박전, 장기간 묵혀둘 수 있는 식료품 위주의 전을 많이 먹는다. 장터에는 늙은 호박, 양배추, 순무, 고구마 등이 주를 이룬다. 포만감은 말할 것도 없으며, 아무리 돌려깍아먹어도 양이 쉬이 줄지 않는다. 찌고, 삶고, 구워먹는 달큰한 맛도 매력이지만, 요리 중 빼먹는 조각들의 시원하고 아삭아삭한 맛이 지긋지긋한 비에 위안이 된다.


저녁 10시 전후로 어김없이 가로등이 꺼진다. 시계소리외에는 온전한 적막이다. 산턱 중간쯤 올라와 있어, 하늘이 게는 날이면 별이 수 없이 많이 보인다. 비와 구름과 비구름이 겐 하늘이 하루에도 삼십번씩 바뀐다. 새벽에 침대에서 눈을 뜨고 천창을 통해 하늘을 올려다보면 심호흡 몇번을 하는 시간에 하늘이 완전히 게었다가 다시 구름으로 가득해지기도 한다.


이 긴 겨울동안 우리는 닭이 알을 품듯 병원을 오가고 있다. 며칠째 저녁 일곱시가 되면 간호사님이 똑똑똑 문을 두드리시고, 난 알공장에서 산란을 앞둔 닭처럼 주사를 맞는다. 며칠에 한번씩 아침 일찍 찾게 되는 난임클리닉에는 엄마가 되고 싶은 동료들이 나란히 앉아 채혈과 초음파를 기다린다. 몇주만 더 버티면 이 길고 긴 견딤의 끝을 알 수 있게 된다.


아침이면 따뜻한 물을 먹고, 만주씨의 도움을 받아 몸을 푼다. 이곳 저곳 쭉쭉 피다보면 잠이 서서히 깬다. 알레르기 치료제에 햇빛 비타님 까지 한사발 먹는 남편 옆에서 임신에 도움이 되는 영양제를 먹고, 강아지와 동네 산책을 나선다.


비가 온뒤로 뒷산에 산책을 자제하고 있다. 진흙탕이 미끄러울 뿐더러, 오랜 비에 고목들이 산책로를 가로막고 이곳 저곳 쓰러져 있기 때문이다. 대신 아스팔트길로 집들을 지나 정상까지 올랐다가 한바퀴를 돈다. 호주산 셰퍼드를 키우는 윗동네 할아버지는 어김없이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도시고, 그러다보면 꼬박 두번을 만나 인사하게 된다. 아내가 떠났다고 매번 이야기해주신다.


집에 돌아오면 마음을 잡고 이력서라도 쓰고 싶지만, 결국에는 아침을 먹고, 꽃에 물을 주거나 퇴비통을 뒤적거리다보면 점심밥을 하게 된다. 취업시장에 뛰어 들기 귀찮아 이력서를 미룬 만큼 점심밥은 거하게 차린다. 거하게 먹은 점심은 낮잠을 부른다. 주사를 맞기 시작한 이후로 특히 낮잠을 깊게 잔다. 햇볕이라도 좀 든다면 테라스의 평상에서 잘텐데, 아직은 추운 감이 있다. 대신, 침대에 누군가 먼저 가있으면, 그 뒤로 강아지와 남은 사람이 쪼르르 따라 들어가게 되있다. 점심낮잠이 끝나면 집안을 빙글빙글 돌거나, 동네 카페에 가서 차를 한잔 하고 돌아온다.


오후 다섯시 반이 되면 남편이 어김 없이 강아지를 데리고 동네 산책을 떠난다. 그러면 나도 그 옆을 열심히 쫓아간다. 날이 좋으면 바닷가에 나가 강아지가 친구들과 놀지만, 요즘은 여전히 아스팔트길이다. 저녁밥을 하려고 이것저것 꺼내다 보면, 간호사 선생님이 오신다. 주사를 먹고, 저녁을 먹고, 치우면, 남편이 불을 떼준다. 나도 불 뗄줄 알지만, 남편이 뗀불은 특히 따뜻하게 활활 탄다. 강아지와 셋이 그 앞에 뭉게다보면 어느덧 잘 시간이 된다.


누구든 삶이 극단적으로 바뀌는 지점이 있다고 한다. 이년전만 해도 지금의 내 모습을 난 상상 할 수 없었다. 이곳에는 화려한 음식도 뜨거운 모래사장도 없다. 시장에서 매번 사 먹는 농도가 진한 겨울 야채들 처럼 한번에 다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조금씩 매일 이렇게도 먹어보고 저렇게도 먹어보는 수 밖에 없는, 그런 자칫 진부해보여도 안정된 곳이다. 더 큰 도시를 떠나 더 작은 도시로 와서 가족을 만들려고 하는 과정이다. 일을 하지 않는 내 모습 외에는 그 어느것도 이 평온을 깰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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