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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질바질 May 21. 2024

봄을 버무립니다.

“관리사무소에서 안내 말씀드립니다. 오늘은….” 며칠 전 엘리베이터 공문으로 공지했던 제초작업을 한다는 방송이 흘러나온다. 날이 따뜻해지고부터 풀들이 무럭무럭 자라더니 제멋대로 훌쩍 자라 보이긴 했다. 아파트만 제초작업에 여념이 없는 시기인 줄 알았는데, 길가도 여지없었나 보다. 어제까지만 해도 도서관 가는 길가에 건실하게 자리 잡고 있던 쑥이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쑥이 있던 자리가 말끔해진 것을 보자 봄이 가는구나 싶어졌다. 그리고 며칠 전에 먹었던 쑥 버무리가 떠올랐다.     


한 달 전 즈음일까. 어머니가 “쑥으로 전 해서 먹으면 맛있어.”라며 직접 캐신 쑥과 미나리를 주셨다. 미나리 전은 알았어도 쑥도 전으로 먹을 수 있다니! 반신반의하며 어머니 말씀대로 부침가루, 달걀을 넣고 부친 뒤 들기름을 겉에 살짝 발라주었다.(들기름으로 구우라고 하셨지만, 발암물질에 조금 예민한 편인 나는 황탯국을 끓일 때만 들기름을 가열하여 조리한다.) 쑥개떡을 먹는 것 마냥 고소하고, 향긋한 쑥 맛이 좋았다. 어릴 때는 쑥떡도 정말 많이 먹었는데…     


어릴 적에 쑥을 캐러 다닌 기억은 없지만, 엄마는 해마다 쑥을 참 많이 캐러 다니셨다. 그리고 그렇게 나온 쑥으로 절편을 종종 해 먹었는데, 엄마가 방앗간에서 만들어온 흰색 쌀 절편과 진한 녹색을 띠는 쑥절편 두 가지를 번갈아 가며 미술학원에서도 행복하게 먹었던 기억이 있는 걸 보면  엄마는 정말 떡을 많이 하셨던 것 같다. 떡과 함께 엄마는 거의 매년 쑥 미숫가루를 방앗간에서 만들어오셨다. 나는 집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옥색 식탁 벽면에 붙어있던 엄마 혼수 거울 앞에서 “안녕하세요~ 오늘은 미숫가루를 만들어 볼거에요오~”라며 미숫가루를 타 먹는 요리 방송을 하였다. 한 번으로 양이 부족할 때는 다시 재연해 보겠다며 무한 방송을 이어나갔다.     


어머니가 캐셨다는 쑥은 미숫가루를 해먹을 정도 양은 아니었지만 쑥 전을 두 어번 해 먹었는데도 꽤 많이 남았다. 무엇을 해 먹을까 하며 매번 쑥 요리를 미루다가 한살림 야채코너에 ‘쑥 버무리’ 하는 방법이 붙어있는 것을 보고 쌀가루를 구매하여 쑥 버무리를 해보았다. 아무래도 어머니가 주신 쑥이 어리다 보니 향이 날까 싶었는데, 찜통을 열어보니 은은한 쑥 향이 부엌으로 퍼져나갔다.     


설탕과 소금양이 조금 아쉬웠지만, 나는 그럴저럭 먹었는데 남편은 그렇지 못했다. 혼자 먹기엔 많은 양이라 엄마에게 드실지 물어보니 좋아하신다. 안 그래도 이팝나무를 볼 때마다 쑥 버무리 같다 생각했다고.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팝나무들이 찜통에 들어가기 전 쑥 버무리 같아 보이기 시작하면서도 이팝나무를 보며 쑥 버무리 같다고 생각한 엄마 때문에 웃음이 낫다. 엄마의 생각이 전염된 것일까. 아니면 나태주 시인의 에세이 ‘꽃이 사람이다’를 읽고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아서일까.     


도서관에서 돌아오는 밤 길. 언젠가부터 드문 드문 보이던 네 잎클로버들이 어느새 군락을 이루어 소복하게 꽃을 피웠는데, 그 모습이 쑥 버무리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가로등 하얀 불빛 아래 클로버 꽃들은 정말 새하얗게 보였고, 초록 클로버가 아니었다면 갓나온 백설기 같아 보였다. 클로버 하면, 어릴 적 이모가 만들어주었던 꽃반지만 떠올렸는데 이제는 이팝나무를 보고 쑥 버무리 같다고 한 엄마도 생각 날 것 같다.


집에 백설탕이 없어 마스코바도를 넣은 까닭에 조금은 갈색빛이 도는 나의 쑥 버무리는 단 맛이 없는 듯하면서도 천천히 씹으면 나는 단맛과 쑥향이 좋았다. 집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이 맛. 봄 간식으로 용용이와 쑥 버무리를 같이 먹는 날이 빨리 찾아오면 좋겠다. 뉘엿뉘엿 흘러가는 봄아, 내년엔 용용이와 함께 맞이할게. 행복한 노오란 볕과 함께 우리를 다시 찾아와 주렴.



쑥 버무리 찌기 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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