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215페이지
울리가 움직인다. 스스로 만든 경계에 굳게 뿌리내린 것 같이 보였던 그에게 천년 제국이 찾아온다. 꿈과 현실, 이념과 행동, 수학적 논리와 감정의 날카로운 경계를 스스로 창조하고, 모두를 시니컬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울리히의 사고는 1권과 2권을 지나 3권에 이르러 서서히 변화한다. 여전히 사고 영역의 파동이지만, 우리가 아는 통상적 행동 변화로 이어지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울리히에겐 지극히 평범한 행동이더라도 그 행동을 추진하는 사고는 달라질 것이다. 사고와 행동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행동이 사고를 추진하고, 사고는 행동을 만들고, 먼저 이루어진 행동에 도덕적 근거를 부여하는 것이 사고이기도 하다.
울리히의 변화는 그의 여동생 아가테에 의하여 추동되는데, 많이 교육받지 못한 아가테에게 설하는 그의 경계적 지식은 그녀의 행동을 촉발한다. 하지만 울리히의 사고 속에는 이미 행동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을지 모른다. 아마도 소설의 시작 부분에서 보나테아에게 보여주는 성적인 충동이 울리히에게 자라고 있던 행동의 씨앗이라고 읽힐지 모르겠다. 아가테의 무심한 행동은 그의 오랜 경계적 사고를 자극하고, 천천히 그는 그의 사고를 변화시켜 갈 것이다. 여기서 아가테의 행동은 2권의 주축을 이루는 이념의 화신 ‘디오티마’와 대비를 이룬다. 사람은 이념보다는 행동을 통해 천년제국에 이르는 것인지 모른다. 울리히의 기이하고 복잡한 사고는 단순한 아가테의 행동에 의하여 분해되고 해체되어 단순화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