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13장 ‘빈에 온 루카치’ 19장 ‘현실의 언저리에서’
다뉴브의 발원에서 시작된 작가의 여정은 이제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이르렀다.(책의 맨 앞, 2페이지에 펼쳐진 지도에서 빈은 왼쪽 페이지에 위치하므로 여행은 아직 반에도 미치지 않았다.) 다뉴브에 포섭된 도시를 따라 작가의 관찰과 사유가 만든 삶에 대한 통찰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카카니엔의 수도, 침묵의 도시 빈에 다다랐다. 나 역시 상류에서부터 다뉴브를 따라, 그의 방대한 지식의 조각들을 듬성듬성 건져 올려, 그 정보를 탐색하고, 각각을 꿰어가며 헐레벌떡 그의 뒤를 숨 가쁘게 쫓아 울리히의 도시 빈에 이르렀다. 뒤쫓아오며 담았던 작가의 지적 조각에 대한 정보는 나의 뇌용량을 초과하여 뻐근한 두통을 머리에 남긴다. 미처 정돈하지 못한 몇몇 정보는 내게서 미끄러지고 기억의 스쳐간 손님으로 버려질 것이다. 아쉽다. 두 번, 세 번 더 읽으면 손님들은 기억의 집으로 다시 돌아올까?
제4부 13장 ‘빈에 온 루카치’ 19장 ‘현실의 언저리에서’ – 클라우디오 마그리스는 날카로운 이성의 서늘함으로 루카치를 평가하고, 그런 서늘함은 포스트모던의 불씨를 댕긴 니체의 통제되지 않는 에너지, 집단 리비도의 불분명한 흐름에 패퇴될 수밖에 없음을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이런 대립의 혼란 속에서 자기부정의 씨를 품을 수밖에 없었던 슘페터에 대해 이야기한다. 수학적인 엄격한 합리성의 가치는 사회주의자들이(혹은 공산주의자) 과소 평가했던 ‘욕망’에 의하여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필연을 간직하고 있다. 내가 니체에 대해 ‘자본주의의 부역자’라는 의심을 가지듯, 슘페터는 자신의 쓰지 않은 소설(초고)에서 합리와 욕망의 모순을 품었다. 그리고 이런 혼란의 상황에서 특성 없이 부유하는 어쩔 수 없는 개인과 움직이 듯 움직이지 않는 사람과 집단을 표현한 것이 로베르토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다. 그리고 이 모두는 침묵의 도시 빈에서 이루어진다. 개인적으로 여기까지 읽으며, 빈에 가보고 싶어졌다. 위대한 학자와 소설가들이 통찰했던 빈의 動中靜을 직접 느끼고 싶어졌다. 어쩌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모습은 현대의 다른 모든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는 비슷한 양태로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계속 다뉴브와 같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