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에도 자격이 있는 거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이 빌딩 로비 한 번 밟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했는 지 알아? 여기서 버티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과 좌절을 뿌렸는 지 알아? 기본도 안 된 놈이 빽하나 믿고 에스컬레이터 타는 세상…그래 뭐, 그런 세상인 것도 맞지. 그런데…나는 아직 그런 세상 지지하지 않아.” 드라마 <미생>에서 이른바 ‘낙하산’으로 인턴 입사하게 된 장그래 인턴에게 오상식 부장이 던진 말이다.
중학교 시절의 나는 <미생>을 보며 ‘역시 사람은 능력이 있으면 얼마든지 일을 잘 할 수 있어, 대학교 학벌은 그냥 간판에 불과해!’ 라고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중학교에서 나름 상위권 내신 성적을 받고 전국단위 자율형 사립 고등학교로 진학했던 나는,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중간/기말고사 한 번에, 교내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 한 번에 사활을 걸며 소위 말하는 ‘명문대’에 진학하는데 혈안이 되었던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렇게 고등학교 3학년 시절 겨울이 되었고, 짜 맞추기라도 한 듯 최상위권 전교 등수에 위치한 친구들부터 의대, 서울대, 과학기술원, 연세대, 고려대에 진학했다. 중상위권 어딘가에 있었던 나는 순서표라도 뽑은 듯 성균관대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렇게 12년간의 의무교육을 마치며 내 무의식에는 ‘점수가 곧 그 사람의 능력을 나타내는구나’ 라는 키워드가 새겨졌다.
브런치에 작성 할 첫번째 글을 작성하기에 앞서 지금 현재, 우리 교육에 제시할 수 있는 시사점이 무엇이 있을지 고민해보았다. 머리 속에 떠오르는 키워드는 주입식 교육, 무한경쟁, 의대만능주의, 서울대만능주의 등이었다. 이번에는 굵직한 키워드를 바탕으로, 내면의 깊은 곳을 파고들며 조금 더 깊이 고민해보았다. 이런 우리 교육의 한편으로는 씁쓸한 양상이 어디서 기인한걸까? 라는 물음의 답을 고민해보던 중 능력주의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초중고 교육에서는 시험성적과 등급이 학생의 능력을 정량적으로 나타내는 거의 유일한 척도이고, 이 척도에 따라 진학하는 대학의 간판이 바뀌고, 나아가 전문직, 대기업 등 소위 말하는 ‘좋은 일자리’를 가질 확률을 높이게 되기에, 이를 쟁취하기 위해 교육열이 불타고 무한경쟁이 불타는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 ‘점수’라는 정량화된 지표는 누군가를 평가하는 유일한 척도로 작용하는 요소일까? 고등학생 때에는 고등학교 내신 등급, 수능 등급 및 백분위, 성인이 되어선 토익, 토플, 오픽 등 어학 시험의 높은 점수, 대학 평점 평균, 대외 공모전 수상 여부 등의 각종 숫자가 한 사람의 능력과 완벽히 정비례하는가? 이에 대한 나의 답은 ‘그렇지 않다’ 였다. 그리고 한순간에 모든 것이 변하긴 어렵겠지만, 차근차근 조금씩 작은 단위에서부터 변화의 발걸음을 디뎌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 그 첫걸음은 나 스스로의 인식을 개선해 나가는 과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능력 있는 사람에게 그 자격에 맞는 권한을 부여한다’라는 능력주의 기조는 분명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말은 실제 교육현장에서는 하나의 카르텔처럼 작용한다. 수시전형 호황과 더불어 학생부종합전형의 대유행시기가 찾아왔고, 진학 실적을 내야하는 3학년 학년부 입장에선 명문대 합격의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는 학생에게 많은 자원을 투자한다. 내신 성적이 높은 학생들에게 양질의 과목별 세부능력 특기사항을, 다량의 수상 실적을, 명문대 추천서를 제공한다. 상대적으로 성적이 낮은 학생들은 목소리를 낼 수 없다. 그저 ‘능력주의에 따라 능력 있는 학생에게 그에 맞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라는 말로 방어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최상위권 학생은 1학년때부터 경시대회, 선행상, 모범상, 심지어는 교내 포스터 그리기, 표어 짓기 대회 등 각종 대회의 수상을 휩쓸며 약 20~30개의 수상경력을 갖추게 된다 (절대적인 수치는 아니지만,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의 전교권 친구 생기부를 보았을 때, 일반계 고등학교에 진학한 중학교 동창의 증언, 그리고 내가 고3 학생들의 대입에 도움을 주기 위해 여러 생기부를 살펴보았을 때 최상위권 학생들은 평균적으로 저정도의 수상 경력 숫자를 갖추었다). 이렇게 생활기록부라는 서류에 남는 기록은 학생을 ‘성적 n등급, 수상 n개, 생기부 n장’ 이라는 정량화된 객체로 만들게 된다. 이와 앞서 언급한 카르텔 형성 상황이 맞물리면서 비교과 활동의 부익부 빈익빈으로 이어지고, 이 차이들이 3년간 쌓이고 쌓여 ‘명문대에 진학할 자격을 갖춘 능력 있는 학생’과 ‘그보다 능력이 부족한 학생’ 사이 간극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대입 결과의 차이를 만들게 되는 앞서 언급된 요소들이 ‘능력주의 척도의 맹점’이라 생각한다.
학생 한 명 한 명은 나름의 개성과 능력을 지니고 있고, 아직은 발굴되지 않았지만 언제든 개화할 수 있는 잠재력의 씨앗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시험 점수와 내신 등급, 문서화된 생활기록부의 한계를 넘어 학교 교육에선 어떻게 학생이 스스로의 삶을 가꾸고 계획하여 사회인으로 나아가도록 도울 수 있을까? 나는 학교에 대한 인식을 천천히, 밑바닥부터 개선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고등학교를 대학교로 향하는 관문으로 대하는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 학교라는 장소를 공부를 배우고, 시험을 치르고, 점수로 서열을 매겨 능력에 따라 활동하고 상급 학교로 진학하는 훈련소가 아닌, 성인이 되어 사회에 나가기 전, 소규모 공동체 속 생활을 통해 삶을 가꾸고 배워 나가며 앞으로 나아갈 ‘준비’를 하는 배움의 터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선 학생의 다양한 흥미와 재능을 존중하고, 이를 스스로 발굴하고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돕는 교수자의 조력 또한 중요하다.
특히 교수자의 역할이 중요해지는데, 나는 교수자의 인식 또한 개선해야 올바른 미래 교육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한다. 고전적 학교에서는 교수자를 ‘지식 전달자’ 혹은 ‘평가자’로 인식했다. 이런 학생과 교사 간의 수직적 관계 형성으로 인해 정서 ∙ 유대적 관계를 형성하기 어려웠고, 이 수직적 관계는 곧 정량평가 강화, 능력주의 카르텔 형성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나는 학교에서 학생들이 교사와 강남구 대치동 유명 학원의 수능 강사를 비교하며 교사의 지식 전달의 능력을 비하하거나, 본인에게 좋지 않은 평가를 했다는 이유로 뒷담화를 하는 경우도, 혹은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교사에게 아첨을 하는 경우도 자주 봐 왔다. 이는 모두 교사를 상급자 내지 관리인으로 인식하는 관점에서 기인한다. 교사는 ‘감독’이 아닌 한 명의 ‘코치’가 되어야 한다. 즉, 교사는 누군가를 평가하고 관리하는 상급자가 아니라,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하여 함께 성장해 나가는 학습 동반자가 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학생 개개인의 적성을 탐색하고 잠재력을 발굴하기 위해 함께 방향을 제시하고, 어려움을 겪는다면 선배로서 해결의 단서를 제공하고, 궁극적으로는 1년간 학습자와 함께 동행하는 코치이자 러닝메이트가 되어 학생과 함께 나아가는 것이 이상적이다.
내 주장에 혹자는 ‘공부 잘하는 놈은 공부할 수 있도록 밀어줘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러면 점수와 등급 외에 뭘 보고 대학에 진학을 시킬 것이냐’ 라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물론 맞는 말이다. 나 또한 능력주의의 맹점에 대해 지적하고 이를 탈피해야 한다 주장하지만, 현재 사용 중인 평가 방식인 정량적 평가 방식을 완벽히 대체할 수단과 방법이 무엇이냐 물으면 명쾌히 답하지 못한다. 조금 더 공부하고, 조금 더 고민하고, 이론을 공부하기도 하고, 현장에서 살펴보는 경험과 지식이 쌓인다면 얽힌 실타래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현재 사범대학 학부 2학년을 보내고 있는 나는 차근차근 다양한 이론을 접하며 공부하고, 그 이론 속에서 스스로 생각할 지점을 찾아 고민하고, 나아가 나만의 길을 구상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구상을 구체화하긴 위해선 이론에 대한 탐구와 더불어 교생실습, 나아가 학교 현장에서의 근무를 통해 이론과는 또 다른 현장에서의 무형의 지식을 습득하고, 이를 변형해 나만의 것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내가 그린 배움의 터로서의 학교를 직접 구현해 나가는 과정이 실현될 것이다.
모든 학생들이 학교라는 배움의 터에서, ‘자격’과 ‘능력’을 평가하는 숫자라는 정량지표로 인해서 좌절을 겪고, 학습된 무기력함을 배워가지 아니하길 바란다. 학교가 학생들이 자신이 가진 낯선 꽃씨 같은 재능들이 무엇인지 탐색하고, 그 씨앗을 심어 정성 들여 물을 주고 가꾸어 개화시킬 수 있는 비옥한 텃밭이 되길 바란다. 더 나아가 이 땅의 모든 미생들이, 높게 솟아오른 대기업 빌딩의 문턱 앞에서, 숫자로 표현된 본인의 스펙과 능력지표로 인해 좌절하고 눈물 흘리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되길 소망하며, 나 또한 이런 사회를 꾸려 나가기 위해 밑바닥부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