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가는 약국은 밤늦게까지 운영하는 곳이다. 친구가 오늘 일이 있다고 대신 근무를 부탁해서 특별한 일도 없으니 대신해 주자, 생각했다. 집이 멀어서 난 저녁근무는 안 하고 있었으나 친구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저녁 시간 근무를 끝내고 퇴근 시간이 되었다. 준비하고 카카오지도 보니 내가 타야 하는 버스가 5분 뒤에 온다고 되어 있었다. 바로 앞이 버스정류장이다. 그러나 이 시간이 딱딱 맞는 게 아니다. 한 번은 카카오맵을 믿고 도착예정 2분 전에 나갔다가 바로 앞에서 버스가 휙 떠나버려 놓친 경험이 있다. 그렇게 버스를 놓치면 보통 15분 이상은 기다려야 한다. 그 후부터는 적어도 5분 전에는 나가도록 신경을 쓰곤 했다.
버스 도착시간 5분 전에 약국을 나섰다.
전광판에 내가 타야 하는 버스번호가 곧 도착으로 나왔다. 우잉? 이렇게 빨리? 벌써 도착이라니 이렇게 좋을 수가. 5분 후라 했는데... 여하간 기다리지 않아서 좋아하고 있는데 버스가 도착했다. 자세히 볼 것도 없이 탔다. 자리는 텅 비어 혼자 앉는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두어 정거장 지나가려는 찰나 창밖을 보자 방향이 이상함을 발견했다. 우회전하던 곳에서 직진하는 것이다. 앞에 글자가 눈에 뜨인다. 이런, 내가 타야 하는 번호가 아니었다. 아니 이럴 수가! 번호를 잘못 본 거였나?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헷갈린 것이었다. 나는 퇴근 때는 출근 때와는 다른 번호의 버스를 타게 된다. 무심코 약국 출근 시에 타는 번호의 버스를 탄 것이다.
이건 무슨 현상이람. 나이가 들긴 들었나 보다. 정말 황당한 일이다.
황급하게 멈춤 버튼을 누르고 버스에서 내렸다. 온 방향을 거슬러 달려갔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사이 내가 타야 할 버스가 지나가고 있었다. 안타까워라! 이번 버스는 놓친 거다. 한참을 걸어 약국에서 측정하면 한 정거장 지난 정류장에 겨우 도착했다. 그런데 이런 버스정류장은 처음이었다. 아무것도 없고 조그만 기둥에 조그만 전광판만 달랑하나 달려있다. 처음에는 버스 정류장이 아닌가 지나칠 뻔했다. 일요일은 버스 오는 간격이 더 길다. 방금 내가 타려는 번호의 버스가 지나갔으니 20분 이상은 기다려야 다음 버스가 오리라는 것은 예상은 했다. 어쩌겠는가! 기다려야지...
바람은 어찌나 부는지 마치 초가을을 연상시킬 정도로 기온이 차다. 얇은 바지에 얇은 웃옷을 입고 나온 걸 후회해 보았자 소용없는 일. 그나마 스카프라도 챙겨 둘렀으니 다행이다. 정류장에 버스 도착시간을 알려주는 전광판은 처음부터 계속 21분 기다리라는 표시에 변함이 없었다. 이건 또 뭐람? 고장인가, 아니다. 다른 화면은 계속 변하고 있는데...
일요일이라 거리는 아주 한산하니 정체되어서 시간이 변하지 않는 건 분명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다.
손과 발은 완전 얼음이다. 갑자기 배까지 쓰려오기 시작한다. 저녁을 안 먹어서 그런가 보다.
이 시간에 혼자 어두운 낯선 정류장에 서 있으려니 으스스하다. 그래도 정류장 앞에 자리하고 있는 자동차부품 파는 유리문에서 불빛이 새어 나온다. 가끔 남녀가 웃는 소리가 들려 유리문으로 힐끗 보니 맞은편에 앉아있는 누군가 하고 대화하는 아가씨의 환하게 웃는 얼굴이 보인다. 어둠 속에서의 두려움이 그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된다.
택시 부를까 하다 지하철역까지는 먼 길인데 요금이 많이 나오겠지. 그냥 기다려보자, 작정했다. 정류장에 내가 오기 전부터 있던 젊은 아가씨에게 물었다. 지하철역 이름을 대며 거기까지 가는 버스가 여기 몇 번 몇 번이 서느냐 물으니 모른단다. 그리고 하는 말. 전광판에 뜨는 버스 도착 시간이 맞지 않는단다. 하긴 아까부터 내 핸드폰 앱에 뜨는 시간과 여기 정류장 화면에 뜨는 시간이 맞지 않는 걸 느끼고 있었다.
아이고 못 산다. 손발은 얼음장이고 이제는 턱까지 부딪힐 정도로 떨린다. 같이 서서 동동거리던 아가씨마저 기다리던 버스 타고 가버리고
혼자 어둠 속에서 떨고 있었다. 드디어 거의 30분 만에 기다리던 버스가 왔다. 시간을 보니 11시 20분이다. 지하철역까지 빨리 가야 할 텐데. 한산한 거리를 왜 이리 버스는 천천히 달리는지 원. 낮에는 치열하게 속도 내며 잘도 달리곤 하더니만 이 놈의 버스는 느려도 한참 느려요.
어찌어찌 도착해서 지하철역을 달려 내려갔다. 이상하게 개찰구가 모두 닫혀있고 한 곳만 열어 놓았다. 그곳을 통해 달려가 보니 계단 내려가는 곳에 운행종료라는 팻말을 세워져 있었다. 아니 무슨 말 이래 12시까지는 운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정신이 아득했다. 집을 어떻게 가나. 이렇게 늦은 시간에 혼자 집으로 가려는 방법을 찾아 헤매기는 처음이다.
핸드폰으로 버스를 이용해 집까지 가는 방법을 찾아서 확인하고 역사에서 일하는 분들에게 물으니 에스카레이터 타고 한번 올라가면 버스정류장이 있으니 찾아보란다. 올라가 내가 원하는 버스가 서는 곳을 찾아는 갔지만 이 버스의 운행종료 여부는 알 수가 없지 않은가. 한숨이 절로 나온다. 지나가는 청년에게 물으니 한참 찾아보더니 운행종료란다. 아니 토요일 저녁인데 대중교통들이 이렇게 일찍 종료라니 이게 말이 되느냐고. 추위는 다 잊고 속에서 열불이 났다.
할 수 없이 사용하던 티맵으로 택시를 부르니 다행히 어둠 속에서 곧 택시가 나타났다. 구세주 같았다. 내가 서 있는 곳이 아니고 저 앞에 가서 선다. 택시가 달아나 버릴까 봐 손을 저으며 황급히 달려갔다. 이것마저 놓치면 절망이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택시를 타고 목적지를 다시 한번 말하는데 기사아저씨 얼마나 상냥하던지 한탄의 소리가 내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왔다. 택시가 그냥 떠나는 줄 알았다 하니 자기 핸드폰에 위치가 앞에 떠서 앞으로 간 것이라고 하며 손님이 원하는 곳에 더 가까이 가려한 것이란다. 고맙기도 하지. 내가 대중교통에 대해 불평을 해대니 주말에 보통 대중교통이 일찍 끊어진 것은 주 5일제 이후부터란다. 여하간 집에 데려다주는 택시에 앉으니 온몸이 풀린다. 택시조차 못 잡았으면 아마 지하철 주변에서 몸을 누일 장소 찾아 헤맸을 것이다.
이리저리 뛰었는데 내 생각과는 달리 3,000보가량뿐이 안 된다. 내 생각에는 만 보 이상이 되었을 거 같더구먼.
집에 도착하니 12시가 넘었다. 온몸이 아프다. 긴장하고 달리고 했으니 아프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따뜻한 이불속으로 그대로 들어갔다. 그러고 저러고 기다리던 그 버스정류장에서 택시 불러 타고 집에 왔으면 추위에 오래 떨지도 않았을 텐데. 택시비도 큰 차이 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판단착오이다. 이런 일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택시 타야겠다 생각하지만, 다음에도 이런 미련한 행동을 하게 될 예감이 든다. 이상하게 교통비에 돈 들이는 것에 알레르기가 있는 걸까 여하간 하루 근무비에서 몇만 원은 깨졌다.
2023/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