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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ustwons Apr 16. 2024

67. 스트레스의 근원

[독서와 생각]

67. 스트레스의 근원    

 

     스트레스의 근원 원인은 윗사람이 못살게 굴거나 아이가 말썽을 부리고 연인과의 관계가 깨지는 데 있지 않다. 영혼의 감각을 잃는 데에 있다. 그렇다면, 스트레스를 없애기 위해서 시도하는 모든 방법들은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스트레스는 우리가 영적인 본성을 거스르면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인식을 지닐 때에만 비로소 해소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영혼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영혼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를 일깨우고 영혼의 감각을 깊게 해주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다. 

  기도, 묵상, 성가 부르기, 요가, 단식, 선 등등. 그런데 많은 놀라운 일들 중 하나가 상실의 체험이다. 나는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을 상실한 사람들을 통해 영혼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깨우쳤다.

<할아버지의 기도/ 레이첼 나오미 레멘 지음>


  모든 생물들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사람은 더욱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사람만이 사회적 관계를 이루고 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스트레스는 외적 영향보다는 내적 갈등에서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 즉 영혼의 상처이다. 삶의 상실은 영혼의 상처이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생물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에덴동산(Eden Garden), 창조자 하나님이 동쪽에 한 정원을 계획하시고 아담과 여자를 거기에 살게 하셨는데, 그 정원의 이름을 ‘에덴’이라 불렀다. 여기서 에덴이란 ‘기쁨’이란 뜻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에는 특별히 아름답고, 풍요로웠을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이리나 어린양이 함께 지내고, 사자는 소처럼 짚을 먹으며, 누구나 자기의 집에서 살고, 해함이나 상함이 없었을 것이다. 정말로 하나님의 뜻대로 평화로웠던 것이다. 

  그럼 평화롭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1789년경에 일어난 프랑스의 시민혁명과 1830년 7월에 일어난 프랑스 시민혁명을 그린 그림, ‘사람들을 이끄는 여자’ 외젠 들라크루아가 그린 「자유의 여신」을 연상하게 된다. 자유의 여신이 들고 있는 깃발의 삼색, 적색, 흰색, 청색은 자유와 평등과 박애를 상징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 후에 곳곳에서 일어난 혁명들의 상징적인 심벌(symbol)이 되고 말았다. 봉건주의 제도가 무너지고 민중이 봉기하여 혁명이 일어나면서 사회주의 제도가 유럽에 보편화가 되어갔다. 

  한편, 기계의 발명으로 인해 면직공장과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산업혁명과 더불어 자본주의 사상이 주력을 잡게 되면서 빈부의 차의 갈등이 커지고, 이에 반하여 공산주의 사상을 추구하는 세력이 커지면서 인간사회는 혼란과 갈등이 심화되어 갔으며, 경제적 불황에 빠진 국가들 간에 제 일차, 이차의 세계전쟁을 겪어야만 했었다. 이로써 인간은 개인의 자유와 국가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면서 국제적 의식을 가지게 되었으며, 유엔(UN)과 국제보건기구(WHO), 등의 다양한 국제기구를 구성함으로써 인류문화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서 민주주의 사상에 대해 생각을 잠깐 해보면,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는 민주주의는 먼저 국민의식에서 비롯된 사상으로 그리스어인 데모스(demos)에서 유래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데모크라시(democracy)라고 표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 국민이란 국가적 차원에서의 국민이 아니라, 부족사회나 대가족제도, 농경사회와 목축사회에서 구성원으로서 ‘국민’이란 의미였을 것이다. 

  또는 성경에서 살펴보면, 아브람이 신내림(神來臨)에 의해서 부모를 떠날 때에, 그는 조카 롯과 몇 하인들과 함께 고향을 떠났을 때에, 그들은 국민의식으로 서로 협력하고 공동생활을 유지해 왔다는 것을 살펴볼 수가 있겠다. 그 몇 단서를 찾아보면, 후계자를 하인들 중에서 선택하려 했던 것과 아내 사라의 의견을 존중하여 사래의 여종에게서 자녀를 얻으려고 했던 것에서 국민의식을 찾아볼 수 있겠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내 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었니라.」(창 16:2)

「그러자 아브람이 말했다. “여호와 하나님이여, 제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제가 자식이 없으니 제 재산의 상속자는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될 것입니다.” 아브람이 다시 말했다. “주께서 제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으니, 제 집에서 난 하인이 저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창 15:2,3)     


  아브람의 가족집단에는 아내 사래와 조카와 하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이끌고 양 떼를 몰며 생활을 하였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브람의 가족의 국민들이었던 것이라 생각할 수가 있겠다. 그러면 ‘국민’이란 의미를 어떻게 해석할까? 고대 그리스에서의 국민의식은 부족과 대가족을 구성한 구성원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로 부족과 가족을 끌어갔으며, 이씨조선 시대의 가족처럼 가부장 중심제도로써 일인체제와 계급제도로써 다스리는 제도가 아닌 것이었다. 그렇기에 아브람은 아내의 말을 따랐고, 하인 중에 후계자를 생각하였던 것이었다. 이처럼 국민이란 동등한 자격으로 서로의 의사소통과 합리적인 관계가 성립되는 자격인 셈인 것이다. 이러한 국민적 의식이 점차 규모가 커지면서 국민중심의 민주주의 사상과 국가관이 형성되어 갔다고 볼 수가 있겠다. 그래서 미국의 16대 대통령인 에이브러햄 링컨은 민주주의 이념을, ‘국민의 민주주의, 국민에 의한 민주주의, 국민을 위한 민주주의 정부’라고 놀라운 정의를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링컨은 영국의 종교개혁자인 존 위클리프가 영어로 성경을 번역한 후에 한 말인, ‘이 성경은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통치를 위한 것이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라고들 말하고 있다. 어떻든, 민주주의나 국민의식은 성경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렇게 장황하게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표면적 현상이나 원인만 가지고 근본을 해결하려는 것에는 얼마나 오류가 많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매우 정확성을 자랑하는 과학의 지식들에서도 얼마나 오류가 있는지, 맹종하도록 유도하는 절대적 가치를 주장하는 과학이론들을 볼 수가 있겠다. 특히 진화론적 이론이나, 종(種)의 분류, 빅뱅론, 우주 팽창설 등등 그리고 인간의 전통과 문화에서도 얼마나 이념적 지배가 큰지를 단편적으로 이해할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면 진정한 평화는 무엇일까? 인류는 평화를 부르짖어 왔다. 그리고 인간은 평화에 대해 매우 중요한 인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평화’에 대한 이해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창조자의 평화이고, 다른 하나는 인본주의 평화인 것이다. 창조자의 평화는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인간의 자유의지와 평강을 중요시하고 있다. 그러나 인본주의 평화에는 제도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질서와 법을 최우선으로 한다. 

  그러므로 인본주의 평화에는 시대적 이념에 따라 해석을 달리하게 된다. 즉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평화와 공산주의 국가에서의 평화, 종교적 제도에 따라 평화, 좁게는 인간집단에 따라서도 평화의식이 달라진다. 

  특히 재미있는 예를 들면, 폭력집단, 깡패집단 같은 것에서의 평화는 절대적 복종에서 찾는다. 

  이토록 인류문명이 발달해 오면서 인간사회의 의식구조가 복잡해져 갔다. 그로 인해 인간의 불안 요소들이 다양해지면서 인간들은 다양한 원인에 따라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스트레스에 대한 인식도 다양해져서 보편화되고 일상적인 원인으로 받아들여져 갔다. 그러다 보니 ‘스트레스’의 종류도 다양하고, 반응도 다양해지고, 일상화되어서 인간에게 중요한 자유와 평화를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럼 스트레스(stress)는 무엇일까? 그 원인은 무엇일까? 먼저 사전적 해석으로는, 환경적응에 있어서 심리적, 신체적 긴장상태로써 나타나는 심장병, 위궤양, 고혈압 등의 신체적 현상과 노이로제, 우울증 등의 심리적 현상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일상적 표현으로써 긴장감, 불안감, 짜증 등으로도 이해하고 있다. 

  인간만이 스트레스가 있는 것일까? 동식물 같은 생명에는 없는 것일까? 이에 대해 여러 설들이 있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 나타나는 스트레스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동식물에도 환경에 따라서 생존을 위한 긴장 하리라 생각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동식물에는 인간처럼 의식하는 기능은 없다고 말하고 싶다. 만일 동식물들이 의식한다면 그들은 진화할 것이다. 또는 진보적 저항을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어떤 동물도 식물도 인간에게 진보적인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인간은 이러한 동식물과 전쟁을 해 왔을 것이다. 공상영화처럼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아니 창조자는 동식물들에게는 생물학적 반응을 통해 생존과 보존을 하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을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의식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존재인 인간에게는 생존과 보존에 있어서도 자유롭지는 않지만,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유의지,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품을 지닌 인간이 바로 창조자의 성품을 따라 창조된 존재란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인간에게 놀라운 것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창조자처럼 사랑의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랑의 힘’은 놀라운 것이다. 그 사랑은 인간에게 치유와 회복의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랑을 먹으며 산다.’고 현자들이 말하지 않는가? 

  또한 인간은 환경적 존재이기도 하다. 또한 인간은 관계적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인간사회를 형성하고, 이를 인간세상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이러한 인간세상을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관계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인간세상을 사랑한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6)


  이처럼 인간은 존귀한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와 평화를 함부로 훼손하거나 파괴하거나 빼앗아선 안 되는 것이다. 이제 인간에게 스트레스가 오는 이유는 바로 인간관계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려는 데서 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거꾸로 말하면, 인간의 자유와 평화가 깨지거나 손상을 입거나 간섭을 받거나 할 때에 인간은 스트레스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인간이 자유와 평화가 유지될 때나 보장될 때에 행복을 느끼게 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한 가지의 예를 들면, 인간관계가 파괴되면 인간은 불안을 느끼게 된다. 즉 사회적 고립, 가족붕괴, 소외의식을 느낄 때에 불안이 오고, 지속되면 인격적 이상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즉 치매라든가 난폭한 행동, 비인격적 행동을 보이게 된다. 특히 치매 같은 경우는 뇌를 스스로 가해(加害)하는데서 오는 것이다. 스트레스가 지속될 때에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인 자신을 가해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한 예를 들면, 어떤 일이 잘 안 될 때에 자신의 머리를 지어 박거나 때리는 행동을 볼 수가 있겠다. 이처럼 의식적으로 뇌의 활동에 가해하는 행동으로 인해 치매를 일으킬 수가 있게 된다. 이를 의식방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인간의 스트레스는 의식을 가졌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인 것이다. 이러한 스트레스가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이상현상을 일으키게 되어 심신의 질병을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단순한 약물처방이나 심리작용만으로는 스트레스의 근본을 해결할 수가 없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해결책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지하고 회복되어 유지할 때에 극복될 수가 있는 것이다. 스트레스의 가장 큰 원인은 간섭받는 것이다. 그리고 소외당하는 것이다. 이는 곧 자유의지에 간섭을 받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을 아는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절대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데 인간세계에서는 인간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간섭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어른들이 젊은이들에게, 상사가 아랫사람에게, 권세 자가 피지배자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면서 간섭하는 것이 바로 개인의 자유의지를 간섭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너, 이거 해야 돼!”, “넌 그러면 안 돼!”, “내 말 들어!”, “내 말이 맞아!”, “넌 내 말 안 들어?” “꼭 해야 해!”, “넌 내가 책임져!”, “내가 네 보호자야!”, “내 명령에 복종해!”, “넌 내 새끼야.”, “내가 널 낳았어!”, 등등.     


  얼마나 우리는 그렇게 남에게 명령하고 지시하고 강요하고 하면서 마치 자신이 절대자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것이 모두 아담이 선악과를 먹으려던 것과 같은 것이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권면을 할 수 있지만, 명령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관계란 서로 존중하는 관계인 것이다. 존중한다는 것은 상대의 의사결정을 존중하는 것이고, 상대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에 인간은 스트레스를 받거나 느끼게 되는 것이다. 또 한편 인간은 지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스트레스에 대한 이해와 해결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지각을 활용하여 바르게 인지하고 의식하는 데에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인간은 공동체 생활에서나 책을 통해서나 직간접경험(經驗)으로 지혜를 쌓아갈 때에 자신에게 오는 스트레스에 대해 해결하거나 헤쳐 나갈 능력을 지니게 된다. 인간에게는 환경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환경을 선택할 수는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인간은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지혜는 참되다. 거짓된 지식은 지혜를 해칠 뿐이다. 그러므로 참 지식을 쌓아야 지혜를 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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