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순종하는 신앙

[知言-욥기]

by trustwons


진리를 알자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


3. 순종하는 신앙


깨달음을 주는 성경말씀[욥기 10장]

〇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원통함을 발설하고 내 마음의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1절)

〇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 없나이다.”(7절)

〇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9절)

〇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권고하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12절)


깨달음의 글

빌닷은 욥에게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라고 말하자. 욥은 대답하기를, “내가 진실로 그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 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하였다.

빌닷이 욥에게 위로하여 말하지만, 욥은 자신의 고통이 숨을 쉬는 것보다 힘듦을 한탄하였고, 친구의 깨우침을 욥이 모르는 바가 아니다. 하나님이 욥처럼 의로운 자가 없느니라 한 것은 욥이 전혀 죄가 없는 연고가 아니라, 그는 하나님이 지은 피조물인 것을 철저히 인식하였고, 그러므로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욥이 의로운 자라 함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한 신앙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 주변에 믿는 자들 중에는 스스로 의로운 자 같이 행세하는 자들을 많이 본다. 목사나 장로 그리고 집사나 권사의 직책을 의로운 산물인 양 거룩한 폼을 잡는 짓거리를 많이 본다. 말하는 모양도 그렇고, 거동도 그렇다. 또한 봉사하는 것이나 헌신하는 것조차도 이로 생각하는 의식도 많이 본다. 욥은 그러한 자들과 다르다. 그는 참으로 순전한 사람이었다. 반면 욥은 겉치레로 의로움을 내세우는 자가 아니다. 그의 삶이 의로운 것이다.

욥은 고통과 곤비한 상태를 감추지 않았다. “원통함을 잊고 얼굴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할지라도, 오히려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주께서 나를 무죄히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욥은 말했다. 속은 괴로움이 가득하면서도 겉으로는 평화로운 것처럼 행복한 것처럼 하는 것을 주께서 무죄치 아니한다는 것이다. 욥은 친구 빌닷 보다도 더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다. 욥은 맹종하는 신앙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을 알고 순종하는 신앙인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무조건 믿는다고 외치는 소리겠는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나님이 어떤 분 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믿는다고 고백하면 되는 그러한 무지의 신앙을 원하시겠는가? 하나님은 전능자시오 창조자이시다. 그런 분이 자신이 지은 피조물이 맹종하기를 원하겠는가? 전능하신 이가 지은 피조물도 그의 지혜로 지은바 된 것이니, 지혜로 하나님을 알고 그에게 순종하는 신앙이야 더욱 기뻐하시지 않겠는가? 그래서 욥은 그러한 신앙인이었다.

욥의 신앙을 철저하였으니 주께서 욥이 악하지 않는 줄을 안다고 하였다. 그러나 욥은 자신이 죄가 없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주의 손에서 욥을 벗어나게 할 자도 없다고 하였다. 이처럼 욥의 신앙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욥은 자신에게 당하고 있는 고통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였고 괴로워하여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음이 좋아으리라 하였고, 태어났을지라도 곧바로 죽었더라면 좋았으리라 하였다. 이는 헛된 인생에 한탄한 것이다. 욥은 또한 두려워한 것은 돌아오지 못할 땅, 어둠의 곳으로 빠지기 전에 평안하게 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이러한 욥의 두려움이 무엇인가? 그의 신앙에 흠이 날까 함이다. 그가 하나님을 배반할까 함이다. 그가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을까 함이다.

오늘날의 우리의 신앙이 이처럼 철저한 순종이었나? 은혜를 자랑하고 거리에 나팔을 불며 스스로 구원을 과시하고 하나님으로부터 VIP 대우를 받는 양 허세를 부리던 신앙인이 아닌가? 하나님은 말이 없으시니 믿음이 있다고 외쳐도 누가 말할 사람이 없고, 구원을 받았다고 외쳐도 누가 지적할 사람이 없지 않은가? 그러한 기독교인들은 순전하지도 않으며, 정직하지도 않으니, 하나님을 경외한다 해도 거짓이요. 구원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으니 무지한 신앙인이 아닌가? 욥에게서 배울 것은 순전함과 정직함과 하나님을 진정 경외하는 것과 악에서 떠나는 생활인 것이다.



[단상의 글]

욥의 곤고한 마음은 어디에 있었을까? 오늘의 우리에게도 욥처럼 곤고한 심정이 종종 일어나지 않겠는가?

어떤 사람은, 특히 알고 지내는 사람들은 매서운 눈으로 바라보지요. 괴로워하는 사람을 말이에요. 그러면서 겉으로는 매우 위로하는 듯이 던지는 말들....... 마치 욥의 친구들이 욥을 위로한다고 하는 말처럼 말이에요. 그러면 처음에는 고맙고 위로가 되는 듯이 하다가도 돌아서면 뒷말에 이해 더 큰 상처를 당하는 일들이 많이 있지 않는가요?

그때에 곤고한 마음이 남게 되는 것이지요. 누구나 살다 보면, 괴로운 일이 없지 않지요. 저는 그럴 때마다 제일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석가의 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궁궐 안에 살면서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석가는 우연히 궁궐 밖에서 한 노인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는 궁궐로 들어왔어도 잊지 못해 괴로워하다가 궁궐을 떠나 서민들의 생활 속으로 뛰어들어서는 그들의 곤고한 삶을 깨닫고자 했다는 석가의 일생기를 읽었을 때에 감동을 받은 것은,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민생들을 살피며 이해하려는 그의 성정(性情)을 잊지 않았기에 산행을 한 후에 근처에 절이 있으면 지나치지 않고 절의 정적(靜寂)함을 느끼고 했었다.

그때까지는 교회를 다니기는 했으나 아직 신앙심이 깊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산을 좋아해서 자주 산에 오르고 그랬었다. 그러면 산중에 절을 보게 되고 절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절을 둘러보는 습관이 있었다. 왜 그랬는지는 잘은 모르지만,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지금도 그렇듯이 고요함에 대한 심지(心地)가 내게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지금도 고요함을 좋아한다.

나이가 들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후에 차(茶)에 대해 알게 되면서부터 차와 절의 관계가 깊음을 알게 되어서 다시 자연스럽게 스님과 함께 차를 나누는 시간이 종종 있었다. 그때에는 기독교에 대한 신앙심이 깊은 때여서 사심(私心) 없이 스님과 대화를 가질 수가 있었다. 종교적 대립이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 - 즉 다도의 정신에 따라서 - 대화를 가졌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멋진 스님이시다고 생각이 든다.

대체로 종교인들에게는 타 종교에 대해 매우 배척하는 본능이 있기 마련이다. 아마도 그래야 하는 이유는 자신의 신앙을 지키려는 반사적 심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느 날 교회 사람들이랑 산행을 하다 보면, 산중에 절에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 하고, 약수를 받으려고 절로 들어가니 정색을 하면서 비난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해는 하지만 불심(佛心)으로 가는 것이 아니며, 약수(藥水)를 얻기 위해 갈 뿐인 것이기에 그렇게 경계심을 나타낼 필요는 없다고 하는 마음이었다.

이야기가 멀리 가 있지만, 곤고함이란 단어에 대해서 이해했었던 것은 석가가 바라본 민생들에 대한 측은지심(惻隱至心)에서 온 그의 태도, 즉 자유의지에 따라 결정을 했다는 데에서 존경하는 편이었다. 여기서 곤고함이란 표현이 잘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욥도 바로 그런 곤고함이 있었던 것이다. 석가가 본 민생의 곤고함이나 욥이 처한 곤고함은 죄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은혜로부터 멀어진 인생에는 반듯이 찾아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다. 그러므로 인간은 곤고한 인생을 살기 때문에 진리를 찾으려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 종교를 가지려고 하는 마음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욥의 곤고한 모습을 바라본 욥의 친구들은 그런 곤고한 인생을 석가처럼 불쌍히 여기기보다는 불행에 대한 정의를 내리려는 듯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오늘날에 학식(學識) 있다는 자가 만들어낸 수많은 철학이나 사회학이나 윤리학 등등에서는 인생무상(人生無常)함을 외치며 불행에 대한 논리와 정의를 주장하면서 마치 자신들이 신이 된 듯이, 또는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식으로 난해한 지식들로 현혹시키고 있다. 철학서를 즐겨 읽고, 심취했었던 나로선 철학의 끝은 무엇일까 하는 반문을 하게 되었다. 한편 철학사를 읽고는 더욱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역시 철학사에서 보듯이 인간의 철학적 흐름은 바다의 파도소리처럼 그냥 울리는 꽹과리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결국은 인간의 의식화에서 오는 위안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담배를 피우며 일시적 안정을 찾듯이, 술을 마시며 잠시 잊듯이, 아니면 마약을 하여 깊이 젖어지거나 할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렇게 길게 널어놓은 이유는, 인간이 얼마나 간사하고 거짓된지를 잊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무상(人生無常)이니, 인생은 희로애락일 뿐이라니 하면서 인간존재의 덕(德) 없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도 진리의 그림자만을 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욥은 친구들이 주장하는 복잡한 난해한 이론들에 넘어가지 않았으며, 욥은 너무나 확고한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믿음’이란 흔들림이 없는 확신, 또는 의지를 말한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종교인들이 말하는 믿음이나 신앙심은 종교적 제도와 규례에 의해 가지는 상대적 저울일 뿐이기에 흔들릴 수 있고, 변할 수 있고, 바뀔 수가 있는 것이다. 즉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저 인간사회에서의 신뢰 정도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성이 있겠다.

욥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진실성’이다. 그에게서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이 사단에게 말한, 욥기에 서두에 나오는 글에서도, ‘우스 땅에 욥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 1:1)로 시작하는 것으로도 욥기의 전체를 요약한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이를 증명해 주기 위해 욥의 곤고한 삶의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종교적으로 해석하면 사단의 시험을 받았지만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아서 복을 받았다고 말할 수가 있겠다. 또는 철학적으로 해석하면, 인륜지사(人倫之事)로써 인간이 살아가면서 치러지는 일들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란 노래가 있고,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철학에서는 철학의 극치인 ‘염세주의와 허무주의’가 한때 각광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러한 의식들은 안개와 같은 것들인 것이다. 결국은 인간의 본질은 허(虛), 무(無), 공(空)으로 끝난다.

이러한 결론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바로 신의 창조론, 창조주를 부정하는 데로 갈 뿐이다. 안개와 같은 이념들은 매우 매력적이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매혹되어 버린다. 즉 마취상태와 같은 것이어서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줄 뿐이다.

그러나 욥의 곤고함을 통하여 말하고 싶은 것은, 욥은 창조자를 부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욥의 신앙심은 온전한 믿음이었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그럼 인간의 곤고함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여자가 선악의 열매를 먹은 후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토록 행복했던 에덴동산의 생활이 무너지게 된 것은 사단의 뱀 때문도 아니다. 선악의 나무 때문도 아니다. 오직 자유의지를 가진 두 사람은 그것에 의해 잘못된 결정을 했기 때문인 것이다.

에덴동산의 많은 식목들은 오늘날에 우리가 보는 식목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자연적인 식목들인 것이지만,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의 나무는 신비한 것일지 모르겠다. 그들이 선악의 열매를 먹는 순간, 그들은 영원히 살 수 있는 조건이 무너지고 유한적 인생을 살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때부터 인간의 곤고함이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어떤 인간도 곤고한 인생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 곤고함을 욥은 받아들인 것이다. 그럴 수 있는 그의 삶에는 무엇이 있었기 때문일까? 그는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했으며, 즉 믿었으며, 그 믿음을 보인 것이 그의 순결함과 정직함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함과 악을 멀리 함인 것이다.

그러한 욥의 믿음은 곤고함에 처해있어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의 순종에 있었던 것이다. 즉 순종하는 믿음이었던 것이었다. 그는 끝까지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았으며, 의심하지도 않았으며, 끝까지 순종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고백을 했다.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원통함을 발설하고 내 마음의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1절) 이에서 그의 정직함을 볼 수가 있겠다. 또 그는,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 없나이다.”(7절)와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권고하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12절)라고 그의 믿음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순종하는 믿음은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생명과 은혜를 주시고 권고하시면서 영을 지키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 순종하는 믿음인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곤비함에 대해서 원통함과 괴로운 마음을 그대로 말하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진실함을 보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선악의 나무 앞에서 두 사람, 아담과 여자가 어떻게 하는지 하나님은 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실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모성애, 즉 아기를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은 아기가 진실하게 보이기 때문에 사랑스러워합니다.

욥의 신앙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을 인정하였기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결함과 정직함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믿음이 바로 순종하는 신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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