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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살아있어도 될까?

[독서와 생각 Ⅲ]

by trustwons


1. 살아있어도 될까?


어느덧 매미가 울음을 그치고 방울벌레가 울고 있다. 아침저녁으로는 기온이 내려간다. 그리고 체력과 기력이 쇠약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살아있어도 될까? 내가 없어진다 해도 이 세상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사랑, 그것에만 의지하고 살아있는 자신이 얼마나 슬픈 존재인가.

엄마, 나 같은 추한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 있어도 되는 걸까요? 내 안의 반짝거리는 것을 엄마라면 분명 발견해 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가르쳐 주세요. 이끌어 주세요.

<1리터의 눈물/키토 아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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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어느 누가 살아갈 이유를 알까? 또 누가 세상을 살아도 되는지 물을까? 소녀 아야는 자신의 모습에서 사랑에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자신에 대해 죄송한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추하고, 못났고, 무능하다고 생각할지라도 누구나 살고 싶어지는 법이다. 반면에 세상에 없었으면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데, 그들은 자신이 세상에 살아도 되는지 생각이나 할까? 소녀 아야는 수년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짐이 될 뿐,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는 모습에서 그리고 그들의 사랑에만 의지하고 살아가야 하는 모습에서 이대로 살아 있어도 되는지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도 소중한 생명임을 모두 깨달아야 한다.


<회고(回顧)>

누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를 작정하고 왔을까? 누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거라고 생각하였을까? 누가, 아무도 이 세상을 스스로 찾아온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기에, 생각하는 존재이기에, 이 세상에 있음을 한 번쯤은 회고하지 아니하겠는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말이다. 다행하게도 사람에게는 노래가 있어서, 노래할 수가 있어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노래로 풀어헤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인생은 끝없는 질문을 하게 한다. 그리고 하염없이 돌아보게 한다. 마치 늦가을에 우는 매미처럼 말이다. 깊은 땅속 어둠에서 수년을 살다가 밝은 세상을 나와서 한 해도 살지 못하고, 한 달을 살지도 못하고, 겨우 한 보름만 살다가는 매미로써는 얼마나 애절한 울음이었던가? 그것도 늦가을에 낙엽이 지는 쓸쓸한 가을바람을 타고 울어내는 매미의 울음소리는 길을 걷는 한 인간에게는 무겁기만 하고, 또는 깊은 울림이 되어 한 걸음, 한 걸음에서 낙엽을 밟는 소리로 메아리로 가슴을 두드린다.

그래, 누가 살아있어도 될까 하고 묻겠는가? 어린 시절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들판을 뛰어다녔었지, 이 골목 저 골목을 돌아다녔지. 해가 지고 뜨는 나날을 시냇가에 종이배를 띄어 쫓아가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흘러간 세월이 어느덧 예순하고 칠순이 넘어설 줄이야 알았을까?

어릴 적부터 하늘을 즐겨 바라보던 버릇이 머리가 희어진 때에도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땅 위에 초목들도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아 보이나 사람들은 쓸쓸히 걸으며, 머리는 희고 허리는 곱이 되어 걸음조차 멎는 듯 가고, 그러면서 늘 하는 말이, “이젠 가야지~”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러나 몸이 성치 못하는 아야는 도움이 없이는 그것조차 할 수 없어, 누군가에 도움으로, 아니 엄마의 도움으로 한 발짝, 한 발짝, 그렇게 살았으니 말이다. 그녀는 하루를 도움을 의지하며 그렇게 살아가니, “살아 있어도 될까?” 마음에 울림이 매미처럼 울어내지는 못하여도 말이다.

어느 누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까? 그래서인지 철인(哲人)들이 묻고 또 묻고 하면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 허무주의(虛無主義), 니힐리즘(nihilism)에 머물었는지도 모르겠다. 부귀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전도서 첫 글에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Vanity of vanities, vanity of vanities, all is vanity.] 그렇게 고백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예수의 제자인 요한은 놀라운 말을 했다. 아니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한 1:3,4,5)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요한 3:16)

얼마나 놀라운 말인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자신에게 은밀히 찾아온 바리새인 중에 한 사람, 니고데모라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그는 신앙이 깊은 사람인 듯하다. 그러나 그는 거듭나지 못했으니, 죽음의 문턱을 벗어나지 못하여 고민이 많았을 게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사는 인간들이 세상을 사는 이유를 알고 있을까? 아니면 아야 소녀처럼, 살아도 될까 하는 의문을 얼마나 가졌을까? 늦은 가을에 나뭇가지 끝에서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는 눈이 잠시나마 멈춰있었더라면, 니고데모와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을까?

다시 하늘을 바라보게 된다. 끝없는 질문들, 알 수 없는 인생들, 각색의 낙엽들이 널브러진 산길을 걸어가며, 나는 살아있어도 될까? 아니 나는 살아야만 할까? 산길바람에 귀가에 들리는 소리에 머뭇되는데..........

‘너는 진리를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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