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와 생각]
* 1938년 3월 11일(금요일) 맑음. 미국 선교사 미스 베어가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중 어제 별세하였다는 보도에 접하니, 애석함을 금할 수 없다. 25세부터 50세까지 인생에 가장 꽃다운 시기를 한국에 바쳐 주었다. 양정학교에서 영어회화 가르친 인연으로 친분이 있어 복음전도에 전념하라고 권해 보았으나, 그녀도 일반 미국 선교사의 예에 빠지지 않고 사교니, 봉사니 음악이니, 클럽이니 하는 것으로 귀중한 일생을 --- 전만고 후만고에 다시 볼 수 없는 이 세상의 일생을 보내고 말았다. 엊그제 떠나신 안도산(安島山) 선생은 환갑의 수로 가셨고, 어제의 베어여사는 50으로 가셨다. 60에서 50이 차가 크지 않으니 50에서 40이 그렇고, 40에서 30이 또한 그렇다. 언제 누가 간들 부당타 항변하랴.
<김교신 신앙 수필집, 진리 찾는 사람들에서, 그의 일기 중에>
[深考知思]
오랜만에 서적들을 살피다가 김교신 선생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한창 젊은 시절에 읽었던 그분의 글을 환혼에 나이에 다시 펴서 읽으니, 만고(萬古)의 교차가 가득해진다.
누가 그랬더라, ‘인생은 유수처럼 흘러가는구나!’ 돌아보면 그리 생각이 들고, 앞을 바라보면 어디로 가나 그리 생각되는 것이 더하다.
누가 어떻게 살든, 어찌 살든 …, 누가 탓하랴 만은 남 일이 아니게 생각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교신 선생에 대한 지인들에게 듣고, 그의 책을 여러 번 접하여보니… 일제강점기에 살아간 분들에 대해서도, 많은 일들이 있었구나 생각하며, 오늘날에도 여전하구나 생각이 가득하다.
그 당시에 베어(Bair) 선교사는 감리교 여성 선교사로서, 1888년에 미국에서 태어나 1913년부터 1938년 사이에 한국(조선)에 오셔서 여성 계몽과 교육에 힘쓰신 분이시다. 이분이 세상을 떠난 소식을 듣고 애석함을 김교신 선생은 일기장에 쓰셨다니, 피상적으로만 느껴졌던 우리에게 신선함을 다시 주는 듯하다. 비록 이분들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같은 학교에서 교편을 했던 첼로전공을 하신 음악선생님이 생각이 난다. 그는 부친이 외교관이어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태어났고, 자랐으며, 고등학교까지 거기에서 나온 후에 한국에 있는 중앙대학교를 나와 교직에 있었다. 그런 그에게는 늙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다가 세상을 떠나보내시고는 5년간 방황하며, 술과 담배에 의존해 왔었다. 그러다 저를 알고 난 후에는 술과 담배를 끊었고, 종종 대화를 나누며, 국내 여행도 함께 다녔었다. 그런 그는 유럽여행을 제안해, 함께 준비하던 중에 폐암으로 함께 유럽여행을 떠나지 못했고, 3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김교신 선생님이 베어 선교사의 죽음을 애석하게 느낀 것처럼, 그를 떠나보낸 마음이 애석함을 금치 못했다. 그래서 그를 생각할 때마다, “네가 먼저 하늘나라에 가니 나중에 오게나.”하고 말한 그의 말이 메아리처럼 들려오곤 했었다. 아마도 김교신 선생님도 그런 마음이겠지 생각하니 더욱 가까이 느껴진다.
또한 베어 선교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신 도산 안창호선생님에 대해 소식을 다시 글로 들으니, 대학시절에 흥사단에서 강연을 들었던 그때가 새삼 떠오른다. 그렇게 조선시대를 높이 찬양하며, 마치 애국심을 갖도록 했었던 그때를, 그리고 그토록 지켜온 ‘조선성서’란 책자도 받아보았고, 일본유학 가서 우찌무라 장로를 통해 기독교를 받아들인 김교신선생과 함석헌선생 분들이 있었음도, 그리고 무교회주의를 받아들이게 된 이유도 알았었다. 한국보다 먼저 일본이 기독교가 먼저 들어왔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신교 문화에 깊은 일본인의 의식에서는, 한때에 일본에서도 엄청난 기독교 박해가 있었다고 한다. ‘침묵’이란 책에서 일본의 기독교 핍박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역시 우찌무라 간조는 교회 내에서 분쟁하는 것을 보고 신앙에 회의를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교회중심의 기독교에서 벗어나려고 그는 무교회주의를 주장하게 되었으며, 교회밖에 신앙을 위해 모임을 가졌던 것이다. 그때에 김교신 선생과 함석헌 선생은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신앙을 받아들인 두 분은 한국으로 돌아와 한 분은 교단에 서서 기독교 신앙을 키워갔으며, 한 분은 사회에서 청년들에게 조선기독교를 강연하였던 것이다. 즉 기독교적인 민족정신을 주창했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 무교회주의 교단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들은 종로 YMCA의 강단에서 모임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기독교교단과 예수교교단이 맞서게 되고, 이단론으로 비판을 받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한다.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올 때에도 장로교단의 선교사와 감리교단의 선교사 간에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합의하여 장로교단의 선교사는 북녘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게 되었고, 감리교단의 선교사는 남녘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게 되었다고도 말한다. 그래서인지, 북쪽에는 장로교 교회가 많았으며, 남쪽에는 감리교 교회가 많았었다가 6.25 전쟁으로 말미암아 북쪽에 장로교 교회가 남한으로 내려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북녘에는 평양이 중심이 되어 기독교 신앙에 불이 붙었다고 한다. 그래서 평양을 제 이의 예루살렘이라고 해외에까지 전해졌었다고 한다. 그런 평양은 지금은 김일성중심의 도시가 되어버렸다. 여기서 김일성은 한때 기독교인이었었다. 그의 장인어른이 목사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북한의 체제가 어찌 보면, 교회의 체제와 너무나 닮아있다. 특히 평양의 회개운동이 김일성체제에서는 자아비판의 생활총화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리고 기독교의 십계명과 유사한 인민의 십계명이 있다고 한다.
한반도의 민족성은 유별나다. 해외의 문화가 들어오면, 곧바로 한반도식 문화가 되어버린다. 종교도 역시 그러하다. 불교가 오래전에 들어왔지만, 인도의 불교와는 다른 불교, 즉 한국형 불교가 되어진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원효대사의 불심을 들 수가 있겠다. 원효대사는 불심을 품고 인도를 향해 떠나던 중에 산중에서 해골바가지에 있던 물을 시원하게 잘 먹은 후에 아침에 발견하고는 토해내었다고 한다. 그때에 원효대사는 계승적인 불심이 아니라, 불심의 본질이 중요함을 깨달았던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형 불교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에 한국의 불교계에는 놀라운 인물이 등장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즉 서산대사가 유명하다. 그리고 일제말기에 있었던 경허스님이 있었다. 최근에는 법정스님이 있었다. 이처럼 한국의 불교 사상은 대승불교와 선불교(조계종 중심의 불교) 그리고 다양한 교파와 사상을 하나로 융합하려는 통불교가 형성되어 갔다.
불심을 가진 잘 아는 지인과 대화를 자주 나누고 했을 때에, 그는 저에게 어떻게 기독교인이면서 불교에 대해 많이 아는가 물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스님들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게 신기한 모양이었다. 사실 그렇다. 아는 것이 곧 믿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다도생활을 오래 해온 것으로 4월이면 불교계에서는 그해에 거두어들인 녹차를 부처에 드린다는 헌다례(獻茶禮)의 행사가 있다. 그때에 참여하면 차를 공짜로 먹을 수가 있었다. 때론 산행을 하다가 깊은 산골에 있는 절에 가면 스님이 차를 대접하곤 하였었다. 그러다 보니 불교에 대해서나 절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되었다. 오늘날에 절들이 산에 많은 이유를 아는가? 그것은 고려가 망하고 정도전에 의해 이성계를 앞세워 반란을 일으켜 이씨조선왕국을 세울 때에, 고려의 왕족과 귀족들의 재산을 몰수할 때에, 절에 숨겨놓은 재산을 몰수하기 위해 마을에 있었던 절들을 모두 수색하고 불태우고 쫓아내었다. 그때에 절들은 산속으로 숨어들게 되었던 것이 오늘날에도 산속에 절들이 있게 되었던 것이다.
기독교도 역시 한국에 들어오면 한국형 기독교가 된다고 교수들의 강연에서 많이 들었었다. 사실 그렇다. 한국형 기독교와 서양기독교가 많이 다름을 해외여행을 하게 되면 이해가 된다. 특히 한국의 기독교계에서는 새벽예배가 있는 것에 외국인 기독교인들은 놀라워한다. 이 또한, 조선시대에는 기독교가 선교사들로부터 양반보다는 평민, 농민들에게 먼저 전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이 모일 수 있는 때가 새벽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양반들은 일찍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일찍 일어나는 것을 양반의 체면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는 여유, 행동을 느긋하게 행동하는 것이 양반의 체통이라고 자부하기도 한다. 그래서 양반들은 뛴다거나 조급해한다거나 하는 짓들은 체면이 못선다고도 말한다. 그래서 비가 내려도 여유, 천천히 걷는다. 그러니 양반들이 새벽 일찍이 일어나겠는가? 그러므로 양반이 아직 잠들어 있는 동안에 농민이나 평민이나 하녀들은 새벽에 선교사의 집으로 가서 성서이야기를 듣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오늘날에 한국 기독교에서 잊지 못하는 ‘새벽예배’로 이어가고 있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 초기 기독교 교회에는 유교의 예절을, 조선의 예법을 중시해, 교회 내에서도 예의 바른 신앙으로써 복장이나 행실에나 언어에 대해서 많은 강조를 해왔었다.
이처럼 한국인의 독특한 민족성, 한국문화 등이 해외로부터 들어오는 문화나, 예술이나, 종교에서도 한국형으로 변화해 간다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에는 조선 오 백 년간에 쇄국정치로, 그때에는 해외진출을 명, 청나라들이 단속을 해왔었다. 즉 허락을 받아야 했었다. 어업을 해도 한반도 근해에서만 할 수 있었으며, 멀리 해외로 나가려면 허락을 받아야 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런 속담이 있지 않는가? ‘우물 안 개구리[정저지주(井底之蛀)]’라는, 즉 좁고 한정된 공간에서만 생활을 하여 넓은 세상을 모르는 인간을 비유하는 속담인 것이다. 이런 속담을 양반들 사이에서 많이 오르내리곤 했었다고 한다. 그러했으니, 세계가 변하고 발전하는데도 여전히 가마를 타고 다니는 조선이 아니었는가? 이러한 미개한 조선의식을 깨우치기에는 너무나 조선양반사회가 탄탄하였다. 그래서 조선 말기에 젊은이들이 개화, 개혁바람이 일어났으며, 그 젊은이들 중에 이승만이란 청년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조선의 개혁은 먼저 개혁한 일본에 의해서 지배를 받으면서 눈을 뜨게 되었다고들 말한다. 그 대표적인 것은 초등학교(국민교육)라는 교육제도이다. 그리고 신분제도였던 양반제도를 폐기해 버린 것이었다. 이토록 한반도에는 암흑의 시대였던 조선 오백 년이 외력에 의해 무너지고 36년간의 일제강점기 시대를 거쳐야만 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됐을까? 상상을 해보면, 지금도 양반제도가 그대로 있다면, 농민이나 평민들은 글을 배울 수가 있었을까? 또는 선비정신에 의해 공업화에는 천시를 받았을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되었다면, 오늘날에 한국(조선)은 인도처럼, 아람처럼, 중국처럼, 지배층(양반층)과 피지배층(농민, 평민층)으로 나누어졌을 것이다. 여전히 북쪽에서는 이씨조선의 정신을 이어받았다고 하면서 김씨조선을 주장하고 있다.
이 세상은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다. 어찌해서 그럴까? 이는 인간에게 있는 자유의지, 이성의 동물이기 때문에(진화론적 의식으로 본), 니므롯의 인본주의 - 신으로부터 벗어나자는 사상, 이념들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교신 선생님의 일기를 통해 다시 되돌아보니, 오늘날에 대한민국이 되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게 닫혀있던 조선시대에 젊은 선교사, 베어 여선교사 등 많은 외국인들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조선은 조금씩 깨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렇지 않았다면 더 많은 피를 흘려야만 했을 것이다. 즉 프랑스의 대혁명은 실제와 다르게 인민, 농부의 반란으로 일어난 혁명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때에 수많은 귀족들과 왕족들이 죽음의 길로 갔다. 이 프랑스의 혁명, 시민혁명이라고 하는 것이 1830년 7월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프랑스 대혁명이 바람을 일으켜 근대 시민 혁명이 일어났으며, 이로써 인권선언과 공화정 수립과 법 앞에 평등 확립, 그리고 유럽 전역으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근대 민주주의가 일어나게 되었다고 말한다.
비록 일본의 직접적 식민지 지배를 받았지만, 명, 청나라의 간접 식민지 지배에서보다는 많은 개혁을, 개화가 일어날 수가 있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안창호선생의 계몽운동과 미국선교사 미스 베어 여사와 같은 분들에 의해서 긴 오백 년의 조선은 깨어나게 되었고, 훌륭한 젊은이들은 발굴하여 해외유학을 보내졌고, 그들로 인해 조선은 깨어나게 되었다는 것에 감사함을 생각하게 된다. 그런 계몽운동을 하신 분들, 귀중한 인생을 - 전만고, 후만고에 다시 볼 수 없는 그분들의 이 세상의 일생은 그렇게 보내지고 말았다고만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수명은 하늘에 달렸다고 옛사람들은 흔히들 말하곤 했었다. 그러면서 인생타령을 하신다. 마치 그들은 인생을 뭔가 크게 깨달았음을 말하듯이 말한다. 그리고는 ‘그런들 저런들 어떠하리.’ 하면서도 인생을 다 아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김교신 선생의 일기에서는 인생에 있어서, ‘60에서 50인들, 50에서 40인들, 40에서 30인들, 언제 누가 간들 어찌하랴? 부당하다고 하랴?’ 하시는 것이었다.
참으로 그렇다. 나이 칠십을 넘어서고 보니, 더욱 그렇다. 세상을 백 년을 살든, 오십 년을 살든, 그것이 어떻다는 것인가? 그래서 ‘어둠의 사십 년’이란 한 여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인생이야기를 책으로 냈다. 그 여인, 이하늘, 그녀는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말하지 못한 인생을 사십 년으로 마치게 되는 인생소설이다. 여기서 인생은 홍수 이후부터는 120년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120년은 40년의 세배가 된다. 그래서 모든 인생에는 40세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식인들이 말하지 않는가? 인생 40은 불혹(不惑)이라고 하지 않는가? 공자는 “마흔 살에는 현혹됨이 없었다(四十而不惑)”라고 말했고, ‘40대는 인생의 스케치북에 그린 밑그림을 완성해 나가는 시기이다.’이라고, “도전이 없으면 성취도 없다.”라고 벤자민 프랭클린은 ‘마흔은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말아야 할 가장 무르익은 시작점이다.’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나? 이 세상을 ‘나그네’라고 표현한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은 자신의 인생을 나그네라고 말했다. 그런데 미련한 인간들은 마치 영원히 살듯이 온갖 악행을 해서라도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한다. 해지는 때에 공중에 날아올라 마지막 발악하는 하루살이처럼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하는 생각도 아니할 수도 없겠다. 왜냐하면, 인간 세상에는 진화론적인 이념과 인본주의 사상에 바탕을 둔 문명교육을 받으며 자라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의 제물을 받으시고는 이렇게 말해주셨다.
「여호와께서 그 좋은 향기를 맡으시고, 마음속으로 말씀하셨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해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 이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이다. 내가 전에 했던 것처럼 다시는 모든 생물을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다.」(창세기 8장 2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