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嗚呼!]
「여러분은 마지막 때 나타내려고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해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온갖 시험을 당해 잠시 근심하게 됐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합니다.… 이는 여러분이 믿음의 결과로 영혼의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베드로전서1장 5,6,9절)
“오늘 저는 여러 성도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온전한 믿음을 가지라고 강요하고 싶습니다. 온전한 믿음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믿음의 삶 속에서 자신의 믿음을 확인하고 확인하는 삶일 때에 온전한 믿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을 위해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곧이어 부활찬양으로 칸타타가 있었다. 그리고 예배를 마친 후에 성도들은 삶은 계란 하나씩을 받아가지고 돌아갔다. 성도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고 있을 때에 목사님은 문 앞에서 성도들에게 은혜의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예배실 안으로 들어오셔서는 곧바로 맨 앞자리에 앉아있는 광일의 가족들에게로 다가왔다. 광일의 가족은 예배가 마치면 성도들이 다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적한 때에 하늘이를 데리고 나가곤 하였었다. 혼잡함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럴 때마다 목사님은 각별하게 광일의 가족들에게 다가오셔서 반갑게 반겨주었었다. 그럴 때마다 하늘은 목사님의 손을 꼭 잡고는 입맞춤을 하였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목사님이 오셔서 광일의 가족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누는 동안에도 하늘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 목사님은 마지막으로 하늘에게 손을 내밀어 하늘의 손을 잡아주려고 하자, 하늘은 맥없이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깜짝 놀란 목사님과 가족들은 당황하여 하늘의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런데 하늘은 축 늘어진 채로 바로 앉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이때에 매우 놀란 강인이가 하늘에게로 바싹 다가와서는 껴안으며 살폈다. 하늘은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광일이도 당황하고 놀래어 곧바로 응급차를 불렀다.
<이하늘의 인생소설, 어둠의 사십년의 책 중에서>
그토록 산모의 자궁에서는 바깥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이하늘’은 어찌하여 출산해서 세상에 나왔을 때에는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몸으로 태어났을까?
이런 하늘을 주인공으로 하는 글을 쓰면서, 사실은 저자의 어머니는 어린 시절에 소꿉놀이하다가 언니들이 귀쑤시개
하다가 그만 고막을 건드려 결국 듣지 못하게 되었으나 나이들 때까지 아무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만 가지 생각이 들고 그랬었다. 또한 어린 시절에는 동네에 벙어리, 맹인, 바보들을 흔히 볼 수가 있었다.
요즘은 아예 특수시설로 보내어져 그런 분을 만나거나 볼 기회는 매우 드물게 되었다. 그 시절에는 그렇게 몸이 불편한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세상이었다. 오히려 그런 분들의 불편을 공유하면서 차별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몸이 불편하지 않아도 조금만 이상하게 생겨도, 조금만 못나보여도, 아니 외모가 허술하게 보이면, 매우 강하게 경계하거나 외면한다. 이런 모든 현상들은 문명의 진화가 낳은 결과라고 생각하게 된다. 문명은 인간의 이기심의 결실이지만, 진화는 끝없는 분리와 구별을 통해 차별의식을 심화시키는 의식인 것이다.
그러 특수 장애인으로써, 오직 집안에만 생활을 해온, 스스로 어떤 것도 할 수가 없는 그런 몸으로 사십년의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이 어떠할까?
한편 생명의 전화 상담을 하면서, 또는 특수장애인을 대상으로 미술과 수학을 가르치면서, 그들의 세계를 조금 알게 되면서, 이들의 마음은 천사와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자녀를 둔 부모의 심정은 어떠하겠는가? 부모님들의 간절한 바람은 이것이었다.
「부모가 죽기 전에 자녀들이 먼저 세상을 떠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부모가 없이 어찌 살아갈까 하는 염려 때문에 죽지도 못하겠다고 하신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이야기가 아닌가? 그래서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을 하면서 먼저 듣지 못하고, 말도 못하는 한 남자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 ‘소리없는 삶’이란 단편소설을 썼다. 그리고 벙어리인 할머니가 등장하는 ‘소라섬 소녀의 이야기’란 동화를 썼다. 이제 마지막으로 매우 불편한 소녀,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말할 수 없는 특수장애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어둠의 사십년’이란 장편소설을 쓰면서 인간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으며, 진화론적 의식이 아닌 성경의 진리에 바탕을 둔 소설을 쓰면서 아주 깊이 신의 세계를 접하게 되었다.
여기서 깊이 깨달은 것은, 천지가 왜 있어야 되었는지, 그리고 인간이 왜 있어야 하는지와 인생의 근본은 무엇일까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소설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한때, 젊은 시절에는 철학에 빠져서 동양철학이나 서양철학에 대한 책들을 정독하면서,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한 신비함에 매력을 느꼈으나, 천만다행인지 모르나, 성경을 깊이 습독을 하면서, 특히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되면서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8:32)
이 말씀에 눈이 떴다. 신학적 지식이 아니라 창조자의 진리를 깨달았던 것이었다.
<이하늘의 인생소설, 어둠의 사십년 부록 편에서>
[오호라!]
“하루를 살아도 사람답게 살아야지~”
어릴 적부터 자주 듣는 말이었다. 그래서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고 인.인.인.인(人.人.人.人) 하면서 우스갯소리로 말한다. 하지만 웃을 일이 아닌 것 같다. 진짜 사람의 행복은 재물에도, 권력에도 아닌 것이다. 사람의 행복은 존중(尊重)되어지는 것이다.
인간의 존중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음에서 온 것이라고 성경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부(部)를 누려도, 권세(權勢)를 소유해도, 그리고 오래 살아도 인간에게 행복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가질수록 더욱 불안하고, 누릴수록 더욱 불안할 뿐이란 것이다.
여기에 보통사람들보다 못한 한 여인에 대해서 바라볼 때에, 그녀는 보통사람들보다 부족함만 있었는데도, 아니 장애인 중에 장애인, 가장 불편한 몸을 가진 상태에서도 평안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무엇이었을까? 앞을 못 보는 그녀는 하루의 시작을 항상 창가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것도 잔잔히 …
잔잔히 기다리는 삶 속에서는 하늘의 음성을 듣는다. 아담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면서도 나무 뒤에 숨어 나오지 않았다. 가인은 하나님이 그렇게 말했는데도 결국 아우를 죽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에 광야의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노아는 하나님의 눈(관찰하심)에서 은혜를 보았다.
그런데, 예수를 옆에 모시고 들었던 제자들은 잠시 예수를 버렸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은혜로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였을 때에 그들은 살아갈 이유를 알게 되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추수할 것이 많은데 일꾼이 적구나!”의 뜻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유대민족에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예수가 오실 때가 마지막 때인 것을 예수의 제자들은 알았기에 목숨을 내놓으며 진리를 전했던 것이다. 우리는 마지막 때에 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예수를 보내셨지만,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한 생명이라도 구원하시려고, 마지막 때를 아주 길게 뒤로 미루시었던 것이다.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전해지는 날, 지체 없이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세상 왕들을 심판하시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세상의 기술문명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도록, 진리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흥미로운 것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 마지막이 될 때에 인간들은 인공지능(AI)의 신비로움에 빠져들게 하고 있다는 것을 인간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어지러운 세상에 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잠못이루는 밤, 근심이 가득한 날로 하루를 보내는 마음에 그저 하늘만 바라볼 뿐인 셈이다.
“오호애재로다! 오호통재로다![嗚呼哀哉, 嗚呼痛哉]
“사랑하는 이여! 하나님을 잊지 마시오. 예수그리스도의 진리를 잊지 마시오. 믿음을 잃을까 염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