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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죽은 믿음

[知言]

by trustwons

진리를 알자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36. 죽은 믿음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야고보 2:14)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야고보 2:20)

『이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義)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야고보 2:23,24,25,26)

---------- Bible ---------


성경은 결코 어느 누구도 독점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는 행위인 것이다. 물론 지식이 난무한 시대에서 성경의 진리를 아무나 해석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많은 혼란과 정체성에 흔들릴 것이다. 또한 악한 세대에서는 더욱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하려는 악의 장난이 심해질 수 있겠다. 하지만 성령의 역사를 인정한다면, 성경의 진리를 성령에게 맡겨야 하는 것이 온당한 일일 것이다.……. 오히려 진리가 난무할수록 성령의 역사는 더욱 힘차게 일어날 것이며, 진리의 정체성은 더욱 뚜렷해질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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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가 살던 시대에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믿음이냐 행함이냐 하면서 말이다. 이처럼 양면이 다 모순을 안고 논쟁하기를 즐기는 자들은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인 것이다. 사실은 믿음은 행함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믿음이 있으면 당연히 행함이 따르고, 행함은 믿음에서 나온다고 야고보는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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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그래서 다시 말하기를,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22절)라고 말하면서 성경에 나타난 증거를 가르치고 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서 증거하고 있고, 또 기생 라합의 믿음을 통해서도 증거 하고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믿음을 행함으로 나타낸 분들이다.

성경을 다시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은 모습이 창세기 15장의 말씀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6절)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고 행함으로 복의 말씀을 듣게 된 것이다.

기생 라합도 단순히 염탐꾼을 숨겨줬기 때문이 아니라 진정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잘은 몰라도 두려움으로 믿었기에 그런 행동을 행하였고, 그 행함으로 믿음을 나타냈으니 하나님이 이를 인정한 것이다.

야고보는 이런 사실을 성경에서 증거로 보이고는 더 이상 믿음이냐 행함이냐 하지 말라는 것이다. 야고보는 ‘믿음만이 구원받는다’가 아니라, 또 ‘행함만이 구원받는다’가 아니라, ‘믿음은 행함을 낳고 행함은 믿음을 온전케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행함은 분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믿음이냐 행함이냐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희롱하는 것이며, 성령을 가로막는 용서 못할 태도인 것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야고보서 말씀큐티/ 한솜미디어>




세상의 종교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아마도 가인이 동생 아벨은 죽이고 하나님을 멀리하면서부터 아닐까? 가인은 여호와께 고백하기를, “내가 주의 얼굴을 뵙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말하고는 가인은 여호와를 떠나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며, 성을 쌓고 아들 에녹을 낳았다고 했다. 그리고 가인의 후예 중에서는 야발,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나타났고,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다루는 조상이 되었고, 두발가인은 구리와 쇠로 연장을 만드는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배경을 살펴보면, 가인의 후예들은 하나님을 멀리한 자들로써, 생육과 예술과 기술이 등장함으로써 인간문명에 있어서 기본이 형성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인간중심의 세계를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인간의 의지를 유지할 종교가 탄생했을 것이다.

한편, 아담의 셋째인 아들 셋(Seth)이 아들을 낳고서, 그 이름을 에노스(Enosh)라 불렀다는 것은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에 의한 종교의 신과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하였다고 보아진다. 여기서 인간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우상을 만들어 신이라 불렀고, 한편으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불렀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로써 인간의 믿음의 양상이 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인간이 스스로 신을 찾아가는 길과 신의 섭리에 순종하는 길이라 생각하게 된다.

인간문명이 발달하면서 종교는 인간의 의지를 지키는 수단뿐만이 아니라 인간을 다스리는 수단으로 진화하게 되어갔다고 보아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는, 에노스와 같은 인물을 하나님을 이어가셨다. 그러다가 인간문명이 크게 성장하면서, 이미 인간집단(나라)들 속에는 군림하는 신(왕)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여 한 민족을 이루게 하셨다. 그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인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을 세움으로써 참 하나님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셨던 것이었다. 아니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었던 것이다. 그 내용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준 ‘기도문’에 나타나있는 것이다.

인간의 믿음이냐 행함이냐 하는 양비론(兩比論)이나 양시론(兩是論)은 야고보 선생의 말씀대로 거짓된 생각들인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요한계시록 3:15)라고 하였다.

이처럼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은 하나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를 이분법으로 주장하는 것들은 헛된 것이며, 거짓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이다. 정리한다면,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믿음이 온전케 된다는 것은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없는 육체가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죽은 믿음이란 거짓된 믿음이라는 것이며, 구원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는가? 여기서 행함이란 무엇인지를 아는가? 일반적으로 율법적이나 윤리적으로 행함을 말함에 극한 된 것 아니다. 그 행함은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마리아 사람을 비유로써, “네 이웃을 사랑하라!”, “네 형제를 사랑하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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