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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연 Mar 18. 2022

알 함두릴라

중동에 가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이지만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인샬라” (신의 뜻대로)다. 간단한 시간 약속을 하거나 의견을 물을 때도 “인샬라”는 수 없이 튀어나온다. 만약 중요 업무 중에 듣게 된다면 일을 그르칠 불신의 씨앗이 된다. 대체 몇 날 몇 시에 배달을 해달라는 간단한 주문에 거창하게 신의 이름을 포함해야 하는지 나는 그 비효율성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거래처에서는 물건이 안 왔다고 난리가 났고 납품처에서는 태연히 “인샬라”라고 답할 땐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진다. 내가 씩씩거리며 약속을 안 지킨다고 따지고 들면 외려 느긋한 목소리로 “여기는 카타르야.” “여긴 원래 그래.”라며 놀리듯 나를 달랜다. 논리 하나 없는 뻔뻔한 억지 변명이지만 속지주의 앞에 외지인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아무리 백방으로 뛰어 봤자 모래사장에 물 붓기였다.


일의 진척이 없어 적응이 더 힘들었다. 수십만 가지의 자재와 수만 가지의 공법이 존재하는 건설 무역과 전문용어는 영어든 한국어든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단순히 의욕만 가지고 덤빌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나의 무능력과 무모함 때문에 회사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깨끗하게 나의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더 이상 머무르는 것도 사장님한테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빨리 말씀을 드리는 게 나을 터였다. 고민 끝에 사장님께 말씀드리자 사장님도 기다렸다는 듯 사직서를 받으셨다. 사장님도 막상 불러들였는데 어찌하지 못해서 차마 본인의 입으로 말을 하는 것도 체면이 안 섰던 모양이다. 파푸에게 인수인계를 하고 출국 날짜를 잡았다. 아직 정식 계약 기간도 아니고 친구도 별로 없었기에 꺼릴 것 하나 없었다. 정 붙일 곳이 없으면 아쉽게 발목 잡는 것도 없는 법이다. 여러 곳을 떠돌다 보니 신변 정리하는 요령도 생겼다. 적어도 가까운 사람들에게 떠난다는 인사 정도는 남겨야 마음의 빚도 없다. 전화번호보를 훑자 마음에 걸리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인구비율이 비정상적인 카타르에선 성비도 남성이 압도적으로 높아서 동성 친구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직장 상사에 대한 험담이나 쇼핑 투어를 할 때는 여자 친구가 제일 좋은 파트너이자 카운슬러가 된다. 도하에서 직업을 가진 여성은 대부분 카타르 항공이나 도하 공항 근로자들인데 둘 다 그에 해당하지 않아 가까운 여사친이 없었다. 살롱에서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일하는 케이트는 소식을 듣자 펄쩍 뛰며 아쉬워했다.


“리츠 칼튼 호텔에서 만나. 송별 파티라도 하자.”


사교성 좋은 케이트는 거의 매일같이 파티를 찾아 다녔다. 원칙적으로 카타르는 음주 금지 국가이지만 호텔에서는 허용된다. 전 세계에서 모인 외국인 근로자들에게는 호텔 바가 오아시스다. 타국에서 겪는 이질적인 관습과 외로움을 술로 달래려는 본능은 중동이라고 바뀌지 않는다. 딱히 문화거리, 놀거리가 없는 환경도 외국인들이 호텔 바로 모이게 하는 원인이다. 대부분은 2년짜리 계약으로 경험 삼아 왔다가 지루함을 못 참고 고국으로 돌아가거나 두바이나 아부다비로 스카우트되어 도하를 떠난다. 그리고 떠나지 못하는 자들은 매일같이 모여 술을 마셨고 고액 연봉을 고액 술 값으로 탕진하는 악순환에 빠진다.


마지막 업무를 정리하다 보니 약속 시간보다 좀 더 늦게 도착했다. 모든 것이 느리게 움직이는 도하에서는 30분 늦게 도착하는 건 예의가 바른편에 속한다. 케이트는 이른 저녁 시간인데 언제 시작했는지 벌써 취기에 올라 있었다. 그녀는 인도네시아 국적의 무슬림 신봉자라 원칙적으로는 금주를 해야 하지만 몇 년 동안 사막에 갇힌 갑갑함을 술로 달래는 중이었다. 그녀를 둘러 싼 남자들을 지나쳐 인사를 건네자 케이트는 일행에게 나를 소개했다. 나는 일일이 악수를 하며 이름을 주고받았다. 레반트 계 중동인(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등 지중해 국)들은 얼핏 보면 이태리나 스페인 사람들 같아서 분간이 잘 가지 않는다. 그중에도 외국물 먹은 사람들은 유럽식 이름을 사용해 정확한 국적을 유추하기는 더 어렵다. 작은 말실수도 인종차별로 들릴 수가 있기에 다국적 사람들이 모인 자리일수록 국적을 빨리 알아내는 센스가 필요하다. 일행 중 시가를 문 하마드가 마지막으로 인사를 했다.

“얘야 얘, 이번 주 금요일날 떠난대. 너 회사에 사람 필요하지 않아?”

케이트가 기다렸다는 듯 돌아서는 하마드를 불러 앉혔다.

“사람은 늘 구하지. 도하에 오래 머무르는 사람 찾기가 너무 힘들어.

무슨 일 하시는 중이죠?”

“지금은 무역 회사에서 마케팅 일을 하고 있어요.”

“우리 회사도 홍보랑 마케팅 담당할 사람을 찾고 있긴 한데, 이벤트 쪽 일 해 봤어요?”    

그의 질문에 나의 눈이 반짝였다. 다시 실직자가 되어서 침울했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외국 회사랑 오페라 단체에서 작은 사내 행사나 콘서트는 해 봤어요.”

“아하~.... 우리 회사가 하는 이벤트는 좀 더 큰데 할 수 있겠어요?” 이번엔 그의 눈이 반짝였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기술적인 거는 잘 몰라서 배워야 해요. 일반 홍보랑 마케팅이라면 큰 어려움 없이 할 수 있어요.”


그는 생각에 잠긴 듯 시가 연기를 천천히 내뱉었다. 곧 명함을 꺼내어 내게 건넸다.


“내일 이력서 들고 사무실로 찾아올래요?”   

“잘됐다 잘됐어. 그럼 내 친구 이제 도하 안 떠나도 되는 거지?”

“알 함두릴라.” 신중한 하마드는 케이트의 극성에 한 마디로 답했다. 정확한 뜻을 모르는 나에겐 최소 인샬라가 아닌 것만으로도 기분 좋게 들렸다. 어쩌면 나의 아라비안 나이트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되는 절호의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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