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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시계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기본적인 시간 표시 기능을 넘어, 현대 사회에서 시계는 다층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누군가에게 시계는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능력을 상징하는 과시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을 호가하는 명품 시계를 통해 성공을 드러내고 타인의 부러움과 인정을 얻고자 하는 욕구는 명백히 존재한다. 파텍 필립의 노틸러스나 롤렉스 데이토나와 같은 희소 모델은 출시가를 훌쩍 뛰어넘는 가격에 거래되며 투자 대상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역사적 인물이 착용했던 시계나 극소량 생산된 빈티지 시계가 경매에서 수십억 원에 낙찰되는 사례는 시계가 단순한 공산품을 넘어 예술품이나 문화유산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금전적 가치는 시계의 한 단면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시계의 진정한 가치 전부는 아니다.
시계의 진정한 가치는 단순히 가격표에 매겨진 숫자를 넘어선다. 오히려 그 숫자가 보여주지 못하거나 가려버리는 더 깊고 본질적인 가치가 존재한다. 할아버지에게서 아버지에게로, 그리고 다시 나에게로 3대에 걸쳐 손목을 거쳐 오며 가족의 역사를 함께한 시계는 비록 낡고 흠집 가득할지라도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시간의 무게와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 즉 졸업, 결혼, 첫 아이의 탄생 등 잊지 못할 순간을 함께하며 소중한 추억이 깃든 시계, 혹은 사랑하는 이에게 특별한 의미를 담아 선물 받은 시계는 그 어떤 고가 시계보다 큰 가치를 지닐 수 있다. 필자에게도 그러한 시계가 있다. 시계 사업 초창기, 밤낮없이 고생하며 자금난에 허덕이던 시절, 사무실 한구석에서 묵묵히 필자를 지켜주었던 투박한 시계는 지금 그 어떤 화려한 스위스 명품 시계보다 큰 의미로 필자의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있다. 그 시계에는 필자의 땀과 눈물, 그리고 꿈을 향한 간절함과 젊은 날의 치열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계는 때로는 시간을 초월한 감동과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개체가 되며, 한 개인의 정체성과 삶의 중요한 가치를 반영하는 상징물이 되기도 한다. 시계는 착용자의 취향, 개성, 심지어는 인생관까지도 드러내는 ‘침묵의 자기소개서’인 셈이다.
한편, 우리는 '브랜드 시계의 허상'에 대해서도 냉철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물론 오랜 역사와 뛰어난 기술력, 독창적인 디자인 철학을 가진 명품 브랜드들의 가치는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들은 시계 산업의 발전을 이끌었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영감을 주었다. 마치 예술가가 혼을 담아 작품을 만들듯, 그들은 수백 년간 축적된 장인정신과 첨단 기술을 결합하여 시간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손목 위의 예술품으로 승화시켰다. 그러나 때로는 브랜드의 명성에 가려져 시계의 본질적인 가치가 왜곡되거나, 과도한 마케팅과 이미지 전략에 소비자들이 현혹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천문학적인 광고비를 쏟아부어 만들어낸 고급스럽고 세련된 이미지, 유명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의 손목에서 빛나는 화려한 모습이 시계의 실제 품질이나 가치를 온전히 대변하지는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일부 브랜드는 의도적으로 공급을 줄여 희소성을 만들고, 이를 통해 가격을 부풀리는 전략을 사용하기도 한다. 소셜 미디어 시대에는 이러한 브랜드 이미지가 더욱 증폭되어, 실제 사용 가치보다는 과시적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흔하다. 중요한 것은 브랜드의 이름값이나 가격표 뒤에 숨겨진 시계 본연의 완성도, 즉 무브먼트의 정밀성, 소재의 질, 마감의 섬세함,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이 자신에게 주는 진정한 만족감과 의미일 것이다. 수천만 원짜리 시계가 주는 만족감보다, 단 몇십만 원짜리지만 자신의 스토리가 담긴 시계가 더 큰 행복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왜 오늘날 세계 시계 시장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시계’는 찾아보기 힘들까?" 역사적으로 미국은 한때 세계 시계 산업을 선도했던 강력한 제조 강국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중반까지 월섬(Waltham), 엘진(Elgin), 해밀턴(Hamilton), 부로바(Bulova), 잉거솔(Ingersoll)과 같은 혁신적이고 경쟁력 있는 자국 브랜드들을 앞세워 대량 생산 방식과 부품 표준화를 통해 스위스 시계 산업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이들은 ‘아메리칸 시스템’이라 불리는 부품 호환 및 대량 생산기술을 시계 제조에 도입하여 합리적인 가격에 고품질의 시계를 공급함으로써 시계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군용 시계 생산을 통해 기술력을 더욱 발전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1970년대 일본에서 시작된 쿼츠 파동의 거센 물결과, 전통적인 기계식 시계의 가치를 고수하며 고급화 전략으로 활로를 모색한 스위스, 그리고 혁신적인 쿼츠 기술과 효율적인 생산 시스템으로 시장을 장악한 일본 시계 산업의 약진 속에서 미국 시계 산업은 급격히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한때 미국의 대표 시계 브랜드 타이맥스(Timex)는 '달러 시계'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대중적이고 저렴한 시계로 큰 인기를 누렸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부담 없이 구매할 수 있는 시계로 자리매김했던 것이다. 해밀턴이나 부로바와 같은 일부 브랜드는 스위스나 일본 자본에 인수되어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에는 역부족이며, 대부분은 미국 브랜드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시계 제조 산업의 판도는 1980년대 초를 기점으로 크게 변화했다. 이전까지 시계 생산은 주로 유럽과 미국이 주도했지만, LCD(액정 표시 장치) 시계의 등장이 큰 전환점을 마련했다. LCD 시계는 기존의 기계식 시계나 LED(발광 다이오드) 시계에 비해 대량 생산이 용이하고 제조 단가가 훨씬 저렴했다. 특히 홍콩과 중국에서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LCD 시계의 대량 생산이 이루어지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미국 전역의 1달러짜리 디지털시계가 전 세계 시장을 휩쓸기 시작했고, 이는 시계 산업의 중심축이 아시아로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중국의 개방과 함께 값싼 노동력이 시계 제조 산업에 대거 투입되면서, 중국은 전 세계 시계 제조 시장을 거의 장악하게 되었다.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저렴한 생산 비용을 앞세워 글로벌 시계 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과거 시계 산업을 이끌었던 유럽과 미국의 많은 제조사들은 큰 타격을 받거나 변화에 적응해야만 했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시계 산업은 세계 시장에서도 그 기술력을 인정받으며 무섭게 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스위스와 일본의 OEM 생산기지로서의 역할을 넘어, 자체 브랜드로 세계 시장을 공략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했다. ‘메이드 인 코리아’ 라벨이 붙은 시계들이 당당하게 세계인의 손목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역인에게 커다란 자부심과 함께 뜨거운 도전 의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국토는 작고 지하자원은 부족한 나라에서 시계는 최고의 상품이 될 수 있다는 스위스와 일본의 사례에서 증명되었듯이, 한국에게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는 잠재력을 의미한다. 시계는 정밀 기술과 막대한 자본이 집약된 산업의 정수이며, 한국은 이미 반도체, 자동차 등 고도의 기술력이 요구되는 분야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입증했다. 이는 시계 산업이 요구하는 정밀 가공 기술, 미세 조립 능력, 그리고 소재 과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이미 내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한국 특유의 빠른 학습 능력과 변화에 대한 민첩한 대응력은 글로벌 시계 시장의 빠른 트렌드 변화에 효과적으로 적응하고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이 책은 바로 그 첫 만남의 설렘으로부터 시작된 필자의 35년 시계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자, 한국 시계 산업의 숨겨진 잠재력과 미래에 대한 진솔한 생각이다. 시계영업으로 세계 시장을 누비던 시절의 경험, 디즈니, 포켓몬과 같은 세계적인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넣었던 라이선싱 시계 사업 이야기, 미국 대통령 기념 시계를 제작하며 느꼈던 자부심과 숨겨진 에피소드들, 그리고 한국 시계 산업의 영광과 좌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K-컬처의 강력한 바람을 타고 비상하려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담고 있다. 이 이야기가 독자 여러분께 ‘시간’의 소중한 가치를 되새기고, ‘한국 시계’라는 매력적이고도 깊이 있는 세계로 빠져드는 즐거운 여정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단순히 흘러가는 시간을 기록하는 도구를 넘어, 우리 삶의 의미를 새기고 미래를 디자인하는 동반자로서의 시계를 함께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속에서 우리는 어쩌면 잊고 지냈던 소중한 가치들을 발견하고, 우리 앞에 놓인 시간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갈 지혜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