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한국시계기업의 흥망성쇠

by 김진산

제2장 한국시계기업의 흥망성쇠


한국에서 '시계'라는 물건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국산 시계 브랜드들이 왜 지금은 대부분 역사 속으로 사라졌는지, 그리고 현재 우리 시계 산업의 민낯은 어떤지 냉정하게 파헤쳐 볼 필요가 있다. 한국 시계 산업의 역사는 광복 전후 시계 수리공들의 활동에서부터 시작된다. 이후 산업화 시대를 거치며 시계는 단순한 생활필수품을 넘어, 예물이나 졸업 선물 등 고부가가치 사치품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삼성시계, 한국오리엔트, 아남산업(후에 포체 FOCE 보유) 등 국내 기업들은 시계 산업을 주도하며 국산화의 바람을 이끌었다.



2-1 폐허 속에서 움튼 정밀공업의 씨앗:한국 시계 산업의 여명기


광복과 6.25 전쟁을 거친 후, 한국은 산업 기반이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정밀공업의 꽃’으로 불리는 시계 산업은 그 당시로선 상상조차 어려운 분야였다. 그러나 1959년, 서울에 대한민국 최초의 손목시계 회사인 ‘천우사(天宇社)’가 문을 열며, 불모지 같던 이 땅에 작은 가능성이 움트기 시작했다. 수입품 일색이던 국내 시계 시장에 ‘국산’이라는 이름으로 도전장을 내민, 상징적이고도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천우사의 시작은 미약했다. 무브먼트, 다이얼, 핸즈 등 핵심 부품은 스위스에서 수입했고, 국내에서는 케이스 조립과 간단한 검사만을 진행하는 수준이었다. 완전한 의미의 ‘국산 시계’는 아니었지만, 변변한 기술도 설비도 없이 맨손으로 시작한 그들의 시도는 분명 위대한 첫걸음이었다. 낡은 돋보기와 핀셋을 들고, 어깨너머로 배운 기술 하나로 시계를 조립하던 그들의 눈빛에는 개척자의 뜨거운 열정이 깃들어 있었다. 이러한 선구자들의 도전은 한국 정밀공업의 밑거름이 되었고, 후발 기업들에게 용기와 영감을 주는 마중물이 되었다.

1960년대 들어, 정부의 수출 장려 정책과 맞물려 시계 산업은 본격적인 성장 궤도에 오른다. 특히 일본과 스위스 시계 회사들의 OEM 물량이 한국으로 쏟아지면서, 한국은 빠르게 세계 시계 생산의 주요 거점으로 부상했다. 값싸고 성실한 노동력, 뛰어난 손재주는 외국 바이어에게 충분히 매력적인 자원이었고, 시계 공장들은 밤낮없이 돌아갔다.

1970~80년대는 한국 시계 산업의 ‘황금기’였다. 연간 수천만 개의 시계와 부품이 생산되었고, 수출액은 수억 달러에 달했다. 한국은 시계 생산량 기준으로 세계 4위권에 올랐으며, ‘수출 효자’라는 타이틀도 거머쥐었다. 젊은이들은 기술을 배우기 위해 시계 공장으로 몰렸고, ‘Made in Korea’라는 라벨이 세계 시장에 퍼져 나갔다.



2-2 별들의 등장과 몰락: 삼성, 오리엔트, 한독, 아남, 로만손


OEM 수출 호황을 기반으로, 국내에서도 자체 브랜드를 내세운 시계 기업들이 하나둘 등장했다. 삼성, 오리엔트, 한독, 아남, 로만손 등은 각기 다른 전략과 비전을 가지고 시장에 도전장을 던졌으며, 국산 시계 산업의 전성기를 함께 만들었다.

그러나 이들은 동시에 몰락의 씨앗도 안고 있었다. 기술력과 자본력을 갖춘 대기업조차도, 시계 산업의 고유한 생태계와 소비자 심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외형적인 성공에만 집중한 측면이 있었다. 각 브랜드의 흥망성쇠는 단지 기업 차원의 부침을 넘어, 한국 시계 산업이 가진 구조적 한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가. 삼성시계 (SAMSUNG WATCH):


최고를 향한 야망, 꺾인 날개, 그리고 값비싼 교훈

"최고가 아니면 만들지 않는다." 삼성의 기업 철학은 시계 사업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77년, 삼성정밀(훗날 삼성항공, 현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이 시계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한국 시계 시장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삼성은 후발주자였지만, 막강한 자본력과 그룹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단숨에 시장의 강자로 떠올랐다. 초기에는 스위스 에보샤(Ebauches SA, 현 ETA)로부터 무브먼트를 공급받아 ‘카파(KAPPA)’, ‘돌체(DOLCE)’, ‘롤라이(Rollei - 삼성 상표)’ 등의 브랜드를 선보이며 고급화 전략을 펼쳤다. 세련된 디자인과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마케팅은 소비자들에게 '삼성 시계는 다르다'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특히 이건희 당시 삼성그룹 부회장(훗날 회장)의 시계 사업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과 관심은 단순한 경영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는 스위스의 유서 깊은 매뉴팩처들처럼, 한국에도 세계적인 명품 시계 브랜드를 키워내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단순한 경제적 이익을 넘어, 문화적 자부심과 국가적 위상을 높이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그의 지휘 아래 삼성은 스위스 기술 도입, 자체 디자인 연구소 설립, 그리고 무브먼트 국산화라는 원대한 목표까지 설정하며 한국 시계 산업의 기술 자립이라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이러한 원대한 꿈과 달리, 삼성시계가 걸어간 길은 냉정한 시장의 현실과 그룹 내부의 복잡한 역학 관계 속에서 수많은 난관에 부딪혔다. ‘최고가 아니면 만들지 않는다’는 철학은 때로는 시장의 요구와 괴리된 이상적인 목표만을 추구하게 만들기도 했다. 당시 국내 소비자들의 소득 수준이나 명품 시계에 대한 인식은 지금과는 현저히 달랐고, 수입 명품 브랜드들이 이미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산 고급 시계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생각보다 좁았다. 삼성이라는 거대한 브랜드 후광도 시계라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성적인 영역에서는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소비자들은 삼성 TV나 냉장고는 믿고 구매했지만,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삼성 시계를 선뜻 구매하는 데는 주저함이 있었다. 이는 브랜드 확장의 어려움과 함께, 시계 시장의 특수성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이 부족했음을 시사한다. 단적으로 말해, 시계는 가전제품이 아니었다. 소비자들이 시계에 기대하는 가치는 단순한 기능이나 성능을 넘어선, 브랜드의 역사, 철학, 그리고 감성적인 만족감이었지만, 삼성은 이러한 무형의 가치를 단기간에 구축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무브먼트 국산화 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술 자립이라는 목표는 숭고했지만, 이미 수십 년, 수백 년간 기술을 축적해 온 스위스와 일본의 아성을 단기간에 넘어서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무브먼트 개발에는 천문학적인 투자와 시간이 필요하며, 설사 개발에 성공하더라도 양산 체제를 갖추고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삼성은 반도체 신화를 이룩한 경험을 바탕으로 시계 무브먼트 분야에서도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자신했을지 모르지만, 시계 산업은 반도체와는 전혀 다른 생태계와 시간의 법칙을 가지고 있었다. 핵심 기술 확보의 어려움과 막대한 투자 부담은 결국 삼성시계의 발목을 잡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결정적으로 삼성시계의 운명을 가른 것은 그룹 내부의 우선순위 변화였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삼성그룹은 반도체, 정보통신, 가전 등 핵심 주력 사업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선택과 집중’ 전략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시계 사업은 상대적으로 성장 가능성이 낮고 그룹 전체의 시너지 효과도 미미한 비주력 사업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이건희 회장의 개인적인 애정이 있었다고 해도, 그룹 전체의 냉정한 사업성 평가와 미래 전략 앞에서는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연간 700억 원이라는 매출은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었지만, 삼성전자와 같은 거대 계열사의 매출 규모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다. 결국 ‘돈이 안 되는 사업’이라는 현실적인 판단, 그리고 그룹 전체의 전략적 포트폴리오에서 시계 사업의 매력도가 낮다는 평가가 삼성시계의 사업 철수라는 비운의 결말을 가져왔다.


만약 삼성이 그때 시계 사업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지금 한국 시계 산업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여전히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삼성이 가진 막강한 자본력과 기술력, 그리고 글로벌 마케팅 능력이 시계 사업에 지속적으로 투입되었다면, 어쩌면 우리는 스위스나 일본 브랜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한국의 명품 시계 브랜드를 가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삼성이라는 브랜드가 가진 신뢰도를 바탕으로, 독창적인 디자인과 혁신적인 기술을 접목한 ‘삼성 워치’가 세계 시장에서 프리미엄 시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국내 시계 부품 생태계도 지금처럼 처참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며, 젊은 인재들도 시계 산업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삼성시계의 철수는 한국 시계 산업 전체에 큰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이는 단순히 대기업 하나가 사업을 접은 것을 넘어, 한국 시계 산업이 자생력을 잃고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삼성시계의 실패 사례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뼈아픈 교훈을 남긴다.

장기적인 비전과 흔들림 없는 투자: 시계 산업, 특히 명품 브랜드 육성은 단기적인 성과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수십 년을 내다보는 장기적인 안목과 꾸준한 투자가 없다면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브랜드 정체성과 시장 이해: 모기업의 후광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시계 브랜드만의 고유한 철학과 가치를 정립하고, 타겟 시장과 소비자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차별화된 전략을 펼쳐야 한다.


핵심 기술 내재화의 의지: 무브먼트와 같은 핵심 기술을 외부(특히 해외)에 의존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경쟁력 약화로 이어진다. 어렵더라도 자체 기술력을 확보하고 내재화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선택과 집중, 그리고 사업 지속성: 그룹 전체의 전략적 판단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한번 시작한 사업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지속성을 가지고 육성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잦은 사업 변경이나 중단은 산업 전체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관련 생태계를 위축시킨다.


삼성시계의 꿈은 비록 미완으로 끝났지만, 그들이 남긴 도전과 실패의 경험은 오늘날 한국 시계 산업을 고민하는 우리에게 여전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최고’를 향한 열망이 현실의 벽 앞에서 어떻게 좌절될 수 있는지, 그리고 하나의 산업이 성장하고 또 쇠퇴하는 과정에서 기업의 전략과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이다. 삼성의 사례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만으로는 부족하며,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치밀한 전략과 냉정한 현실 인식이 동반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취급브랜드

카파 (Kappa): 삼성시계의 대표적인 독자 브랜드였다. 1970년대 삼성전자 시절부터 사용되었으며, 1980~90년대 졸업, 입학 선물용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합리적인 가격과 젊은 층을 겨냥한 디자인으로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다. 아날로그 외에 전자시계, 벽시계 등 다양한 제품으로 출시되었다.


라이선스 브랜드 (론진, 세이코 돌체 등): 설립 초기, 스위스의 론진(Longines), 일본 세이코(SEIKO)와 기술 제휴를 맺고 이들의 브랜드를 국내에서 라이선스 생산했다. 특히 고급 드레스 워치 라인인 세이코 돌체(Dolce)는 당시 TV 광고를 통해 고급 시계의 대명사로 알려졌다.


하스앤씨 (HAAS & CIE): 1997년, 150년 역사의 스위스 시계 브랜드 '하스앤씨'를 인수하여 기술력과 브랜드 가치를 높이려는 시도를 했다. 이를 통해 스위스 메이드의 정통성을 더한 고급 제품을 출시했다.



나. 한독시계 (HANDOK WATCH):


OEM의 달콤한 유혹, 그 끝은 홀로서기의 실패

1966년 설립된 한독시계는 ‘카이저(KAISER)’, ‘크로바(CLOVER)’ 등의 브랜드로 한때 국민 시계로 불리며 한국 시계 산업의 한 축을 담당했던 기업이다. 삼성시계가 ‘고급화’와 ‘기술 자립’이라는 야심 찬 목표를 추구했다면, 한독시계는 보다 현실적인 경로를 통해 성장했다. 그 중심에는 바로 미국의 거대 시계 기업 ‘타이멕스(TIMEX)’와의 OEM(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 계약이 있었다.


1970년대, 타이멕스는 ‘싸고 튼튼한 시계’를 전 세계에 공급하며 대중 시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생산 비용 절감을 위해 해외 아웃소싱을 모색하던 타이멕스에게, 당시 저렴하고 숙련된 노동력을 갖춘 한국의 한독시계는 매력적인 파트너였다. 한독은 타이멕스의 OEM 생산을 통해 안정적인 물량을 확보하고 선진 기술을 습득하며 빠르게 성장했다. 타이멕스의 엄격한 품질 기준을 맞추기 위해 생산 시스템을 혁신하고 품질 관리 능력을 향상시켰으며, 이는 자체 브랜드 시계의 품질 향상으로도 이어졌다. 한때 한독이 생산하는 시계의 상당 부분이 타이멕스 브랜드로 전 세계에 팔려나갔고, 한독은 ‘수출 효자 기업’으로 명성을 날렸다. OEM은 분명 한독에게 ‘젖줄’과 같은 역할을 하며 단기적인 성장을 이끌었다.


하지만 이 달콤한 성공 뒤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타이멕스 OEM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었다. 전체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특정 바이어에게 의존하다 보니, 한독은 자체 브랜드 육성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카이저’나 ‘크로바’는 내수 시장에서는 꾸준한 인기를 얻었지만, 글로벌 시장에서는 타이멕스의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자체적인 디자인 개발이나 해외 마케팅 역량 강화보다는, 당장 눈앞의 OEM 물량을 차질 없이 소화하는 것이 우선시되었다. 이는 한독이 ‘생산 공장’ 역할에 머무르게 만들었고,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는 실패했다.


기술 이전 역시 한계가 명확했다. 타이멕스는 완제품 조립이나 일부 부품 가공 기술은 전수해주었지만, 무브먼트 설계나 핵심 부품 제조와 같은 원천 기술에 대해서는 철저히 통제했다. 한독은 타이멕스의 ‘손발’ 역할은 충실히 수행했지만, ‘머리’가 될 기회는 얻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결국 한독의 기술 자립을 가로막고, 장기적인 경쟁력 확보에 실패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위기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1980년대 후반부터 중국과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더욱 값싼 노동력을 무기로 시계 OEM 시장에 뛰어들면서, 타이멕스는 생산 기지를 한국에서 이들 국가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주 수입원이 하루아침에 끊기자 한독은 심각한 경영 위기에 직면했다. 뒤늦게 자체 브랜드 강화와 수출 시장 다변화를 모색했지만, 한번 OEM 대량 생산 체제에 익숙해진 조직과 시스템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았다. 자체 브랜드의 경쟁력은 글로벌 시장에서 통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새로운 해외 바이어를 발굴하는 것 또한 어려웠다. 한때 성공의 발판이었던 OEM이 오히려 독자 생존 능력을 약화시키는 족쇄가 된 것이다.


결국 IMF 외환위기는 흔들리던 한독시계에 결정타를 날렸다. 여러 차례의 부침을 겪으며 과거의 영광은 빛을 잃어갔다. 한독시계의 사례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OEM 의존의 위험성: 특정 바이어나 OEM 물량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사업 구조는 외부 환경 변화에 매우 취약하다. 안정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자체 브랜드 육성과 시장 다변화 노력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만드는 기술’을 넘어 ‘파는 기술’로: 아무리 좋은 제품을 만들어도 자체 브랜드와 마케팅 능력이 없다면 결국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꼴이 될 수 있다. 생산 기술만큼이나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시장을 개척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핵심 기술 확보의 중요성: 단순 조립이나 가공 기술만으로는 진정한 경쟁력을 갖기 어렵다. 핵심 기술을 확보하고 끊임없이 기술 혁신을 추구해야만 변화하는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쉬운 길’의 유혹을 경계하라: OEM은 당장의 안정적인 수익을 가져다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기업의 독자적인 성장 잠재력을 갉아먹을 수 있다. 단기적인 이익에 안주하기보다는 어려운 길이라도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한독시계의 흥망성쇠는 한국 시계 산업이 OEM이라는 ‘달콤한 독배’에 어떻게 취하고 또 어떻게 무너져 내렸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이는 비단 시계 산업뿐만 아니라, 많은 한국의 중소 제조업체들이 한번쯤 고민해봐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기술은 빌릴 수 있지만, 브랜드와 시장은 빌릴 수 없다는 냉엄한 현실을 한독의 역사는 우리에게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취급브랜드

돌핀 (Dolphin): 한독시계를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브랜드이다. 1984년에 런칭한 스포츠 시계 브랜드로, 강력한 방수 기능과 내구성 덕분에 '군인 시계', '학생 시계'의 대명사로 불렸다. 저렴한 가격에도 뛰어난 품질로 높은 신뢰를 얻으며 현재까지 꾸준히 사랑받는 스테디셀러 브랜드다.


한독 (Handok): 회사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브랜드로, 주로 클래식하고 점잖은 디자인의 드레스 워치를 선보였다. '대통령 시계' 기념품으로 제작되는 등, 신뢰와 정통성을 상징하는 브랜드였다.



다. 오리엔트시계 (ORIENT WATCH KOREA):


기술 자부심의 그늘,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다

오리엔트시계는 1959년 일본 오리엔트 본사와 합작으로 설립되어 한국 시계 산업의 초창기부터 그 역사를 함께한, 산증인과 같은 존재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오리엔트와 일본의 를 동일한 회사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과거 한국 오리엔트는 일본 오리엔트 시계와 기술 제휴 및 브랜드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있었다. 이 계약을 통해 한국 오리엔트는 일본 오리엔트의 기술을 도입해 시계를 생산하고, '오리엔트' 브랜드를 사용하여 시계를 국내에 판매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관계는 변화했다. 일본 오리엔트 시계는 독자적인 글로벌 전략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오리엔트와의 기존 라이선스 계약이 종료되거나, 한국 오리엔트가 독자적인 경영 노선을 걷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한국 오리엔트가 계속해서 '오리엔트' 브랜드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 계약 종료 후에도 상표권 사용에 대한 별도 협의가 있었거나, 혹은 한국 내에서 '오리엔트' 상표권을 독자적으로 등록하고 유지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계약 내용이나 상표권 유지 배경은 외부에 공개되지 않아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과거의 관계를 기반으로 한국 내에서 '오리엔트'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해 온 것으로 보인다.

삼성이나 한독과는 달리, 설립 초기부터 일본 본사의 기술 지원을 바탕으로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시계 제조 기술, 특히 기계식 시계 기술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던 기업이다. ‘갤럭시(GALAXY)’, ‘샤갈(CHAGAL)’ 등 오리엔트의 대표적인 기계식 시계들은 중장년층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으며 ‘튼튼하고 믿을 수 있는 국산 시계’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자체적으로 기계식 무브먼트 부품을 가공하고 조립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은 당시 국내 시계 업계에서 독보적인 강점이었다.


하지만 오리엔트의 이러한 강점은 아이러니하게도 변화하는 시장 환경 속에서 점차 그 빛을 잃어갔다.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쿼츠 혁명은 시계 시장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소비자들은 정확하고 편리하며 가격까지 저렴한 쿼츠 시계를 선호하기 시작했지만, 오리엔트는 자신들의 강점인 기계식 시계에 대한 미련을 쉽게 버리지 못했다. 쿼츠 시계도 생산했지만, 주력은 여전히 기계식이었고, 쿼츠 기술 경쟁에서는 세이코, 시티즌과 같은 일본의 전문 쿼츠 시계 제조사나, 막강한 자본력으로 시장에 뛰어든 삼성과 같은 후발주자들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전통적인 기술력에 대한 자부심이 오히려 새로운 기술 변화에 대한 유연한 대응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 것이다.


또한, ‘오리엔트’라는 브랜드 자체가 가진 ‘올드한’ 이미지는 젊은 세대에게 어필하는 데 큰 한계로 작용했다. 튼튼하고 신뢰할 수 있는 시계라는 인식은 있었지만, 세련되고 트렌디한 패션 아이템으로서의 매력은 부족했다. 디자인 혁신이나 젊은층을 겨냥한 마케팅 노력도 상대적으로 미흡했다. 일본 본사와의 관계 역시 때로는 국내 시장 상황에 맞는 신속한 의사결정과 과감한 마케팅 전략을 펼치는 데 제약 요인이 되기도 했다. 글로벌 본사의 전략과 한국 시장의 특수성 사이에서 효과적인 균형점을 찾지 못한 것이다.

결정적으로 IMF 외환위기는 오리엔트시계에도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


2005년경 한국 오리엔트 시계 (당시 '오리엔트시계공업 주식회사')는 바이오 기업인 '바이오제노믹스'에 매각되었다. 이 인수는 바이오제노믹스의 우회 상장을 위한 전략적인 움직임이었다.

당시 한국 오리엔트 시계는 실적이 좋지 않았지만, 코스피상장사라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바이오제노믹스는 이 상장사 타이틀을 활용하여 자사의 바이오 사업을 증시에 올리고, 자금 조달 및 기업 가치 상승 효과를 얻으려 한 것이다.

인수 후, 한국 오리엔트 시계는 2005년 주력 업종을 시계 사업에서 바이오로 변경하면서 사명을 '오리엔트바이오'로 변경했다. 이로써 오리엔트바이오는 바이오 연구 개발 및 생산을 주력으로 하는 기업으로 재탄생했다. 기존 시계 사업부는 분할되거나 축소되어 명맥만 유지하거나, 다른 중소기업이 '오리엔트' 브랜드의 일부 시계 제품(탁상시계, 벽시계 등)을 생산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오리엔트시계의 부침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남긴다.

과거의 성공 방식에 안주하지 마라: 과거의 성공 방정식이 미래의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시장 환경과 소비자 트렌드는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핵심 역량을 유지하되 새로운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혁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브랜드 리뉴얼의 중요성: 오래된 브랜드일수록 시대의 흐름에 맞춰 끊임없이 이미지를 쇄신하고 젊은 세대와 소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전통’이 ‘낡음’으로 인식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핵심 역량과 시장 요구의 조화: 아무리 뛰어난 기술력을 가지고 있어도 시장이 외면하면 소용없다. 자사의 핵심 역량을 시장의 요구에 맞게 어떻게 재해석하고 적용할 것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이 필요하다.


오리엔트시계는 한국 시계 산업의 기술적 자존심을 상징했지만, 변화의 물결 앞에서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결국 쇠락의 길을 걸었다. 이는 ‘잘 만드는 것’만큼이나 ‘잘 파는 것’, 그리고 ‘시대의 흐름을 읽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취급브랜드

갤럭시 (GALAXY): 한국 오리엔트시계가 1984년에 런칭한 고급 독자 브랜드이다. '국산은 저렴하다'는 인식을 깨기 위해 탄생했으며,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 공식 시계로 지정되며 대한민국 대표 고급 시계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결혼 예물 시계로 큰 인기를 누렸다.


샤갈 (CHAGAL): 1984년 갤럭시에 이어 출시된 패션 시계 브랜드이다. 예술가 샤갈의 이름에서 영감을 얻어 예술적이고 감각적인 디자인을 선보이며 시계의 패션화를 주도했다.


라. 아남시계 (ANAM WATCH):


기술력과 시장의 미스매치, 반도체 명가의 아쉬운 퇴장

아남시계는 모기업인 아남산업(현 앰코테크놀로지코리아)의 강력한 전자 기술력을 바탕으로 1970년대 후반 시계 시장에 뛰어든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당시 시계 산업은 쿼츠 혁명으로 인해 기계식에서 전자식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던 시기였고, 아남은 자신들의 강점인 반도체 기술을 활용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프리미어(PREMIER)’, ‘넥센(NEXXEN)’ 등의 브랜드로 주로 LCD 디지털 전자시계와 아날로그 쿼츠 시계를 선보이며 중저가 시장을 공략했다.


아남의 시계들은 모기업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비교적 우수한 품질과 다양한 기능을 갖추고 있었지만,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시계 산업의 특성에 대한 이해 부족이었다. 시계는 단순한 전자기기가 아니라, 착용자의 개성과 스타일을 드러내는 패션 아이템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아남은 시계를 기술 중심적인 제품으로만 접근하는 경향이 있었다. 디자인의 다양성이나 브랜드 이미지 구축, 감성적인 마케팅 전략 등에서는 경쟁사들에 비해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아남’이라는 브랜드 자체가 가진 ‘전자제품 회사’ 이미지는 시계 브랜드로서의 매력을 높이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했다. 기술적 우위가 반드시 시장에서의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또한, 디지털 전자시계 시장은 이미 일본의 카시오(CASIO)와 같은 강력한 글로벌 플레이어들이 선점하고 있었고, 아날로그 쿼츠 시계 시장 역시 스위스, 일본, 그리고 국내 경쟁사들과의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했다. 아남은 이러한 경쟁 환경 속에서 뚜렷한 차별점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모기업의 주력 사업인 반도체 사업과의 시너지 효과도 미미했고, 그룹 전체적으로도 시계 사업은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남시계는 1990년대를 거치면서 점차 시장에서 영향력을 잃어갔고, IMF 외환위기를 전후하여 사실상 시계 사업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아남시계의 사례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준다.

핵심 역량과 시장의 적합성: 보유한 핵심 기술이 뛰어나더라도, 진출하려는 시장의 특성과 소비자 니즈에 부합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다.


브랜드 아이덴티티 구축: 기술력만으로는 브랜드를 만들 수 없다. 소비자에게 각인될 수 있는 명확한 브랜드 아이덴티티와 스토리가 필요하다.


토탈 패키지로서의 제품: 시계는 기술, 디자인, 브랜드, 마케팅, 유통 등 모든 요소가 조화롭게 결합된 ‘토탈 패키지’ 상품이다. 어느 한 부분만 뛰어나다고 해서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남시계는 반도체 명가의 야심 찬 외도였지만, 시계 시장의 높은 벽을 넘지 못하고 아쉬운 퇴장을 맞이했다. 이는 기술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시장 중심적, 소비자 중심적 사고로 전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준다.

취급브랜드

알펙스 (ALPEX): 아남시계를 대표하는 브랜드로, 삼성의 카파와 경쟁 구도를 형성했다. 주로 젊은 층을 타겟으로 한 스포티하고 캐주얼한 디자인의 시계를 선보였다.


카리타스 (Caritas): 보다 클래식하고 고급스러운 라인업을 담당했던 브랜드다. 아남시계의 명맥을 이어 '카리타스 컴퍼니'로 상호를 변경하며 전통을 이어가려는 시도도 있었다.



마. 로만손 (ROMANSON, 현 J.ESTINA):


디자인 승부수를 던지다: 척박한 땅에서 피어난 ‘로만손’이라는 이름

로만손시계는 최근까지 국내 시계 업계를 이끌어 나간 중견기업이다. 이장에서는 로만손시계의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논 해보려고 한다. 로만손은 국내 시계 업계에서 제일 늦은 후발주자로서 출발했지만 그 영향력은 대기업에 못지않았다. 어려운 중소기업의 환경에서 한국시계의 위상을 전세계에 크게 알린 회사로 생각한다. 그러나 지난 10여 년간 상호도 바뀌면서 시계사업을 축소하는 경영에 한국시계의 어려움을 다시 느끼게 한다.


"우리만의 디자인으로 세계 시장에 도전한다." 이 한 문장은 1988년 로만손이 세상에 던진 출사표이자, 지난 30여 년간 한국 시계 산업의 격동기를 헤쳐 나오며 생존과 성장을 이끌어온 핵심 동력이었다. OEM 수출의 황혼과 IMF 외환위기의 혹독한 겨울 속에서 대기업들마저 좌초하던 시절, 로만손은 척박한 토양에서 싹을 틔워 독자적인 브랜드 신화를 써 내려갔다. 그들의 여정은 자본이나 배경 없이, 오직 시계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시장을 읽는 날카로운 안목, 그리고 ‘메이드 인 코리아’ 디자인에 대한 자부심으로 일궈낸 치열한 생존의 기록이다. 그러나 오늘날 K-패션의 선두주자 J.ESTINA로 화려하게 변신한 그들의 성공 이면에는, 한때 국내 시계 시장을 풍미했던 ‘시계 명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표와 아쉬움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1988년, 김기문 대표는 ‘우리 기술과 디자인으로 만든 시계로 세계 시장의 인정을 받겠다’는 뜨거운 열망을 안고 로만손을 설립했다. 당시 한국 시계 시장은 삼성, 오리엔트, 한독, 아남 등 대기업 브랜드들이 이미 포진해 있었고, 대부분의 중소 업체들은 해외 브랜드의 OEM 생산에 의존하며 그들의 그늘 아래 안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후발주자인 로만손이 선택한 길은 달랐다. 스위스의 유서 깊은 시계 공업 도시 ‘로망스호른’에서 영감을 얻어 ‘로만손(ROMANSON)’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디자인 중심의 합리적인 가격대 패션 시계’라는 명확한 목표를 설정했다. 이는 거대 자본 없이도 시장의 빈틈을 파고들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자, 모방이 아닌 창조로 승부하겠다는 의지의 천명이었다.


초기 로만손은 생존을 위해 OEM 생산을 병행하며 기술 노하우를 쌓고 사업 기반을 다지는 한편, 한정된 자원 속에서도 독자적인 디자인 개발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이는 당시 해외 유명 브랜드의 스타일을 쫓기에 급급했던 국내 업계의 관행과는 확연히 차별화되는 전략이었다. 자체 디자인 연구소를 운영하고 젊고 실력 있는 디자이너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했으며, 매 시즌 새로운 트렌드를 반영한 개성 있는 컬렉션을 선보였다. 특히 여성 소비자들의 섬세한 감성을 자극하는 우아하고 세련된 디자인의 여성 시계들은 로만손을 시장에 각인시키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품질에 대한 타협 없는 고집, 그리고 ‘트로피쉬’ 신화


품질에 대한 타협 없는 고집 또한 로만손 성공의 중요한 축이었다. 비록 시계의 핵심부품인 무브먼트는 스위스의 론다(RONDA)나 ETA 등 검증된 해외 제품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지만(이는 당시 국산 무브먼트의 부재와 기술력 부족이라는 한국 시계 산업 전체의 현실적 한계였다), 케이스 가공, 도금, 방수 처리 등 완제품의 마감 품질만큼은 최고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합리적인 가격에 스위스 기술이 담긴 고품질 한국 시계’라는 이미지는 소비자들에게 점차 신뢰를 얻었고, 이는 1990년대 중반 ‘트로피쉬(Trophy Fish)’라는 전설적인 히트작 탄생으로 폭발했다. 물고기 비늘에서 영감을 얻은 독특하고 아름다운 디자인의 이 여성 시계는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로만손을 국내 대표 시계 브랜드 반열에 당당히 올려놓았다. ‘트로피쉬’의 성공은 로만손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이후 다양한 컬렉션을 성공적으로 론칭하는 데 든든한 발판이 되었다.


해외 시장 개척, 중동을 매혹시킨 ‘한국 시계’의 저력


그러나 로만손의 진정한 저력은 국내 시장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감행한 해외 시장 개척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1997년 IMF 외환위기로 국내 시계 산업이 초토화되다시피 했을 때, 로만손은 오히려 해외로 눈을 돌려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 특히 당시 한국 기업들에게는 다소 생소했던 중동 시장에 과감히 도전하여 큰 성공을 거둔 것은 로만손 역사에 길이 남을 신화로 평가받는다. 금색을 선호하고 전통적으로 화려한 디자인을 좋아하는 중동 소비자들의 취향을 정확히 간파하고, 현지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맞춤형 제품과 마케팅 전략이 주효했다. 이는 단순히 제품을 수출하는 것을 넘어, ‘메이드 인 코리아’ 시계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고 ‘코리아 프리미엄’을 창출하는 선구자적인 역할이었다. 중동에서의 성공은 로만손에게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다는 확신을 안겨주었고, 이후 러시아, 동유럽, 동남아 등지로 시장을 공격적으로 확대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변신과 확장: K-패션 기업 J.ESTINA로의 도약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로만손은 또 한 번의 중요한 변화와 마주한다.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시계의 전통적인 역할이 위협받고, 빠르게 변화하는 패션 트렌드 속에서 시계 단일 품목만으로는 지속적인 성장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냉정한 판단 아래, 사업 다각화라는 새로운 승부수를 던졌다. 2003년 론칭한 주얼리 브랜드 ‘J.ESTINA(제이에스티나)’는 이탈리아 공주를 모티브로 한 매력적인 스토리텔링과 ‘티아라’라는 강력한 시그니처 디자인, 그리고 김연아, 소녀시대 등 당대 최고 스타들을 활용한 효과적인 마케팅 전략에 힘입어 그야말로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J.ESTINA의 성공은 기존 로만손 시계 사업의 규모를 훨씬 뛰어넘었고, 결국 2016년 회사 이름을 ‘J.ESTINA’로 변경하며 시계, 주얼리, 핸드백을 아우르는 글로벌 패션 기업으로의 도약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게 된다. 이는 로만손이 ‘시계 전문 기업’이라는 틀을 깨고, 더 넓은 패션 시장의 강자로 거듭나겠다는 야심 찬 비전의 표현이었다.


엇갈리는 시선: ‘시계 명가’의 자부심은 어디에?


J.ESTINA로의 성공적인 변신은 기업 경영의 효율성과 시장 변화에 대한 능동적인 대응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 화려한 이면에는, 한때 회사의 근간이었던 시계 사업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축소되고, 과거 로만손이 보여주었던 ‘시계 전문 기업’으로서의 혁신적인 도전 정신이 희미해져 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비판의 목소리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시계 업계에서는 J.ESTINA의 주력 사업이 주얼리와 핸드백으로 옮겨가면서, 시계 부문에 대한 R&D 투자나 혁신적인 기술 개발 노력이 과거에 비해 소홀해진 것은 아닌지, 브랜드 정체성이 모호해지고 패션 액세서리로서의 역할에만 치중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우려가 제기된다. 과거 ‘로만손’이라는 이름이 ‘합리적인 가격의 고품질 국산 시계’라는 명확한 정체성을 가졌던 것과 달리, 현재 J.ESTINA 브랜드 산하의 시계는 그 독자적인 스토리나 철학이 희석되고 있다는 비판이다.


일반 소비자들, 특히 과거 로만손 시계에 대한 애정을 가진 이들 사이에서도 아쉬움은 크다. ‘국민 시계’로서 폭넓은 사랑을 받았던 로만손의 친근함과 다양성이 줄어들고, J.ESTINA 브랜드의 특정 여성 고객층에 집중하는 듯한 모습은 과거의 영광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안타까움으로 다가온다. 독창적이고 도전적인 디자인보다는 단기적인 판매를 위한 트렌디함에만 초점을 맞추는 듯한 인상 역시 ‘시계 명가’ 로만손의 퇴색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로만손이 남긴 교훈과 한국 시계의 미래


로만손의 30여 년 역사는 한국 시계 산업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그들의 성공과 현재의 모습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 독자적인 브랜드와 디자인의 힘: OEM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체 브랜드를 만들고, 모방이 아닌 창조적인 디자인에 투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증명했다.

* 틈새시장 공략과 해외 시장 개척: 대기업이 장악한 시장에서도 차별화된 전략과 과감한 도전으로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특히 중동 시장 개척은 한국 중소기업의 해외 진출 성공 사례로 손꼽힌다.

* 변화에 대한 유연한 대응과 혁신: 시계 산업의 위기 속에서 주얼리, 패션으로 사업을 확장하며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한 유연성은 생존과 성장의 핵심 동력이었다.


로만손은 제한된 자원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디자인’과 ‘브랜드’라는 무형의 자산을 통해 독자적인 생존과 성장의 길을 개척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그들의 빛나는 성공과 현재의 그림자는 오늘날 한국 시계의 부활을 고민하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J.ESTINA가 시계 사업 부문에서도 과거 로만손이 보여주었던 혁신과 도전 정신을 되살려, 다시 한번 한국 시계 산업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를 기대해 본다.


2-3OEM의 함정과 다가오는 위기

OEM은 단기간에 안정적인 수익과 기술 습득의 기회를 제공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자립 기반을 약화시키는 ‘달콤한 독배’였다. 브랜드 육성에 소홀했고, 핵심 기술인 무브먼트 개발보다는 조립에 머물렀다. ‘Made in Korea’는 ‘싸고 질 좋은 제품’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었지만, ‘갖고 싶은 시계’라는 브랜드 가치는 구축하지 못했다.

1980년대 후반,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저가 공세가 시작되자 한국은 경쟁력을 잃기 시작했다. 일본과 스위스 기업들도 OEM 생산기지를 한국에서 더 저렴한 국가로 이전하며, 한국의 OEM 수출 기반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기술 개발 투자에도 소홀했다. 당장 밀려드는 OEM 물량을 소화하기에도 바빴고, 자체 기술 개발보다는 외국 기술을 모방하거나 도입하는 데 급급했다. 특히 쿼츠 시계가 대중화되면서 스위스가 자존심을 걸고 기계식 시계의 명품화를 추진한 반면, 우리는 이러한 시장 변화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어정쩡한 포지션에 머물렀다. 디자인 역시 독창성보다는 해외 유명 브랜드의 스타일을 답습하는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2-4IMF 외환위기, 그리고 산업의 외면


1997년 IMF 외환위기는 한국 시계 산업에 치명타를 안겼다. 내수 시장은 얼어붙고, 수출 경쟁력은 추락했다. 자금난 속에 수많은 시계 기업들이 줄도산했고, 기술자들은 업계를 떠났다. 한때 세계 4위 생산국이었던 한국은 산업 기반 자체가 붕괴되는 상황에 처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시계 산업이 정부와 사회로부터 ‘사양 산업’으로 취급받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정책적 지원은 끊겼고, 젊은 세대는 더 이상 시계 기술을 배우려 하지 않았다. 시계 산업은 서서히 대중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고, 종로 예지동 시계골목의 불빛마저 하나둘 꺼져갔다.



2-5현재 한국 시계 산업의 현주소: 냉혹한 현실 인식


2024년 현재, 한국 시계 산업은 다음과 같은 위기에 직면해 있다.

시장 구조의 재편: 고가 시장은 스위스, 중저가 시장은 일본과 중국이 장악하고 있다. 국산 브랜드의 설 자리는 거의 없다.

유통의 변화: 백화점, 면세점 중심이던 유통은 온라인 플랫폼으로 이동했으나, 국내 브랜드는 여전히 오프라인 중심에 머물러 있다.

제조 기반의 붕괴: 핵심 부품의 해외 의존도가 극심하며, 자체 생산 가능한 업체는 극소수다.

기술 인력의 고령화: 기술자는 노령화되었고, 새로운 인재 유입은 거의 없다.

스마트워치의 확산: 기능과 가격에서 압도적인 스마트워치의 등장은 전통 시계 산업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희망은 존재한다. 로만손과 같은 독립 브랜드가 해외에서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으며, 독창적인 디자인을 앞세운 소규모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SNS를 통해 젊은 층의 관심을 받고 있다.

K-컬처 열풍 속에서 ‘한국적인 디자인’에 대한 전 세계적인 관심은 시계 산업에도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막연한 낙관론이나 과거의 영광에 대한 향수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한국 시계 산업이 다시 한번 도약하기 위해서는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고, 뼈를 깎는 자기반성과 혁신적인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다음 챕터부터는 이러한 현실을 바탕으로 한국 시계 산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볼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화려한 수사가 아니라, 냉철한 분석과 실질적인 대안이다.



2-6결론: 실패의 역사에서 배우는 한국 시계의 미래 전략


한국 시계 산업의 흥망성쇠는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다.

브랜드 전략의 부재: OEM에 안주하며 자체 브랜드를 키우지 못했다.

핵심 기술의 외부 의존: 무브먼트 국산화에 실패하며 기술 종속 상태에 머물렀다.

시장 변화에 둔감: 소비자 트렌드와 기술 변화에 뒤처졌다.

단기 성과주의: 장기적 안목보다 당장의 수익에 집중한 경영 전략이 결국 산업을 약화시켰다.


이제 우리는 과거의 실패를 딛고 새로운 비전을 그릴 차례다.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장기적인 전략과 창의적인 접근으로 한국 시계의 미래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 다음 장부터는 그 가능성과 대안을 구체적으로 탐색해보려 한다.

한국 시계 산업이 다시 뛰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과거의 향수’가 아니라, ‘미래를 향한 치열한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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